젤다 피츠제럴드는 슬프게도 아직은 자신의 이름보다 남편의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작가다. 필경 젤다의 재능을 살리기는 커녕 묻어버리고 그 재능의 과실을 독차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는 F. 스콧 피츠제럴드의 행동은 당시로서는 유별날 것이 없는 흔한 쪼잔함이었지만 현대에 와서 돌아보면 치졸하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1970년 전기 작가 낸시 밀퍼드가 젤다의 평전으로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오른 것을 계기로 젤다는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재능 있는 여자>는 2019년 에이치비 프레스에서 출간된 작품집 <젤다>에 세번째 단편소설로 수록되어 있다.
줄거리
아직 아마추어 티를 벗지 못한 루는 춤도 노래도 탁월하게 뛰어나지는 않아도 묘한 매력이 있는 여자다. 나는 공연이 끝난 뒤 루와 시간을 보내다 남편이 루의 삶을 탐탁지 않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새로운 클럽 기획에서 루의 자연스럽고 생명력 넘치는 춤은 모두를 사로잡고 루는 일약 스타로 떠오른다. 파티에서 처음 만난 흑발의 미남자와 닷새 간의 잠적 끝에 기진맥진한 몰골로 돌아온 루는 뒤이어 이혼을 진행한다. 그 뒤 우연히 마주친 루는 파리의 한 카지노와 계약했다며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한다.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승승장구하며 성공가도를 달리던 루가 키가 크고 금발인 영국 남자와 중국으로 갑자기 떠나버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토록 즐거운
세상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즐거움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긍정적인 것과는 다소 다른 이 즐거워하는 능력은 낙관으로 불리기도 하고 제멋대로라고 불리기도 하고 순수함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체로 그 사람들은 진중하지 못하고 대책 없다는 평가를 받는데, 그런 혹평도 크게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다. 그리고 루가 바로 이런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루는 극장에서 공연을 한다. 루의 노래도 춤도 대스타의 반열에 오를 만큼 뛰어나지 않은, 냉정하게 말하자면 기예적인 측면에서 커다란 재능이 있지는 않은 수준이다. 하지만 루는 극장 매니저들에게는 섹시함으로, 안목 있는 관객에게는 흡인력으로, 공연계의 저속한 방면에 널리 퍼져 있는 적들 사이에서는 부족함으로 통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노래도 춤도 별반 볼 것이 없고 뭐하나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며 체격은 소고기 먹는 맥주병 같다는 적들의 비방에도 루는 개의치 않는다.
모든 것을 가졌으나
무대에서 춤을 추는 루는 현란한 탭댄스로 폭포수 같은 리듬을 만들며 빙긋 깊은 미소를 짓는다. “모든 제스쳐는 이렇듯 무의식적이었다”, “세상 사람들뿐 아니라 그녀 자신에게도 놀라운 일이라는 듯이.” 흔히 여자에게 기대하는 조신하고 얌전한 웃음이 아니라 당당하고 진지한 웃음이었다. 거대한 품위와 절제 위에 포개 놓은 것처럼 미소짓는 루는 씩씩하게 걸었고 혈통 좋은 사냥개처럼 섰다. 루는 유명한 남편, 예쁜 아기, 부유한 재정 상황 등 그야말로 모든 것을 가졌다. 많은 것을 갖고도 불행만을 보는 사람들과는 달리 루는 모든 것을 가졌다는 말에 경쾌하게 수긍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풍요로움에 매몰되지 않는다. 루는 그 많은 것을 얻게 해준 부유한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아기를 예뻐하기는 하지만 몰두하여 자기를 놓치지 않는다. 루는 춤을 춘다. 현대에 와서도 옹졸한 남편들에게는 크게 환영받지 못할 밤의 춤꾼으로서 루는 춤을 추는 것을 즐기고, 즐거운 마음 그대로 춤춘다.
그러다 늦었다며 성을 내는 남편에게 루는 사과하지 않는다. 아기를 살뜰히 보살피며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어머니가 아닌 것에도 사과하지 않는다. 자신의 잠적으로 손해를 본 극장 관계자들에게도 사과하지 않는다. 루는 그들에게 약간의 가책을 느끼지만 그 뿐이다.
육중한 그림자들 안팎을 배회하며 위압에 반항하는 루, 하늘이 자체의 무게로 펴고 둥글려서 품위 있는 선으로 완성한 어깨를 뽐내며 패널 벽이든 내리석 벽난로든 가정의 어떠한 지배도 받아들이지 않는 루.
다시 말해 루의 재능은 독립심과 맞닿아 있다. 세상 일에 즐거워하기 위해서는 어떤 관계도 자신을 진정으로 해치거나 지배할 수 없음을 마음 속 깊이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루의 재능은 즐거움을 찾아내는 것이자 찾아낸 즐거움이 무엇으로도 다치지 않게끔 스스로에게 부과된 의무나 강제된 부채감을 적당히 무시하는 것이다. 남편이 면전에서 문을 닫아버렸을 때 루가 내뱉은 “그래, 이걸로 끝이야.”라는 말은 루의 재능을 똑똑히 보여주는 좋은 예시다. 매달리지 않고, 화를 퍼붓지 않고, 억울해하지 않고, 아마도 루 또한 많이 참고 별렀을 결론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
춤추듯이 떠난다
그 뒤 루는 공연하던 극장을 떠난다. 루가 출연했던 쇼가 떠난다는 소식에 화자인 ‘나’는 루가 드디어 통속적인 사회규범에 굴복하여 공연계를 떠나 가정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루는 오히려 여봐란듯이 다른 공연장인 레 아르카드와 계약하여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화려한 무대와 장엄한 조명은 루에게 마술을 부려 눈부신 재능이 여과없이 드러나게 했다. 루는 허공으로 미소를 날리거나, 곁눈으로 찡긋거리거나 관중을 루의 비밀로 초대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행복감에 사로잡혀 춤을 추었다. 이리저리 움직이고, 빙글빙글 돌고, 탭댄스 턴을 하고, 플로어를 망치처럼 빠르게 두들기고, 다시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데서 지극한 쾌감을 느꼈다. “나는 춤추는 게 좋”고, “이것만큼 재미난 건 세상에 없”다고 말하는 듯한 몸짓은 관중을 열광하게 했다. 그리하여 루는 일찍이 재정적으로 풍족한 남편 덕분에 가졌던 모든 것들을 이제 자신의 힘으로 가졌다. 루는 즐거워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즐거움은 전염된다.
즐거운 루는 점점 더 승승장구한다. 이혼 후 루는 코트다쥐르의 굉장한 카지노와 굉장한 계약을 맺고 굉장한 돈을 벌기 위해 신나게 길을 나선다. 화자인 ‘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지만 말을 하지는 않는다. 허무맹랑한 계힉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는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둔다. 엄청난 히트를 치며 커리어의 정점에 섰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무렵, 루는 돌연 어떤 남자와 중국으로 사랑의 도피를 한다. 이전의 잠적을 고려해보았을 때 루가 그 남자를 모든 커리어와 맞바꿀만큼 사랑하고 이번에야말로 특별한 운명이라고 생각해서 목숨을 걸듯 떠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루는 좀 더 즐거워보이는 것을 즐겁게 행한 것이리라. 카지노와의 공연 계약도 사회적 위신도 단지 적당히 무시한 것이리라.
자신이 느끼는 즐거움이 천지를 흔들 만큼 강렬한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루는 주변을 다소 무시하고 즐거움을 좇는다. 더불어 루는 자신조차 적당히 즐겁게 무시하는 사람인 까닭에, 후폭풍을 크게 앓으며 자책으로 빠지지도 않는다. 이것이 특별한 재능이 있는 여자, 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