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만든 여자 시즌 2 3. 머물 자리를 찾아서 : 나

생각하다문학여성 주인공

여자가 만든 여자 시즌 2 3. 머물 자리를 찾아서 : 나

꽈리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줌파 라히리에게 이름 외의 다른 수식어가 필요할까. 영국 런던의 뱅골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하여 로드아일랜드에서 성장한 줌파 라히리는 미국의 이민자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작가는 <축복받은 집>으로 오헨리문학상, 펜/헤밍웨이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각종 문학상과 베스트셀러 기록을 휩쓸었다. <내가 있는 곳>은 줌파 라히리가 산문집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책이 입은 옷>에 이어 처음으로 이탈리아어로 쓴 소설로 한국에는 2019년 마음산책에서 출간되었다.

줄거리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는 외롭지만 독립적인 사람이다. ‘나’는 줄곧 살아온 도시를 산책하고, 일을 나가고, 출장을 다니고, 때로 어머니를 방문한다. 그렇게 ‘나’가 지나는 모든 곳에서 이야기는 물방울이 떨어지듯 한 방울 한 방울씩 전개된다. ‘나’는 산책 도중 친구 부부의 말다툼을 목격하기도 하고 자기 이전에 사무실을 쓰던 사람을 생각하기도 하고 갑갑한 출장지에서 단비 같은 사람과 마주쳐 마음 속으로 기대기도 한다. 어머니를 찾아가서는 살아온 만큼 벌어진 어머니와의 거리와 아직 풀리지 못한 앙금을 삼키기도 한다. 죽은 아버지가 자꾸 생각나 거듭 심란해하기도 한다. 아버지는 죽은 지 오래지만 ‘나’는 살아 생전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말했던 다 낭비라는 말을 떨칠 수 없다. 마침내 살던 도시를 떠나기로 한 ‘나’는 다시 머물던 곳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곳에 도착했다 그곳으로 다시 도착하는 듯 붕 뜬 불안한 속내를 내비친다. ‘나’는 묻는다. 어딘가 머물 어떤 곳이 있을지를.

도착, 다시 출발

내내 있었던 자리에 머문 적이 없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어딘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도착했을 뿐이며, 이곳은 스쳐 지나가는 곳으로 다시 떠나기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느낀 적이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평생 어딘가를, 누군가를 기다리고 머물 어딘가, 스쳐 지나지 않아도 될 누군가를 찾아다닌다. 자신이 그런 곳을 바라고 있는 줄도 모르는 채로. 때때로 그런 이들은 의문을 갖는다. 도대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여전히 머물지 않고 발끝만 세상에 디딘 채로 살아가면서 말이다. 마치 ‘나’처럼.

‘나’는 끝없이 이동한다. 보도로, 길로, 사무실로, 식당으로, 집으로, 다시 길로, 바다로, 카페로, 시골로, 엄마의 집으로, 문구점으로, 다시 길로, 다시 집으로. 또, 봄으로, 햇살 좋은 날로, 8월로, 새벽으로, 겨울로 이동한다. 다른 모든 이들이 그렇듯 자리를 옮긴다. 장소와 시간을 ‘나’는 흔들흔들 지난다. ‘나’는 방황한다. ‘나’도 알고 있다. ‘나’는 살고 있는 동네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곳에서 머무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나’가 느끼기에 자신은 길을 잃었고, 뿌리 뽑혔고, 방황하고 있거나 표류하고 있다. ‘나’는 불안하다. 바깥으로는 이런 붕 뜬 듯한 두려움을 내비치지 않으면서 ‘나’는 담담하게 하루하루를, 이곳저곳을 지나보낸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나’는 사람이 많은 곳을 불편해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려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나’는 “친절한 누군가의 그늘”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을 안다. 많은 곳을 지나며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그들 중 아무와도 ‘나’는 삶을 함께 살아가지는 않는다. 단순히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삶에 긴밀하게 연결된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일생을 함께했을지도 모르는 사람과는 가끔 산책길에 마주쳐 이야기할 뿐이고, 애인에게도 ‘나’는 마음의 큰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나’가 가장 많이 곱씹는 것은 이미 죽은지 오래인 아버지이다. ‘나’의 아버지는 시간도 돈도 퍽하면 ‘낭비’라는 말을 버릇처럼 했다. 그런 아버지가 유일하게 열정을 쏟았던 것이 공연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아버지는 ‘나’와 처음으로 공연나들이를 가기로 한 날 병을 앓다 죽고 만다. ‘나’는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살아오던 도시를 떠나기 전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아빠는 ‘아빠만의 그 자리에 있는 걸 소중히 여겼다’고 생각한다. ‘나’가 지금처럼 자신의 자리를 좀체 찾지 못하거나, 혹은 좀체 찾으려 들지 않는 것은 어쩌면 공연장의 객석에서 자기 자리만을 안중에 두었던 아버지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혼자서도 충분해

그러나 지금의 ‘나’가 전적으로 아버지의 영향 아래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버지를 불쑥불쑥 떠올리고, 어머니와도 거리감을 느끼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독립적인 삶을 일구고 있다. 나의 이동은 덕분에 자유롭고, 가벼우며, 갈팡질팡함에도 무리가 없다. ‘나’는 홀로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지독하게 고립되어 있거나 외톨이는 아니기 때문에 불안하지만 위태롭지 않다. ‘나’가 표류할 수 있는 것은 ‘나’가 혼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외로워하고, 모처럼 만난 친구를 그의 남편 때문에 마음껏 반기지 못하고, 유쾌하지 않은 자리에 참석하고, 어머니와의 거리에 씁쓸해한다. ‘나’는 홀로 있다는 것의 병폐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삶에 다른 누군가를 일부러 들여 놓으려 하지 않는다. ‘나’는 혼자서 길을 잃는 것으로 충분하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동시에, ‘나’가 혼자서도 쓰러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나’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길을 잃고, 방황하고, 혼란스러워하며 때로 어긋나지만 묶여 있지 않기에 다시 떠오를 수 있다. 그런 헤맴 끝에 스쳐지나지 않고 머물 어떤 곳을 찾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나’가 그곳을 궁금해한다는 것이다. 어디로 흘러가든, 어떻게 흔들리든 무관심하게 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어디를 지났는지 여기가 그곳인지, 저기에 닿으면 어떨지 세심하게는 아니어도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나’는 당황했으되 황망한 것은 아니며 허둥지둥 어지러울지언정 눈이 핑핑 돌고 있지는 않다. ‘나’는 뿌리 뽑힌 느낌에 불안해하지만 ‘나’는 어쩌면 공중에서 자라는 뿌리를 가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따라서 ‘나’가 “스쳐지나지 않고 머물 어떤 곳”을 찾을지 그곳에 도착할지는 큰 문제가 아니다. ‘나’에게는 다시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또다시 도착하는 것이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다. ‘나’에게 불안은 자연스럽고 방황은 태연할만큼 익숙하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세상을 표류했고 또 오랫동안 어긋난 채 헤맬테지만 ‘나’는 그런 삶을 초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나’의 자리는 뿌리 내릴 땅이 아니라 그간 누벼온 공중에, 스치듯 지나온 모든 궤적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곳에 머물며 모든 곳에 도착하고, 계속해서 흔들흔들 지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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