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이름으로: 테나

알다여성 주인공

자신의 이름으로: 테나

꽈리

얼마 전 타계한 어슐러 K. 르귄은 방대한 저작을 남긴 SF, 판타지 문학의 거장이다. <아투안의 무덤>은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와 함께 세계3대 판타지 문학으로 꼽히는 어스시 시리즈의 두번째 권으로 시리즈의 주무대인 ‘마법사들의 땅’이 아닌 그 동쪽의 카르그 제국을 배경으로 한다. 한국에서는 2001년 황금가지에서 출간되었다.

줄거리

이름이 지어지지 않은 힘을 모시는 아투안 무덤의 유일 무녀 아르하는 환생을 거듭하여 한 생이 다하는 순간 다른 육신으로 태어난다고 전해진다. 아르하로 지목되어 먹힌 자가 되는 의식을 치르고 유일 무녀가 된 테나는 묘역으로 끌려오기 이전의 기억은 모두 잊어버리고 끝없는 제의가 이어지는 무녀들의 삶만을 익히며 성장한다. 신왕의 최고 무녀인 코실과의 미묘한 권력 싸움이 이어지던 어느 날 묘역의 지하 무덤에 침입자가 나타난다. 이름 없는 어둠의 힘에 봉헌된 옥좌관 아래 지하무덤과 이어지는 미궁 속 대보고에 숨겨진 에레삭베의 고리를 찾아 서쪽에서 마법사 게드가 바다를 건너 숨어 들어온 것이다. 아르하는 게드를 미궁에 가두고 코실 몰래 수차례 게드를 방문한다. 게드를 추궁하던 아르하는 자신을 가두고 있던 의문과 구속을 깨닫는다. 테나는 잃어버렸던 이름을 되찾고 더이상 아르하로 살지 않기로 결정한다. 무덤을 무너뜨리는 지진을 뒤로 하고 테나는 게드와 함께 아투안을 떠난다.

아르하, 테나, 아르하, 테나

체제는 개인을 독립적인 개체로 두지 않는다. 한 개인의 생각, 행동, 성격, 지위, 이름에 이르기까지 체제와 무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 체제가 어떤 개인의 존재를 지우려고 마음 먹으면 개인이 그에 대항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체제 안에서 자란 개인은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어떻게 억압받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아르하는 자유와 존재를 잃은 여자아이다. 아르하는 이름을 잃고 자기 자신으로서의 고유성도 잃고, 그에 의문을 품는 것은 고사하고 몰자아한 모습이 자랑스러운 것이라고 세뇌당하는 여자의 대외적인 정체성이다. 감쪽같이 착취하는 이름, 아르하.

기억나지도 않는 어린 시절의 한 시점부터 테나는 그저 아르하다. 테나는 처음부터 줄곧 그곳, 묘역의 사람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제식에 따라 먹힌 자가 된 이후 테나는 이름을 잃는다. 한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잃는다. 신을 믿지 않는 코실도, 엄한 스승인 사르도, 팔려오다시피 무녀가 된 동년배 펜드도 묘역에 들어오기 이전이나 이후에나 코실이고 사르이고 펜드이지만 테나는 아니다. 테나는 아주 잠시 테나였지만 한번도 테나인 적이 없는 아르하가 된다. 아르하는 이름이 아니다. 대명사일 뿐이다. 테나는 이름이 없는 이, 먹힌 이, 오래전부터 생에서 생으로 존재했기에 이 생애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다. 아르하로서 살아가는 것만 허락되는 테나는 여자로서만 살아있기를 종용받는 많은 여자들과 궤를 같이 한다. 테나는 아르하지 테나가 아니다. 여자는 단지 여자일 뿐 이름이 없다.

아르하로서의 테나는 명목상 누구도 감히 거스를 수 없는 가장 높은 자이다. 묘역 내에서 아르하를 막아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왕의 최고 무녀인 코실조차도 아르하가 명령을 내리면 따라야 한다. 다른 존재로 환생하는 여타 사람들과는 달리 아르하만이 아르하로 다시 태어나 영원을 살고, 세상 그 무엇보다도 오래된 이름 없는 주인에게 속하여 그 권능을 대신 부린다고 한다. 아르하는 권력과 힘의 정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 아르하의 권위는 껍데기일 뿐이다. 더욱이 허울 좋은 명패만을 겨우 걸친 테나는 스스로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가장 무력한 자다. 아르하의 너울 아래 테나는 테나이든 누구이든 조금도 상관이 없다. 아르하의 자리에 있는 이가 테나가 아니어도 무엇도 달라지지 않는다. 테나가 테나인 것은 어떤 의미도 없고, 따라서 테나는 있으나 마나한 자다. 테나는 아르하가 되는 순간 테나로서의 모든 것을 갈취당한다. 테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더없이 영예롭고 숭배받는 아르하라는 빛 좋은 말들에 진심으로 홀리는 것만이 살길인 것처럼.

내 이름을 도로 찾았다

테나가 게드를 만나 그동안 아르하로 숭배 받던 것이 억압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테나 스스로도 아르하로서의 삶이 어딘가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테나를 뒤틀린 틀에 욱여넣고 있는 듯한 석연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테나는 특권으로 보이는 것이 교묘한 속박임을 이미 알았지만 확신이 없었을 따름이다. 자기 자신의 목소리가 체제가 설파하는 것과 다름을 일찍이 알았기 때문에 게드를 발견하자마자 죽이지 않고 거듭 찾아가 마음 속의 의혹을 파헤쳤던 것이다. 혼란스러운 부정과 분노의 단계를 거쳐 테나가 “내 이름을 도로 찾았”다며 “나는 테나”라고 선언할 때 테나는 빼앗겼던 이름과 함께 자유를 되찾는다. 비록 몸은 아직 묘역에 묶여있어도 아르하라는 이름을 떨치고 자유를 쟁취할 테나 고유의 힘을 되찾는다.

그것은 선언함과 동시에 시작되는 일이다. 테나가 테나라면 테나는 아르하가 아니다. 테나가 자기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아르하는 사라진다. 테나는 아르하를 없애고 아르하로서 누리던 삶을 내던진다. 지금껏 섬겨온 이름 없는 힘의 주인을 두려워 하면서도 아르하로 되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아르하에게 도둑이고 침입자이며 사기꾼인 마법사, 서쪽의 게드에게 대보고의 보물을 주고 미궁에서 빠져나갈 길을 알려주는 일이 체제를 배신하는 일이라는 것을 테나는 분명히 안다. 테나는 이름 없는 힘에게도 코실에게도 보살펴주고 사랑해준 호위 마난에게도 과거의 자신인 아르하에게도 명실상부한 배신자다. 배신자일 뿐이랴, 옥좌관과 지하 미궁을 무너뜨리면서 떠나는 테나는 체제를 뒤엎고 깨부수는 반란범이다.

나의 이름을 찾아

테나가 테나로 살기 위해서는 억압의 다정한 모습이었던 마난도 억압의 구체적 기반이었던 옥좌관도 사라져야 했다. 자신이고자 하는 길에 무너져야 할 묵은 유산이 있다는 것을 테나는 알았다. 이름이 없을 것을 강요하는 체제가 있는 한 여자는 이름을 찾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테나가 자유를 쟁취하고 테나 스스로가 되어 나아가는 길목에 아르하의 자리는 없다. 영광스럽고 고귀하고 비밀스럽고 강력한 유일 무녀의 자리는 없다. 테나의 존재를 말살하며 선심 쓰듯 부여해준 기존 체제의 케케 묵은 옥좌도 없다.

이름 없는 여자아이는 세상 전부가 현혹해도 자신의 이름을 찾는다. 자칫 속아넘어가 제 손으로 죽일 수도 있었을 변화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빼앗고 속이고 세뇌하고 위협해도 자유를 향해 걷는다. 어두운 미궁 속을 홀로 헤매도록 떠밀린 여자 위에 세워진 거대한 무덤은 미궁 속을 속속들이 알게 된 여자의 걸음을 막으려다 송두리째 무너진다. 길을 아는 것은 오직 아르하, 이름 없는 여자 뿐이다. 자유로운 여자는 잿더미 속에 남지 않는다. 자신의 이름으로 새 땅을 찾는다.

<책 속의 여성들> 시즌 1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책 속의 여성들>은 신간과 만화를 포함한 더욱 풍성한 시즌 2로 다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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