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줍는 시 21. 마음 속 울음을 바깥 세상의 호흡으로

생각하다독서취미

다시 줍는 시 21. 마음 속 울음을 바깥 세상의 호흡으로

신나리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이제니의 두 번째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에는 8편으로 이루어진 <나선의 감각> 연작시가 실려 있다. 이제니의 시를 가장 잘 읽는 방법은, 그의 장편시들을 소리 내어 읽으며 느껴보는 것이다. 내가 앞장서서 연작시를 차례로 소개할테니, 당신이 시집을 쥐고 이제니의 나선의 감각을 목소리로 그려 주기를 바란다.

아이들은 노란 수수를 쥐고 있다. 금붕어/는 초록 수초를 먹고 있다.(21p)
꼬리는 붉고 검고 짧았다. 울적한 얼굴이/하나 있었다. 얼굴이 하나. 얼굴이 하나 있었다.(21p)

첫 번째 시(검은 양이 있다)에서 시인은 자신의 마음 속 세계에 사는 검은 양을 한 마리 발견한다. 시인의 마음 속 세계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시인은 마음 속 세계를 쓰고 지우는 가운데 검은 양을 한 마리 본다. 검은 양이 가진 울적한 얼굴은 시인의 얼굴로 읽힌다.

하나의 죽음을 갖기 위/해 사십 년의 생이 필요했다. 이 생을 좀더 정성껏/ 망치기 위해 나는 몇 마리의 개를 기르고 몇 개의/무덤을 간직하였으며 몇 개의 털뭉치를 버렸다.(22p)
잿빛에서 잿빛까지/잿빛을 향해 나아가는 잿빛으로(23p)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두 번째 시(잿빛에서 잿빛까지)에서 시인은 죽음을 이야기한다. 아무런 희망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시인은 그저 견딘다. 몇 개의 죽음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이름들을 기록하면서 시인은 시간을 보낸다. 두 번째 작품에는 “잿빛에서 잿빛까지/잿빛을 향해 나아가는 잿빛으로”라는 시구절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작품이 진행될수록 시가 가진 어둠이 깊어진다. 깊은 밀도의 어둠 속에서 시인은 드디어 두려움을 보기 시작한다. 시인은 잿빛을 향해 울면서 뛰어든다.

보이지 않는 당신을 본다라고 하자 희고 마른 뼈/의 적막을 듣는다고 하자(28p)
계속되는 숨소리가 있다라고 하자 소용돌이치/며 다가가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라고 하자 다시 보/이지 않는 당신을 본다라고 하자(33p)

세 번째 시(물의 호흡을 향해)에서 시인은 어둠에 둘러 싸인 채 빛을 보고 어떤 숨소리를 듣는다. 작품 속 세계는 ‘하자’라는 문장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인이 가장 바라는 것이자 우리에게 권하는 것은 ‘호흡’이다. 시인은 자신이 숨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자신의 울음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울음소리는 뼈로 만든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소리로 은유된다.

빛이 이동한다. 너의 이마 위로 어떤 문장들이 흘/러간다. 찰랑인다. 출렁인다. 넘실거린다. 우리는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는다.(35p)

네 번째 시(빛이 이동한다)에서 시인은 소리를 내기보다 오롯이 침묵하며, 침묵의 시간들 속에서 자신이 종이에 연필로 써낸 것들을 가만히 본다. 시인은 페이지가 넘어가고 자신이 써낸 것들로 자신의 두께가 드러나는 것을 바라본다. 시인이 책장이 넘어가는 것을 볼 때마다 ‘빛이 이동한다’는 문장이 등장한다. 이제 작품 속에 존재를 칭하는 단어는 ‘우리’가 된다. 우리는 함께 침묵하며 우리의 문장들이 흐르는 것을 보게 된다.

끊/이지 않는 노래들처럼. 뒤돌아보지 않는 마음으로. 되/돌아보지 않는 얼굴이 되어. 순간을 잊는 방식으로/순간을 살아가듯.(47p)

다섯 번째 시(목소리의 여행)에서 시인은 솟아오르는 목소리들과 뒤섞이며 자리를 바꾸는 문장들을 느낀다. 이곳에는 나와 네가 사라지고 목소리의 여행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사라지고 우리 안에 존재하는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노래로 흘러나오며 삶을 지속해 나간다. 마치 우리가 마음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 안에 수많은 목소리가 흘러나와 뒤엉키고 진동하고 사라지듯이. 시인은 마음 속의 목소리가 여행하는 것을 가만히 본다. 목소리는 여행하고 시인이 그것을 기록하는 순간 목소리는 사라진다.

공작을 가둔 허술한 철조망 너머로 몇 개/의 돌을 던져 넣는 걸로 어떤 유년은 끝이 난다.(141p)
번쩍이면서 아프게 눈을 찔러 오는/녹청빛 깃털의 보드라움을 부질없이 끌어당기듯이.(142p)

여섯 번째 시(공작의 빛)에서 시인은 꿈과 유년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러한 일을 통하여 시인은 자신의 연약한 내면을 읽어낸다. 중첩된 기억과 꿈속의 꿈 가운데, 공작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어린시절 시인은 공작의 날개 그늘에 얼굴을 파묻고 모든 시간들로부터 도망쳐 그곳에 숨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시인이 만난 공작은 마을을 떠나는 날까지 단 한 번도 날개를 펴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 꿈 속에 공작이 유령처럼 나타난다. 시인은 공작이 사라지는 광경을 보며 자신에게 남은 그리움과 기다림이라는 감정을 확인한다.

세계의 끝이 넘실거리고 있군요. 나뭇가지 사/이로 젖은 책들이 널려 있었다. 반짝이는 햇빛 아래/무수한 책들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144p)

일곱 번째 시(역양)에서 시인은 아름다운 격자의 세계를 보고 있다. 꿈 속을 거닐 때 시인을 통과하는 감정은 슬픔이다. 개가 죽는 일의 슬픔, 찾아갈 작은 무덤 하나가 생겼다는 기쁜 슬픔. 시인은 자신이 보고 있는 세계의 책들이 문자가 아니라 소리와 색깔의 여백으로 가득 차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당신이 이 소리에 귀 기울여주고 이 여백에 눈을 열어 주기를 바란다.

귀를 기울이고 눈을 열어 주기를

<나선의 감각> 연작은 시인이 자신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울적한 얼굴을 한 검은 양 한 마리를 발견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시인은 삶에서 죽음을 경험하고 눈물을 흘리고 이름들을 기록하며 어두움 속에서 생을 보낸다. 삶의 잿빛을 향해 뛰어드는 것만 같은 나날들을 지내고, 시인은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울음소리를 듣는데, 그 울음 안에는 숨소리가 있다. 눈물이 엉겨 있는 소리가 바로 물의 호흡이 된다. 이어 시인은 침묵의 시간들 속에서 자신이 쓴 것들을 바라본다. 우리가 쓴 것들 위로 빛이 이동한다. 이어 시인은 목소리의 여행을 바라본다. 마음 속에 소용돌이치는 수많은 목소리들이 서로 얽히고 진동하고 사라지는 모습을 본다. 어린 시절과 꿈의 세계는 마음 속 수백 개 목소리들의 기원이다. 시인은 당신도 이 소리에 귀 기울여 주기를, 그리고 소리를 활자로 채워 나간 페이지들에 눈을 열어 주기를 바란다.

얼마 전 친구에게 안부를 물었다. 요즘 마음 상태는 어때? 친구가 나를 바라보지 않고 어딘가를 응시한 채 뱉었던 말 한 마디가 내내 가슴에 남았다. “어떤 날은 거울도 보고 싶지 않아.” 나에게도 그러한 날들이 있어서, 친구가 얼마나 힘든지 조금은 가늠할 수 있었다. 내가 나라는 존재와 나의 마음을 사랑할 수 없는 날들,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을 이끌어가기에 나라는 존재가 방해가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들, 나를 바라보고 나의 마음 속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날들, 가능하다면 내가 나와 함께 살고 싶지 않은 날들, 내가 나를 죽이고 나의 마음 속 소리를 묻어버리고 싶은 날들.

이제니는 자신은 몸 속에 떠돌고 있는 소리들을 시로 만드는 데 목적을 두고 있으며, 자신의 시가 입으로 소리 내어 읽히고 소리의 중첩과 리듬의 움직임 그리고 사라짐으로 형상화되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처럼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아주 복잡하게 뒤얽혀 소용돌이치는 목소리를 듣고 옮기는 일은 자신을 사랑해보려는 시도가 아닐까. 만약 거울도 보고 싶지 않은 누군가가 있다면, 이제니의 <나선의 감각>을 소리 내어 읽는 연습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마음 속 울음을 바깥 세상의 호흡으로 만들기 위하여. 당신이 오늘의 낭독을 통하여 뜨거운 존재 증명과 자기의 사랑으로 가닿기를 바란다. 

신나리님의 글은 어땠나요?
1점2점3점4점5점
SERIES

다시 줍는 시

이 크리에이터의 콘텐츠

시에 관한 다른 콘텐츠

독서에 관한 다른 콘텐츠

취미에 관한 다른 콘텐츠

콘텐츠 더 보기

더 보기

타래를 시작하세요

여자가 쓴다. 오직 여자만 쓴다. 오직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플랫폼

타래 시작하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