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약만가 : 서리꽃>은 <작약만가>의 서장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작약만가>의 태후인 리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데뷔작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빼어난 연출, 섬세하고 아름다운 작화,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치밀한 전개, 진행에 있어 자칫 너무 전형적이 되거나 적나라하게 치닫지 않도록 균형을 잃지 않는 감각까지 두루 갖춘 작가 인토르노는 이미 완성형 작가다. <작약만가 : 서리꽃>은 2016년 다음 웹툰에서 연재, 완결되었으며 현재는 <작약만가 : 서리꽃> 이전의 이야기인 <작약만가 : 불환곡>이 역시 다음 웹툰에서 연재 중이다.
줄거리
명망있는 권세가의 외동딸인 리는 결혼을 앞두고 별안간 들이닥친 황제에게 지명되어 입궁한다. 황제, 태후, 황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처첩 삼미랑 사이에서 궁중의 피비린내 나는 알력 다툼에 익숙지 않은 리는 가만히 숨만 쉬는 것조차 녹록지 않다. 거듭되는 굴욕과 폭행의 나날 속에서 리는 나름대로 살 방도를 강구해보지만 이미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 된 황가의 사람들을 상대로 적어도 사람으로서 남고 싶은 리가 택하는 방책은 연약하고 하잘 것 없을 따름이다. 황제의 횡포로 집안은 내려앉고 어머니는 살해당하고 아버지는 정신을 놓아버린데다 자신은 임신한 몸으로 배까지 찢기게 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리는 이를 악물고 그들처럼 괴물이 되기로 마음먹는다. 해산한 리는 황제에게 학대당한 시종들과 의기투합하여 황제를 태워죽이고 수렴청정의 이름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황후 자리에 오른다.
괴물이 되지 않으면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격언이 있다. 니체의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으면 그대로 괴물에게 잡아먹히고 마는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괴물이 되지 않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괴물이 되어 맞서는 것이 나와 나의 가족들과 나와 가깝게 혹은 멀게 인연이 있는 이들, 언젠가 괴물에게 잡아먹히고 말 여타 다른 사람들의 유일한 가능성이라면? 더 많은 사람들의 안위가 걸릴 수록 그깟 괴물이 되는 것은 더 합당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시, 단순히 나 자신의 안위만이 걸렸다면? 똑같은 존재가 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고결함을 지키는 것이 옳은가? 괴물이 되지 않는 것은 나의 삶, 나의 목숨, 나의 살고 싶다는 열망보다 중요한가?
갓 입궁한 리는 평화롭게 자란 귀족의 여식으로 순진한 양과 다를 바가 없다. 유일하게 작위를 받고 입궁한 자신에게 다른 처첩들이 예를 갖추지 않자 당황하고 빈이라는 위치에서 칭호도 없는 노기 출신 삼미랑에게 입 한번 벙긋하지 못하며 황제와 삼미랑이 합심한 괴롭힘에 미약하게도 반항하지 못한다. 어설프게 반항하면 삽시간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도 리가 갖은 수모를 잠자코 받아내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입궁 초기의 리는 그보다 더욱 겁에 질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는 무구했을 뿐, 심약하거나 멍청한 것이 아니었다. 리는 황가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를 파악하자마자 짓밟히지 않기 위해 행동을 개시한다.
사람으로
남고 싶었으나
애초 리의 아버지인 태중을 몰락시키기 위해 리를 입궁시킨 황제와, 유일하게 오랫동안 총애받은 자신을 제치고 시작부터 빈의 자리를 꿰어찬 리가 눈엣가시 같은 삼미랑은 그렇잖아도 악랄한 성미를 리에게 더욱 퍼붓는다. 태후는 나서서 리를 적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부러 목소리를 내어 리를 편들지도 않는다. 황제의 이복동생이자 호위대부인 소거도 방관하기로는 태후못지 않게 무심한 태도를 취한다. 빽빽한 구중궁궐에 리의 편은 아무도 없다. 리는 호의 대신 계약을, 충정 대신 손익을 패로 삼기로 결정한다. 겉으로는 잔뜩 겁을 먹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나약한 사람처럼 행동하고, 삼미랑과 황제의 횡포로 유산할 위기에 처한 것을 이용해 리는 태후를 설득하여 리를 태후궁에 머물며 그의 보호 아래 들어가고, 소거의 죄책감과 호감을 부추겨 그를 자신의 편으로 돌린다. 자신이 황실이라는 괴물들의 소굴에 떨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 리는 숨 한번 허투루 뱉지 않는다. 아직 사람이기에 살 길을 강구한다.
그러나 괴물이 괴물인 까닭은 적당히를 모르기 때문이다. 리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안 황제는 리를 유산시키는 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패악을 부리다 급기야 리의 배를 찢으라는 끔찍한 명령을 내린다. 임신한 몸으로 찢겨 죽을 위기를 맞아 내관 어상락이 내민 아기를 바꿔치기하자는 제안 앞에서 리는 괴로워한다. 그 제안이 애초 염두에 두었던 적이 있기는 하나 반드시 누군가가 희생될 것이기에 버렸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계획을 버린 건, 다른 이의 목숨을 그런 식으로 잡아먹으며 살아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리는 비명을 내지른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사람으로서 남고 싶었기 때문에…!” 라고.
그렇게 괴물과 싸우던 리는 끝내 괴물이 되기로 한다.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잡아먹고 누군가가 희생되어도 가장 효과적인 방책을 택하는 괴물이. 괴물이 된 뒤의 리의 행보는 거침이 없다. 자신이 아니라 삼미랑이 아기를 바꿔치기 했다며 모든 것을 삼미랑에게 덮어씌우고 죄가 없는 두 아기가 허망하게 죽게 되어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황제를 꼬여내기 위해 욕심을 가장하고, 치밀하게 기회를 만들어 한 점 망설임도 없이 단숨에 불태워버린다. 불타 죽은 황제의 시체에 삼미랑을 묶어두고, 태후까지 손아귀에 틀어쥐고 황후 임명을 받는다. 일련의 복수를 해치우는 리는 시종일관 비장하고 서늘하다. 복수에 따르는 쾌감을 즐기는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이 그저 커다란 결심과, 지독한 냉정함만이 남았다.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차근차근 계획한 대로 황가를 장악해가는 리는 분명 괴물이지만 황제나 삼미랑과 같은 방자함이 없다. 아마도 그것은 리가 괴물이 된 뒤에도 가장 나쁜 것이, 모든 사태의 궁극적인 원흉이 어디인지를 잊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리에게 죄를 지었다며 황가에서 존재도 모르던 리를 빈으로 추천한 것이 자신이었다 스스로를 탓하는 소거에서 리가 했던 말처럼, 사태를 그 끔찍한 지경으로 몰아간 가장 큰 원인은 황제라는 것을 내내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간악한 삼미랑도, 음흉한 태후도, 결국 그들과 같은 괴물이 된 리나 애꿎은 사람을 사지로 끌고 온 소거도 황제의 횡포가 아니었다면, 그런 황가가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잔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만을 믿고 나라나 백성은 물론 주변의 모든 것을 제멋대로 휘두르며 악행을 일삼은 황제야말로 리를 죽이려던 삼미랑이, 모두를 견제하고 자기 패만 늘릴 궁리를 하던 태후가, 납작 엎드려 어머니의 생사만을 염두에 둔 소거가, 매일같은 구타와 가문의 패망까지 감내해야 했던 리가 죽여야 할 괴물이었다. 리는 그것을 알았다.
괴물에 맞서기 위해 리는 괴물이 되었다. 어쩌면 앞으로 황제의 폭정에 갈려나갈 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서 괴물이 되기로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장 자신의 목숨 하나를 위해 괴물이 되었다고 해도 리를 비난할 수 있는가. 폭압을 죽여 불태우고 그저 살아남기로 한 여자에게, 과연 돌을 던질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