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서울에서 태어난 최영미 시인은 1992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속초에서」 외 7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는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 『꿈의 페달을 밟고』(1998), 『돼지들에게』(2005), 『도착하지 않은 삶』(2009), 『이미 뜨거운 것들』(2013)이 있다. 최영미는 시집 뿐 아니라 소설과 에세이 여러 편을 발표하였다. 이토록 오랜 시간 뜨거운 창작열로 풍요롭게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확장해 온 최영미는 현재 고은태(고은의 본명)와 그로 상징되는 남성 중심의 문단 권력과 홀로 싸우고 있다. 문인협회와 작가회의 그리고 시인 출신 문체부 장관 도종환의 침묵은, 기존의 남성 중심 문단이 현재까지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괴물
2017년 황해문화 12월호에 최영미는 작품 <괴물>을 발표했다. 작품 <괴물>에는 100권의 시집을 펴냈으며 노털상 후보로 이름이 거론된 인물 EN이, 문단 술자리에서 여성 문인과 여성 출판 편집자를 성추행하는 모습과 그러한 행태를 묵인하는 문단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2018년 1월 29일 서지현 검사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법무부 간부 안태근 검사로부터 성추행을 겪고 인사 불이익까지 당한 사실을 폭로했다. 얼마 뒤 2월 6일 최영미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등단 당시 문단 술자리에서 경험하고 목격한 성희롱과 성추행을 폭로했다. 최영미는 남성 문인의 성적 요구를 거절하면 남성 문인이 문단 권력을 통해 여성 작가에게 보복하는 문화가 존재했음을 고발했다. 인물 EN으로 언급된 고은태는 “후배를 격려한다는 취지였으나 오늘날에 비추어 성희롱으로 규정된다면 뉘우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최영미는 이는 구차한 변명이며, EN은 상습범으로 대한민국 곳곳에 피해자가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이후 3월 최영미는 국가인권위 문화예술계 성폭력특별조사단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4월초에 작품 <괴물>의 모델이 된 원로시인의 실명을 밝히며 자신이 경험하고 목격한 일들을 진술했다. 7월 3일 최영미는 문단 내 남성 중심 권력 문제와 성폭력을 폭로하여 미투 운동을 사회적 의제로 확산하는 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서울시 성 평등 대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에 2월 7일 최영미를 2차 가해한 글을 자신의 SNS에 올렸던 원로시인 이승철은, 7월 최영미의 서울시 성평등상 대상 수상 반대 발표를 여성 문인 36명과 함께 주도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7월 17일 고은태는 자신의 혐의를 증언한 최영미, 박진성 시인에게 각 1000만원을 이를 보도한 언론사와 기자 20명에게 2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민변 소속이며 인권 변호사로 유명한 법무법인 덕수의 김형태 변호사가 고은태의 소송 대리인을 맡아 화제가 되었다.
8월 23일 최영미는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고은의 명예를 훼손한 것은 본인 자신”이라며 고은태의 소송에 적극 대응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최영미는 "이 재판에는 제 개인의 명예만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여성들의 미래가 걸려있으므로, 모든 것을 걸고 싸우겠습니다. 품위를 잃지 않고, 끝까지 평정심을 잃지 않고 싸워서 이기겠습니다. 이 재판은 그의 장례식이 될 것입니다."고 일갈했다.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은 <고은 시인의 성폭력 피해자와 목격자 제보센터>를 개설하고 성폭력 피해자와 목격자를 찾고 있다. 제보센터의 연락처는 02-735-1909, [email protected] 이다.
시인 최영미,
인간 최영미
2017년 겨울 <괴물>을 세상에 발표한 그 순간부터 고은태의 법적 소송에 적극 대응하고 있는 2018년 9월 지금까지 최영미의 미투 운동은 이어져오고 있다. 미투 운동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우리가 작품을 통해 만났던 뚜렷하게 정직하고 시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연대의 손짓을 건네던 시인 최영미가, 실제로 자신이 경험하고 목격한 일들을 고발하고 시대의 미래를 생각하며 약자의 편에 설 줄 아는 인간 최영미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운동에서, 우리는 작품 속에서 만나는 시인과 실제 세계 속의 인간이 너무 달라서 당황하고 절망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최영미는 다르다. 최영미는 시로 생각하고 말하며, 시처럼 생각하고 말하며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시퍼렇게 뛰고 있다고
오늘 소개할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에서 우리는 최영미의 생생하게 살아있는 시인 정신을 만나볼 수 있다. 작품 속 나는 오랜 세월을 버티고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내부를 너에게 까뒤집어 보여주고자 한다. 나는 자기 몸의 이미 썩어버린 부분과 아직 순결한 부분을 모조리 벗어 너에게 보여준다. “창자를 뒤집어 보여줘야 하나/나도 너처럼 썩었다고/적당히 시커멓고 적당히 순결하다고”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험난한 시간들을 지나오며 자신이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세계관을 가질 수밖에 없었음을 이야기하고, 그러나 그러한 시간들을 지나왔음에도 자신의 고유한 순수와 정직은 그대로 살아남아 숨쉬고 있음을 너의 앞에서 증명하고자 한다. “버티어온 세월만큼 마디마디 꼬여 있다고/그러나 심장 한 귀퉁이는 시퍼렇게 뛰고 있다고/동맥에서 흐르는 피만큼은 세상모르게 깨끗하다고”
또한 지금까지의 시간들을 결국은 버텨내고 살아남은 자가 가질 수밖에 없는 슬픔과 그 슬픔으로 인해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대하여 낱낱이 고백한다. “은근히 힘을 줘서 이야기해야 하나/살아남은 자의 슬픔을/나도 충분히 부끄러워할 줄 안다고” 자신의 슬픔과 부끄러움에 대하여 고백한다는 것은, 자신이 아직 살아있는 양심의 소유자임을 증명해내는 것이다. 통렬한 고백을 통한 자기 증명은, 지난 세월이 남긴 지독한 치욕과 상처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으로의 미래를 성한 정신과 몸으로 살아갈 것임을, 그러함으로써 어딘가에 있을 너와 닿고 연결될 것임을 결의하고 호소하는 목소리로 이어지게 된다. “그때마다 믿어달라고, 네 손을 내 가슴에 얹어줘야 하나/내게 일어난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두 팔과 두 다리는 악마처럼 튼튼하다고”
연대하고 응답하기 위해
작품 속 가장 울림을 주는 구절은 바로 “아직 새로 시작할 힘이 있는데/성한 두 팔로 가끔은 널 안을 수 있는데”다. 미투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며, 최영미는 자신이 가진 슬픔과 분노가 2016년 시인 B의 성폭력을 고발한 고양예고 학생들의 슬픔과 분노와 닿아있음을 느꼈으며 그 투명한 슬픔의 힘으로 맞서 끝내 이기겠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작품에서 드러난 최영미의 시인 정신이 2018년 최영미의 미투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최영미는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알리기 위해서, 과거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그 무엇보다 연대하고 응답하기 위해서 미투 운동을 개진해 나가고 있다. 작품 속에서 최영미는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하고 끊임없이 묻는다, 그리고 이제 대답한 것이다. <다시 줍는 시>의 스무 번째 글을 통하여, 최영미의 시인 정신을 읽고 그의 미투 운동에 강한 지지와 연대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