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밍 레슨>의 작가 클레어 풀러는 영국 옥스퍼드셔주 출신으로 윈체스터미술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40세가 되어서야 소설을 쓰기 시작한 작가는 윈체스터대학에서 창작과 비평으로 석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첫 소설 <Our Endless Numbered Days>가 데스몬드 엘리엇 상과 2016년 로열 아카데미 & 핀 드롭 단편소설 상을 탄 데 이어, 2017년 작 <스위밍 레슨>은 2018 왕립문학회 앙코르 상을 수상했다. 그 뒤 <비터 오렌지>를 출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스위밍 레슨>은 클레어 풀러의 두 번째 소설로, 한국에는 도서출판 잔에서 2019년 출간되었다.
줄거리
유명 작가 길 콜먼의 딸인 플로라는 11년 전 사라진 길의 아내이자 플로라의 엄마인 잉그리드를 길이 보았다는 언니 낸의 전화를 받는다. 플로라는 곧장 길과 낸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향한다. 한편 길은 온 집안을 채우고 있는 헌책들 사이에서 잉그리드가 사라지기 전에 남긴 편지를 발견한다. 잉그리드의 편지를 찾으려고 길은 헌책들을 샅샅이 뒤져댄다. 잉그리드의 편지는 초반에 적은 것은 길에게 가족의 품으로,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라고 차분한 어조로 말하고 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길의 만행을 담담한 어투로 서술하며 이미 돌이킬 수 없도록 치달은 결혼 생활을 드러내고 있다. 잉그리드의 편지가 계속될수록 길의 잘못들은 양파 껍질 까듯 끝없이 이어지고 길의 책, 쾌락의 남자에 적힌 헌사를 잉그리드가 발견하면서 사태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빼앗긴 사람
아내를 착취하는 남자,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우는 남자,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는 남자, 아내의 재능을 꺾어버리는 것만으로 모자라 그 재능을 갈취하는 남자, 흔한 이야기다. 어디서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을 만큼 흔한 이야기이고, 그렇기에 슬프고 분통터지는 이야기다. 잉그리드는 이 흔한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피해자이자, 착취당하는 사람, 재능을 빼앗긴 사람이다.
잉그리드가 남편 길을 만난 곳은 대학이다. 길의 파렴치함은 당시 두 사람의 신분에서부터 드러난다. 교수인 길이 자신의 수업을 듣는 학생인 잉그리드에게 먼저 접근한 것이다. 교수와 학생이라는 위계의 차이로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부터 평등하고 동등하지 않았음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정작 당사자인 잉그리드는 그 사실을 주목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늘 그렇듯 표적이 되는 피해자는 치밀하게 접근하는 가해자가 철저히 현혹시키기 때문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상급자에게 계획적인 구애를 받는 수많은 여자들처럼, 길이 꼬여낼 때의 잉그리드처럼 말이다. 그것을 구애라고 부르는 것조차 구애라는 단어에게 모욕적인 일이겠지만.
길과 여름을 보내고 임신한 잉그리드가 대학을 떠나게 되는 것은 길이 잉그리드에게 수작을 거는 것보다도 분노가 일고 안타까움이 더한 일이다. 잉그리드에게는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앞으로의 삶의 포부가 있었고 친구와 함께 꾸려나갈 젊은 여자의 큰 꿈이 있었다. 그러나 길은 잉그리드의 앞날을 빼앗는다. 잉그리드에게 청혼하며 아이를 낳고 자신과 결혼하는 것이 잉그리드에게 더 행복한 일이라고 속삭인다. 길은 설령 그렇게까지는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잉그리드의 삶을 구렁텅이에 처박으면서 그곳이 구렁텅이가 아니라 천국의 정원인 양 잉그리드의 시야를 흐린다. 잉그리드는 이미 길에게 빠져 올바른 사리판단을 하지 못한다.
임신과 결혼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전개에서 제정신인 사람은 잉그리드의 친구 루이즈 뿐인 것처럼 보인다. 임신 중단을 거듭 권하면서 루이즈는 우리의 엄마들처럼 살지 않기로 하지 않았냐고 잉그리드를 설득한다. 잉그리드는 아주 막연히, 실감조차 하지 못한 채로, 길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 것이 이 상황을 정리할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이라고 믿으려 한다. 길은 허울 좋은 말을 늘어놓으며 잉그리드를 안심시키지만 별다른 대책은 없다.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행동임에 분명하건만 잉그리드는 눈치채지 못한다.
빼앗기고 빼앗겨서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잉그리드가 무언가 이상함을 깨닫는 것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이다. 길은 무심해졌고 뻣뻣해졌으며 잉그리드에게 살갑기는 커녕 무뚝뚝한 태도를 보인다. 작업실에는 방해된다는 이유로 잉그리드의 출입을 금하고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사람이 된다. 잉그리드는 전부 납득할 수는 없어도 길을 이해하려 애쓴다. 자신이 노력하고 더 잘하면 길의 마음의 누그러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잉그리드는 방치되고 외로워지지만 그것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것은 전부를 버리고 택한 길이 아니다. 길이 성가셔하고 반기지 않았던 손님들이 오히려 잉그리드에게 위안이 된다. 그들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잉그리드는 길에게서 얻었어야 할 안정감과 애정을 그들에게서 간신히 얻는다. 잉그리드는 고립되고 내면으로 쪼그라들기 시작한다.
길의 히트작 <쾌락의 남자>가 발간된 즈음 잉그리드의 고통은 분명한 실체를 드러낸다. 자신의 접근을 막았던 작업실은 사실 길이 다른 여자를 끌어들여 부정을 저지르기 위함이었고 길과 사랑을 나눌 때마다 길의 질문에 대답하며 잉그리드가 풀어놓은 이야기들은 아무런 언급도 없이 길의 새 소설에 모조리 들어가 있었다. 마치 그 발상과 문장이 전부 길의 머리에서 나온 것처럼. 잉그리드의 말이, 글이 흔적도 없이 길의 것이 되어있던 것이다. 심지어 책의 헌사는 잉그리드가 아니라 엉뚱한 사람에게 바쳐져 있었고, 그 사람이 다름아닌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 루이즈라는 것을 안 잉그리드는 길의 부정을 알았을 때보다, 길의 숨겨둔 자식의 존재를 알았을 때보다, 길이 자신의 재능을 훔쳐다 제것처럼 써댔음을 알았을 때보다 더한 끔찍함을 느낀다. 잉그리드에게는 아무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수많은 잉그리드
잉그리드는 됨됨이가 모자란 배우자를 만났을 때 겪는 일을 거의 전부 겪은 흔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세상에는 많은 잉그리드가 있고 그들은 무력한 피해자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잉그리드도 그 점에 있어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잉그리드는 마냥 묵묵히 감내하기를 선택하지 않은 사람이다. 이제껏 꿈꿔왔던 모든 것을 내동댕이치고 길과의 결혼에 인생을 바친 것처럼 이제껏 속고 빼앗기며 기만당한 시간과 세월을 전부 버리고 떠나기로 결정한 사람이다.
결말은 잉그리드가 정말로 익사했는지 마지막 페이지의 지푸라기색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가 잉그리드인지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잉그리드가 마지막 수영을 한 뒤 세상 속으로 떠나갔다고 믿는다. 캄캄한 바다로 잠겨들어 자신조차 버리는 것이 아니라, 졸렬한 남자에게 운 나쁘게 붙들려 고통스럽게 허비한 시간만을 버리고 그에게 빼앗기지 않은 자신을 찾아 떠났다고 믿는다. 큰 세상으로 나가고자 했던, 길을 만나기 전의 잉그리드가 세월을 건너 다시 돌아와 살아나갔을 것이라고, 믿는다. 많은 여자들이 벼르고 벼르는 것처럼 성큼성큼 떠나 삶을 찾았을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