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 주기로 발표되는 <그랜타> 미국의 젊은 작가에 선정되는 등 오늘날 영미 문학계가 가장 주목하는 작가인 오테사 모시페그가 2015년 발표한 첫 장편 데뷔작인 <아일린>은 작가가 개성과 문학성을 겸비한 유망주로 자리매김하는 데에 많은 공을 세운 작품이다. <아일린>은 억압받으며 살고 있던 아일린이 태어나자란 도시를 떠나 뉴욕행에 오르기 직전 일주일을 다룬 이야기로, 놀라운 장편 데뷔작이라는 찬사와 함께 2016년 펜/헤밍웨이상을 받았고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에는 2019년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줄거리
아일린은 겨울이면 눈이 일 미터는 쌓이는 추운 소도시에서 살고 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언니는 집을 나가 연락도 하지 않는, 얼굴을 맞대는 가족이라고는 알콜 중독에다 망상에 시달리는 아버지 뿐이다. 그러나 아버지와도 대화는 커녕 인사조차 잘 하지 않는다. 아일린은 몇년이나 집에서 벗어나기를 꿈꾸지만 아직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소년 교도소에서 사무직으로 일하고 함께 일하는 잘생긴 경비원 랜디에게 성도착적인 생각을 남몰래 품고 있기도 하다. 아일린은 24살이 될 때까지 평생 단 한번도 친구조차 없었다. 그런 아일린의 삶에 갑자기 리베카라는 매력적이고 생기 넘치는 존재가 나타난다. 아일린은 자신도 모르게 리베카의 마음을 사기 위해 자신을 가장하고 리베카와 리베카와의 관계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러다 리베카가 아일린을 집으로 초대한 크리스마스 이브날 밤, 아일린의 삶을 급작스럽게 바꿀 사건이 생긴다.
바뀔 수 있을까
도무지 호감가는 구석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여자가 있다. 여자는 타인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는다. 끔찍한 성격을 가졌거나 아주 못생기지도 않았다. 여자는 행패를 부리고 사기를 치고 사람을 죽이고 동물들을 학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여자는 도무지 좋은 구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친구조차 없다. 여자는 불행하고, 불쾌하고, 불안하고, 이런 사람이 변화할 수 있을까? 새로운 자신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아일린은 불행하다. 아일린은 억압적인 환경에 어린 시절부터 방치되어 왔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는 아주 어릴 때 이후로 다정하게 포옹 한번 해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알콜 중독이었고 그것은 경찰이었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아일린의 언니 조우니는 겨울의 온기만큼이나 아무 존재감이 없고 아버지가 아일린에게 건네는 말이라곤 술을 사오라는 요구나 아일린의 내면을 할퀴어대는 폭언 뿐이다. 아일린은 자신을 노리는 위협 세력이 있다는 아버지의 병적 망상을 받아주고 술 심부름을 하며 눌려지낸다. 아버지와 아일린 단둘이 남은 폐허에 가까운 집에서 그의 엄마 노릇까지 하며 시중을 들고 있지만 아버지를 비롯한 누구도 아일린을 알아주지 않는다. 아일린은 철저하게 혼자다.
이렇게 불쾌한데
아일린은 불쾌하다. 아일린은 자기혐오로 가득 차 있고, 성적으로 억압되어 있으면서도 성적 도착을 보이고, 잘 씻지도 않고, 친구도 없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옷장에서만 옷을 꺼내입는다. 아일린은 교도소의 어린 소년들이 학대에 가까운 대접을 받는데도 부당함을 느끼지 못한다. 아일린은 변비약으로 속에 있는 것을 쏟아내는 데서 만족감을 느끼고 도벽이 있으며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멋대로 상상한다. 아일린은 소년 교도소에서 함께 비서로 일하는 두 여자가 에로틱한 관계라고 혼자 상상하며 불쾌해하면서도 호감을 품고 있는 경비원 랜디의 사타구니를 집착적으로 쳐다본다.
그 뿐만 아니라 랜디의 집앞에 차를 주차해놓고 그의 집을 계속해서 관찰하는 스토킹까지 일삼는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아버지의 병적 망상과 아일린이 일상적으로 외부세계와 자신의 내면 사이에 끼워넣은 터무니없는 상상은 바깥으로 표출되어 실제 사람에게 해를 입히느냐 입히지 않느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아일린은 그런 상상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다. 아일린의 세계에는 아일린 뿐이다. 랜디조차 그저 마음을 쏟을 대상이 하나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일린은 타인의 삶을 끊임없이 바라보지만, 그들에게 아무 관심도 없다.
이렇게 불안한데
아일린은 불안하다. 아일린은 이미 24살이지만,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정확히는 성인 여자가 되고 싶지 않다. 자신이 성적으로 성숙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그 때문에 아일린은 거의 먹지 않는다. 뼈밖에 남지 않은 외양이라면 어른이 되는 것을, 어른으로 보이는 것을 늦출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일린은 타인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자꾸 생각한다. 아일린은 잘 씻지 않으면서도 자신에게서 냄새가 날까 극도로 불안해하며 구강청결제를 마시기까지 한다. 아일린은 알콜 중독의 폐해를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술을 마시고 자신의 외모가 괴물 같다고 생각한다. 아일린은 스스로에게 가혹하며 마음을 둘 곳이 하나도 없다. 그나마 상상에 가까운 랜디를 향한 짝사랑이 없었다면 진작에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을지도 모른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변화한다
그러나 이토록 구렁텅이에 빠져있던 아일린은 확실한 순간을 포착하자 놀랍게도 먹이를 발견한 사냥감처럼 불꽃을 튀기며 달려든다. 아일린은 리베카가 뜻하지 않게 열어버린 기회를 본다. 교도소에 수감된 소년 리가 줄곧 학대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리베카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계획한 어설픈 사적 처벌에 말려든 아일린은 가지고 있던 총을 활용해 학대를 방관했던 소년의 어머니가 진실을 털어놓게 만들고, 그가 흥분해서 날뛰다 총에 맞자 수면제로 그를 재우고, 이제 입막음을 위해 그를 술에 취해 집에서 뻗어있을 아버지가 실수로 죽인 것처럼 꾸미자고 벌벌 떨고만 있는 리베카에게 말한다. 자신이 벌여 놓은 일 앞에서 겁에 질려 꽁무니를 빼는 리베카와는 달리 아일린은 피치 못하게 말려든 일에서 활로를 찾는다. 아일린은 아버지에게 살인 누명을 씌우는 대신 리의 어머니를 자동차에 버려두고 그 길로 떠나버린다. 아버지를, 집을, 과거의 자신을 떠난다.
불과 몇시간 전까지 리베카의 우정을 숭배하듯 갈망하며 리베카의 일거수일투족에 감동하고 리베카에게 잘 보이려고 사력을 다 하던 아일린은 리베카가 자신과 함께 떠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다. 리의 어머니가 수면제에서 깨어나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고 아버지가 아일린을 추적할 수도 있고 결국 뉴욕에서 비명횡사할지도 모르는 불확실함 앞에서도 아일린은 바깥으로 걸음을 뗐다. 살고 있던 도시를 떠나기까지의 아일린은 번데기일 뿐이다. 아일린은 묵은 허물을 벗고 새로운 삶과 자신에게로 돌진한다. 과거를 회상하는 노년의 아일린은 불행하지도, 불쾌하지도, 불안하지도 않다. 부글부글 끓던 아일린은 이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