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이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흡

알다시인인터뷰

시인 김이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흡

신나리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여성 시인 인터뷰 시리즈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 시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해보기 위하여 기획되었다. 인터뷰가 여성 시인과 독자가 만나 서로의 삶을 읽고 나누는 통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두번째 인터뷰이 김이듬 시인은 1969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시집으로는 『별 모양의 얼룩』(2005), 『명랑하라, 팜 파탈』(2007), 『말할 수 없는 애인』(2011), 『베를린, 달렘의 노래』(2013), 『히스테리아』(2014), 『표류하는 흑발』(2018)이 있다. 핀치의 <다시 줍는 시> 시리즈에서 김이듬 시인의 작품 <호명>을 소개했다. 김이듬 시인으로부터 전달받은 ‘여성 예술가로서의 실존’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독자에게 전한다.

신나리 자유롭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김이듬 저는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어요.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부산에 있는 할머니 댁에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살았어요. 아버지가 아프셔서 진주로 다시 돌아갔다가, 이후에 전공을 독문학에서 국문학으로 바꾸고 진주에 있는 대학원을 다녔어요.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 서점에서 <포에지>라는 잡지를 발견하고 시 50편을 투고해 문단에 등단하게 됐어요. <포에지>의 첫 신인으로 등단하면서 그곳의 심사위원이었던 황현산 선생님과 김혜순 선생님을 만났죠.

신나리 김이듬은 필명이고 원래 성함은 김향라이시죠.

김이듬 <포에지>에서 첫 신인을 배출하면서 모던하고 낯설게 다가갈 수 있는 젊은 시인을 원했어요. 제 본명에 ‘향’이라는 중간 음절이 굉장히 클래식하잖아요. 저는 이름을 바꾸고 싶지는 않았는데, 출판 관계자분들이 다 바꾸라고 권유를 하시더라고요. 고민을 해보다가 나는 지금 등단을 하지만 아마 살아 생전엔 아무도 나를 모를 것 같고 죽어서야 유명해질 수 있겠다 싶어서, 현생은 됐고 미래라는 의미를 담으면 어떨까 생각하게 됐죠. 진주에 가면 논밭을 한 번 매고 계절이 좋으면 논밭을 거듭 한 번 더 활용하는 걸 이듬매기라고 불러요. 또 이듬해라는 말 역시 미래라는 의미를 담고 있죠. 필명을 안 짓겠다고 버티고 있을 때, 황현산 선생님이 김고금이라는 이름을 하나 사사해주셨어요. 오래될 고자에 금지하다의 금자인데, 뜻은 좋은데 김고금이라고 하면 너무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버릇없이 술 먹고 선생님께 전화해서 김고금 안 한다고 막 뭐라고 했거든요. 그 다음부터 제가 전화하면 안 받으시더라고요.(웃음) 

사진 조아현

신나리 올해 황현산 평론가님도 세상을 떠나셨지요.

김이듬 올해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다 세상을 떠났어요. 이승훈 선생님, 황현산 선생님, 그리고 어제 허수경 시인이 떠났죠. 허수경 시인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새벽에 호수에 가서 그냥 투신자살을 할까 생각도 했어요. 허수경 시인은 같은 진주 출신이고요. 베를린 자유 대학교에서 제가 파견작가로 6개월 정도 있을 때 허수경 시인 신세를 많이 졌었어요. 언니가 집에 김치 담가 놓은 거 내가 다 먹고, 언니랑 같이 시장에 가 토마토 묘목을 사서 화분에 심기도 했죠. 언니가 너랑 진주 사투리로 말하니까 너무 좋다고, 너 여기 더 머물다 가면 안 되냐고 했었어요.

책방이듬,
그리고 <페이퍼 이듬>

신나리 자주 해외를 돌아다니시다가, 올해는 일산에 책방을 내셨어요.

김이듬 원래 저는 한 군데 오래 있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그래서 ‘이곳에 나는 장기간의 여행을 와 있고 책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책방을 하면서 우연히 만난 좋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걸 배우고 있어요. 인간이 아름다운 존재라는 걸 느껴요. 책방에 오시는 분들끼리 서로 친해져서 음식도 나누어 먹고 함께 놀러도 가면서 자유로운 공동체가 형성됐어요. 우연히 만나게 되는 좋은 친구들 그리고 작가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을, 어딘가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곳을 사람들이 기다려왔던 것 같아요. 어제는 책방 회원들끼리 스파게티를 한 솥 삶아 먹었어요. 저는 먹기 싫어서 혼자 라면도 안 끓여 먹는 사람인데 남을 위해서 음식을 하는 사람이 된 거죠. 또 책방에 문학청년들이 와서 앉아있으면 제가 뭐라도 해주고 싶어요.

신나리 잡지 <페이퍼 이듬>의 창간도 준비하고 계시고요.

김이듬 <페이퍼 이듬>은 기존 판의 틀을 깨고 문단 권력에 대항하는 시도에요. 한국의 문학 잡지 중 남자 편집 위원이 없는 잡지는 없어요. 99%가 주관이 남자죠. 남자만 하라는 법 있나요? 우리는 편집 위원이 다 여자예요. 잡지에는 시, 초단편소설, 에세이, 기획특집이 실릴 예정이에요. 작품들의 경우 등단과 비등단 여부를 가리지 않고 투고를 받았어요. 작가들 프로필에도 등단년도와 수상경력을 기재하지 않을 예정이고요. 기획특집에서는 국경이라는 경계를 해체하고자 해요. 다른 나라에 이민 가거나 입양 보내진 사람들의 작품을 실을 예정이에요. 그 사람들은 한국어를 몰라요. 해외에서 생존하게 하려고 부모들이 그들에게 한국어를 안 가르쳤거든요. 기획특집의 작품들로는 영어시와 번역한 한국시가 실릴 예정이에요. 저는 <페이퍼 이듬> 출간으로 비등단 작가들에게 숨 쉴 구멍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왜 꼭 등단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보자는 거죠.

사진 조아현

신나리 한국 문학판의 등단 제도를 어떤 지점에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할까요?

김이듬 해외를 돌아다녀 보면, 한국처럼 시인과 시인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데가 잘 없고 ‘너 등단했어?’ 이렇게 물어보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아요. 해외에서는 자기가 시를 써서 조그만 출판사에서 인쇄하여 친구들한테 나누어 주거나 동아리로 모여 자기가 쓴 시를 사람들과 돌려보면 시인이에요. 모두가 그를 시인이라고 인정해주고 자기도 ‘나 시인이야.’라고 말해요. 한국에서는 등단 안 한 친구들이 자기를 ‘문청이에요, 습작생이에요.’라고 말하잖아요. 등단 제도는 출판사와 심사위원을 위한 거예요. 자본주의 매커니즘인 거죠. 등단으로 출판사는 특집호를 내서 팔아 돈을 벌고 심사위원들은 심사비를 받아요. 또 문창과의 교수들은 월급을 받죠. 저는 항상 등단 제도에 대한 회의가 있었어요. ‘그럼 나는 이미 등단했는데 등단을 파기해야 하나?’하고 생각해보다가 라이센스가 없으니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대신 저부터 조금씩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했죠.

신나리 시집 『표류하는 흑발』에는 여성의 목소리가 많이 등장해요.

김이듬 제 시 속의 페르소나(시적화자)는 남성일 때도 아이일 때도 있고 성 정체성이 모호한 경우도 있어요.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일 때도 있고요. <투견>에서는 주인한테 버림받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개가 되고 <세이렌의 노래>에서는 세이렌이 되죠. 그렇지만 제가 여성이기 때문에 작품 속 페르소나는 여성인 경우가 많아요.

신나리 작품을 통해 여성이 겪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시지요. 이때 사용되고 있는 상징인 ‘치마’는 어떤 의미인가요.

김이듬 시 <내 치마가 저기 걸려 있다>의 경우, 제가 위안부 할머니들에 관해 많이 생각하던 시기에 쓰여졌어요. 당시에 할머니들도 치마를 입었을 텐데, 할머니들에게 치마가 벗겨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했죠. 저는 그때의 치마는 잃어버리기 쉬운 여성의 소유물, 찢어지기 쉬운 생명이라고 생각했어요. 남자들이 원하면 언제든 부술 수 있는, 여자라는 존재에 둘러 씌워진 아주 허술한 사회적 막이라고 생각했죠. 한편 치마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생명을 은닉하거나 보호할 수 있는 오브제라고도 생각해요. 마치 영화 속 게릴라군들이 어딘가에 치는 텐트처럼요.

신나리 시집에는 다른 나라 여성들의 상황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나와요.

김이듬 시 <행복한 음악>에는 가엘(Gaëlle)이라는 친구 이야기를 썼어요. 그 시에는 ‘행복한 사람은 없었다’라는 문장이 반복적으로 나오죠. 가엘은 한국 나이로 5살에 프랑스 파리로 입양되었고, 좋지 않은 양부모 밑에서 모국어를 못 배우고 자랐어요. 커서 파리 사람과 결혼했는데 가정 폭력 문제로 이혼을 하게 됐고요. 지금은 로맹 롤랑 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며 아들 둘을 키우고 있어요. 그런데 가엘이 원해서 그런 삶을 산 건 아니거든요. 국가라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추방된 거죠. 추방된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저도 버림받은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친연성이 있죠. 저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하고 또 그리워해요. 언젠가 한 번은 가엘과 같이 차를 타고 가는데 가엘이 갑자기 불어로 막 욕을 하는 거예요.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미안하다면서 잠깐 소리 좀 질러도 되냐고 하더라고요. 한국에서 다른 나라로 입양된 사람들이 그곳에서 다 잘 살면 마음이 덜 쓰일 거예요. 그렇지만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생각하면 걱정도 되고 보고 싶고... 사랑해요, 제가.

신나리 작품으로 공감하고 만나게 된 친구들이군요.

김이듬 AWP(Association of Writers & Writing Programs)라는 프로그램에 초청받아 간 적이 있어요. 그때 <물류센터>라는 작품을 낭독했는데, 끝나고 어떤 한국 사람처럼 생겼는데 한국어를 하나도 못 하는 사람이 와서 울면서 네 시는 내 이야기 같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 시는 보육원에 있다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왔는데, 물류센터 트럭에 실려 어떤 나라로 수출된 존재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그 사람이 우는데 ‘아, 시도 눈물을 흘리게 하는구나. 내 시도.’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전에 경주에서 시 낭독을 한 적이 있는데 웬 한남이 와서 이게 무슨 시냐고, 추잡하다고 그래서 난리가 난 적이 있어요. 한국에서 맨날 시가 야하다, 더럽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저는 항상 기가 좀 죽어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의 반응을 보고, 대다수에게 제 시는 교과서적이지도 교훈적이지도 삶의 희망을 주지도 않겠지만, 극소수에게는 공감이 생기는 시라는 걸 알게 됐죠. 그러한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유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데 제 나름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요.

신나리 힘든 사람들끼리 만나면 더 힘들어지지 않나요. 유대감과 책임감을 어떻게 지킬 수 있나요. 

사진 조아현

김이듬 제가 가엘의 이야기를 쓰지 않으면 그러한 존재가 이 세상에 있었다는 걸 아무도 모르잖아요. 저는 가엘을 기억하고 씀으로써 우주 어딘가에 가엘이 살았었고 하루하루 살려고 노력했다는 것, 그녀가 혼혈아인 자기 자식 두 명을 위해서 일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요. 그러한 존재들이 모여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라는 걸 제가 배워가고 있거든요. 물론 패배한 사람들끼리, 슬픈 사람들끼리 만나면 더 힘들고 괴롭고 우울해지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요. 저도 그런 과정을 겪었고 그런 모임에 안 가게 되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제가 글을 쓰기 때문에, 글을 쓰는 존재로서의 자기 약속이 있어요. 저는 저한테 ‘너는 그렇게 하면 좋지 않겠어?’하고 자꾸 되물어봐요. 문학을 한다는 것은 그러한 마음까지 끌어안고 담을 넘어가려는 시도인 것 같아요. 극복이나 초월은 아니고 포월인거죠.

신나리 작품 속에는 친구들 뿐 아니라 적들도 많이 등장해요.

김이듬 저는 한국 문단에 연줄도 없고 빽도 없고 친구도 별로 없어요. 한국이 싫어서 외국에 강사를 지원해서 나간 적이 많아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제가 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제가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실망한 사람들이긴 하더라고요. 또 두 번째 시집 『명랑하라 팜 파탈』(2007)을 내고 나서는, 시집에 대한 반응이 안 좋았고 시집을 빌미로 남자 시인들이 불쾌한 장난도 많이 쳤어요. 문단 행사에 제가 찾아가면 팜므파탈이 우리를 잡아먹는다는 둥의 이야기를 하고요. 남자 선배 하나가 재떨이를 가지고 오라고 해서 제가 선배를 발로 찬 적이 있거든요. 그 일을 가지고 남자 선배 전부를 때렸다는 구설수를 만들기도 하고요. 사람들은 팜므파탈하면 남자를 유혹하는 꽃뱀을 생각하잖아요. 제가 생각한 팜므파탈은 욕 많이 먹는 여성들이에요. 잘나서 욕 먹고, 책 많이 읽는다고 욕 먹고, 대든다고 욕 먹고, 호락호락하게 밥상 안 차린다고 욕 먹는 여자들을 모두 묶어서 ‘욕 먹는 여자들이여, 힘내자.’고 말하고 싶었는데 너무 길어서 ‘명랑하라, 팜 파탈’이라고 한 거예요.

신나리 시인님은 스스로 팜므파탈이라고 생각하세요?

사진 조아현

김이듬 저는 중세에 태어났으면 어디 언덕에서 불태워졌을 거예요. 길어서 불에 오래 탔을 거예요. 장작이 많이 필요했을 것 같아.(웃음) 저는 페미니스트예요. 대학 졸업반 때부터 운동권으로 좀 뛰었을 때는 강성 페미니스트였어요. 이제는 나이가 들고 기력이 약해져서 약간 온화해졌죠. 저는 지금 꼴페미 친구들이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고요. 저는 삶 속에서 문화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실천해 나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차별하지 않고, 조금 더 평등하게 하고, 포용해 나가면서도 말해야 할 때는 정확히 말을 하고요.

저는 소수가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의논하고 서로 존중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페미니즘 운동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는 페미니스트고 누구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리에서 무엇인가 해 나가는 사람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거죠. 집안에서 남편과의 평등을 위해 싸우는 주부도 페미니스트고 직장 내에서 남성 동료, 상사와의 평등을 위해 싸우는 직장인도 페미니스트거든요. 또 인간과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이 담보된 상태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장기적으로 운동을 해 나가는 게 페미니즘 운동이 지향해야 할 바라고 생각해요. 

전 세계를 걸고

재작년에 있었던 문단 내 페미니즘 운동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시 논의할 필요가 있어요. 당시에 문청 여자애들만 다 자기 이야기를 끌어내고 정작 작가들은 조용했잖아요. 도대체 문단 안으로 들어 오지도 않은 애들만 펑펑 터뜨려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그 일로 지금 등단 못 하는 애들도 많아요. 이슈를 터뜨리거나 잠깐 치고 빠지면 안 되죠. 또 희생자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돼요. 이미 등단한 작가들이 폭탄을 매고 문단 안에서 내파를 해야 돼요. 그렇게 문단 내 작가들의 문제를 들추어야죠. 운동을 하려면 신념을 가지고 장기적으로 해야 해요. 자기 전 세계를 걸고요.

신나리 한국의 문단은 유독 남성 중심적이기도 하고요.

김이듬 한국에 유명한 남성 작가들 많죠. 교보문고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고, 커다란 강당의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고요. 한국 문단의 권력을 그런 남자들이 다 잡고 있죠. 한국의 민주주의 투사인양 기세등등한 남성 작가들 모두 여자를 밟고 선 사람들이에요. 집에 가서 자기 엄마한테 밥상 집어 던지면서 ‘반찬이 이게 뭐야! 나는 바깥에서 큰 일 하고 왔는데!’ 이런 사람들이 99퍼센트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시인들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어해요. 국내 일류 비평가라는 사람들은 그런 시인들의 작품을 칭찬하고요. 다 가부장적 작품들이에요. 면밀하게 작품을 읽지 않고 그런 작품들에 수십 개의 상을 주죠. 우리는 바로 여기에 살고 있는 거예요. 그걸 알아야 해요. 아는데 버티는 거죠. 끼리끼리 뭉치고 패거리 만드는 데 가지 않고 저는 그냥 여기서 보고 있어요. 책방에 동네 할아버지나 주민들 오는 거 좋아하고 같이 놀고 있죠. 이게 제 나름의 문화 운동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시인이 시는 안 쓰고 장사한다고 욕을 하지만, 저는 시인도 구루마 장사하는 사람, 나이트클럽 하는 사람, 공사장에서 인부 하는 사람 있어도 된다고 생각해요. 시인이 무슨 벼슬도 아니고, 시인이면 다 출판사 해야되고 다 대학교수 해야 하는 게 아니니까요.

피와 땀과
생리혈과 콧물과
눈물로

신나리 시인님 작품이 페미니즘 문학으로 해석될 때가 많은데요.

김이듬 지금까지 몇백 편을 썼지만, 시를 쓸 때 ‘나는 페미니스트야, 나는 여성이야.’하고 써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페미니즘을 구축하거나 어떤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서 쓴 적은 없죠. 제 피 속에 흐르는 것이 시로 나온 거고, 제 마음속에 들끓는 것이 시로 나왔을 뿐이죠. 또 시라는 것은 세상에 던져 놓은 이상 제 것이 아니잖아요. 독자들이 퇴폐주의라고 해도 페미니즘이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읽는 사람들의 능력, 취향일 뿐이죠. 저는 그냥 쓰이는 대로 쓸 뿐이에요. 시 쓰면서는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에 시를 쓰는 거고요.

신나리 시를 쓸 때는 어떤 기분인가요?

김이듬 물론 괴롭죠. 그렇지만 고통과 쾌락이 같이 있어요. 물속에서 아무리 숨을 오래 참아도 결국은 물 위로 떠올라야 하는 것처럼, 저는 호흡을 하기 위해 시를 쓰는 것 같아요. 생활이 물 속이라면 시를 읽고 쓰는 것은 물 위로 올라 호흡하는 일이죠. 시를 오래 안 쓰고 있으면 내가 지금 살아있긴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시를 쓸 때 진짜 살아있는 걸 느끼거든요. 시를 쓰지 않으면 병이 날 것 같을 때가 있어요. 시가 아니면 저는 벌써 누군가를 죽였을 지도 모르고 시가 아니면 자살했을 수도 있어요. 

시가 이 세상에서 제일 나에게 아무 것도 안 주지만 모든 것인 느낌일 때가 많아요. 시를 쓸 때는 완전히 혼자인 내가 나를 대면해서 나의 피와 땀과 생리혈과 콧물과 눈물로 그냥 밀고 나가는 느낌이에요. 쩔쩔매면서 흘리는 느낌이에요. 나의 가장 바닥으로 들어가 보는 느낌이 들고요. 그러다 보니 내가 생각했던 이야기나 어휘들이 나오게 되는 거죠. 그래서 제 시는 여성의 글쓰기로 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누군가는 논문을 읽다가 시를 쓰기도 하고 철학 속에서 시를 쓰기도 하는데, 사실 저는 철학이 없어요. 그냥 ‘나는 이거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써요.

필자 주: 허수경은 196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여러 편의 시집과 산문집을 남긴 한국의 여성 시인이다. 허수경 시인은 2018년 10월 3일 독일 뮌스터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 인터뷰는 바로 그 다음날인 10월 4일에 진행되었는데, 김이듬 시인은 소식을 듣고 많이 놀라고 힘든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에 함께했다. 양해를 구하여 김이듬 시인님의 목소리로 허수경 시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신나리 괜찮으시다면 허수경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나요.

김이듬 기사에 쓰여진 것과 달리 허수경 시인은 고향에 계신 병든 어머니와 어머니를 돌보는 남동생과 서울에 사는 언니가 있어요. 허수경 시인은 한국이 싫어서 떠났어요. 그렇게 시 잘 쓰는 시인에게 한국 문단은 큰 상 하나 안 주려고 했죠. 모국어에 대한 미학을 잃었다고 상에서 떨어뜨린 적도 있고요. 너무 서럽고 분노가 이는 일입니다. 허수경 시인은 배고픈 사람에게 요리해주는 것을 좋아했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남자 시인들이 착취하려고 했었고요. 그러나 무엇보다 허수경 시인은 뼛속까지 작가였던 사람이에요. 자신의 작품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는 사람이죠.

제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했던 시인이고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이에요. 제가 유일하게 언니라고 부르는 사람이죠. 허수경 시인은 인간적으로 놀라운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해칠지 모른다고 해도 당장 자기 앞의 사랑에 투신할 수 있는 사람이었죠. 결국 그 사람이 자기를 해치더라도 계산 없이 자신의 감정에 진실한 사람, 멋있는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신나리 이야기를 듣다 보니, 허수경 시인님이 이듬 시인님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김이듬 저는 하수고. 언니는 고수예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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