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리빈 작가의 <묘진전>은 동양 판타지물을 한국적인 이야기로 정의할 때,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이다. 볼펜선이 두드러졌던 아마추어 연재 시절과는 달리 수묵화의 단정하면서도 강렬한 느낌을 디지털 작업으로 탁월하게 옮겨온 프로 데뷔 후의 작풍은 작품의 시적인 분위기와 어우러져 또다른 여운을 깊이 자아낸다. <묘진전>은 2013년부터 2015년까지 다음 웹툰에서 연재되어 완결되었다.
줄거리
하늘에서 신으로 살다 떨어진 묘진은 덕업을 쌓으면 다시 하늘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에만 신경을 쓰며 살생을 하지 않으려 애쓴다. 덕업을 쌓기 위해 눈을 훔친 각시손님의 아기를 아들 삼아 키우기도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묘진은 최근 들어 약해진 신통력을 보충하기 위해 산주인들이 신내림 처녀를 잡아먹는 산행에 참가한다. 한편 어둠님을 닮은 아이라며 수군댈만큼 성미가 고약한 진홍은 노비인 달래를 부모와 생이별시키고 온갖 핑계로 괴롭힌다. 달래의 얼굴에 흉측한 비늘이 돋게 만들고, 이름도 막만이라 바꿔버린다. 도망치다 잡혀와 죽도록 맞은 막만은 살기 위해 다시 달아나지만 신내림 처녀를 잡으러 온 묘진에게 붙들린다. 죽기 직전 막만은 묘진에게 저주를 걸고, 그를 풀기 위해 떠돌던 묘진 앞에 되살아난 막만이 나타나 복수를 도울 것을 요구한다. 둘은 막만의 복수를 위해 길을 떠나지만 복수도 수월하지 않다.
왜 하필 나야?
되살아나기 전 달래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다. 악독한 아씨인 진홍으로 인해 달래의 삶은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을 정도로 바닥에 떨어져 있다. 비록 노비의 신분이기는 하나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다정한 부모와 강제로 헤어졌고, 그 뒤 재미삼아 자신을 괴롭히는 진홍의 말도 안 되는 갖은 요구와 폭력을 감당해야 했다. 그뿐이랴, 여자인 진홍을 대신해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데려온 양자가 달래를 보는 시선을 진홍이 눈치챈 날 진홍에게서 태어난 기이한 존재로 인해 하루 아침에 얼굴에 비늘이 돋고 달래라는 이름마저 빼앗긴다.
일찍이 진홍이 가로챈 가족에 대한 유일한 끈인 댕기가 내팽개쳐져 있는 것을 본 막만이 마침내 자유를 얻고자 뛰쳐나가지만 막만은 도로 잡혀와 죽을 지경까지 뭇매를 맞는다. 그러고도 막만은 살고자 하는 의지 하나로 몸을 일으켜 어딘가 살 곳을 찾아 걸어간다. 그러니 채 얼마 가지도 못해 산주인들의 먹이로 잡혀온 것을 안 막만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심지어 자신을 잡아가는 불길이 포근하다고까지 느꼈던 막만은 배신감마저 차올랐을 것이다. 산주인들도 또한 살기 위해 신내림 처녀를 잡아먹는 것 뿐이라고 해도 막만에게는 하필 왜 자신이 이번 신내림 처녀인지 분노만 가득할 뿐이다. 그토록 살고자 했던 열망과 원한을 모두 바쳐 막만은 순간이지만 포근함을 느꼈던 푸른 불길의 주인, 자신을 잡아온 당사자인 묘진에게 풀 수 없는 저주를 내린다. 묘진 또한 막만처럼 왜 하필 자신이 저주를 혼자 들썼는지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막만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막만은 이미 죽어 잡아먹혔다.
사람답게
살고 싶었는데
되살아난 후 막만의 삶 또한 거듭되는 고난의 산이다. 거칠 것이 없이 진홍을 사로잡아 그저 내리찌르기만 하면 되는 순간에도 막만은 진홍처럼 흔쾌히 사람을 죽일 수가 없다. 막만은 무정하기로는 이를 데 없고 목숨을 앗는 것이라면 이골이 난 묘진이 보다 못해 팔을 잡고 진홍을 찌르는 것을 거드는데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뛰쳐나오고 만다. 막만은 가장 수월하리라 생각했던, 가장 사무쳤다고 생각했던 첫번째 복수에 실패한다. 막만의 살고자 했던 마음은 하늘에서 떨어진 신인 묘진의 신통력을 일거에 막아버릴 만큼 독했지만 망설임 없이 원수를 단칼에 죽일 수 있을 만큼 악하지 못했다. 막만은 자신을 되살려준 힘이 복수를 멈추는 순간 자신의 몸을 도로 부숴내릴까 두렵다. 원수들을 생각하면 증오스럽고, 원수들을 살해하는 일은 역겹다. 막만은 살려고 애썼던 만큼, 원수들을 모두 살해하고 살아남고 싶은 마음과 싸운다. 증오심과도 싸운다. 역겨움을 느끼며 그 마음과 싸우는 것은 인간다운 마음을 잃지 않으려는 선의 의지이고, 그것은 어둠님에게 이름을 빼앗긴 달래였던 사람이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구원해달라 부르짖었던 부처가 아니라 어둠님이 찾아오고, 자신의 손이 쩍쩍 금이 가 부서져 내리기 시작하자 절망에 빠진 막만은 산주인들에게 차례차례 복수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다. 막만의 마음 속에 어딘가 선함이 늘어붙어 단순히 살기 위함이라는 막만의 읊조림의 어딘가를 잡아당기는 것만 같다. 원념과 살고자 하는 욕망에 힘입어 산주인들에게 복수하며 내달리던 막만의 질주는 어린 산주인 사리애기를 죽인 자신에 대한 증오로 요물이 된 바위를 마주하여 전환점을 맞는다. 바위를 밟아 죽이려는 순간 막만을 말리려 뒤쫓던 묘진이 따라잡은 것이다. 자신을 괴물이라 부르며 저주하는 바위를 두고 막만은 애초에 사람답게 살고 싶어 진홍의 집 앞에서 도망쳤던 자신을 떠올린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너무도 많이 저질렀다는 생각에 이르자 막만은 “죄책감이나 후회가 다 뭔가 싶었다”.
덧없음을 느끼고 묘진에게 건 저주를 풀려다 그것을 막는 원혼들의 눈빛을 본 막만은 그 눈빛이 자신이 죽인 산주인들과, 자신을 괴물이라 부르는 바위와, 무엇보다 묘진에게 저주를 걸며 죽어가던 날의 스스로의 눈빛과 똑같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인간다움
곧이어 막만을 덮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대상에 대한 가여움이다. “원수의 곁에 스스로를 묶어두고 있는 원혼들도 이렇게 많은 원망을 짊어지고 살고 있는 묘진도 하찮은 요물이 되어버린 바위도 제 손에 죽은 산주인들도.” 막만은 생각한다. “가여워라” 막만의 살고자 하는 마음도, 기껏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친 자신을 순간 삼켜버린 산주인들에 대한 복수심도 가여움 앞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그 뒤 원혼들을 달래기 위해 굿을 하고, 살아보겠다고 싸우는 아기 끝둥이를 위해 마지막 남은 진홍과 진홍의 악귀에 대한 복수를 포기하는 것도 끝둥이에 대한 가여움 때문이다. 그래 살아보라는, 살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가여움은 접어둔 긍휼함이다. 막만의 긍휼함은 진홍의 악의가 뒤집어놓지 못한 달래의 인간다움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하여 막만이 끝둥이를 살리고자 한 그 순간, 별러온 복수가 아니라 갓 태어난 생명에 대한 가여움을 택한 그 순간 막만은 원수가 뒤집어 씌워놓은 막만이 아니라 본래의 달래가 된다. 금빛 꽃잎이 되어 모든 중생을 돌보는 바람이 된다. 달래의 사람다움은 달래를 사람을 넘어, 묘진이 그리던 하늘조차 넘어 신으로 좌정하게 한다. 중생을 돌보는 태양 같은 신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