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재난 매뉴얼
데버러 패러데즈
버려진 도시가 불타오를 때
남자들과 아이들이 도망가고 난 뒤
가만히 서서, 먹잇감처럼 조용히
천천히 돌아보라. 저주의 땅을 바라보라.
버려진 도시가 불타오를 때
무너진 현관을, 부서지지 않은 빵을
남아서 애도하라.
겁내지 말라. 그들을 따르지 말라.
의로운 듯 달아나는 발걸음을 견뎌라. 대신
가만히 서서, 먹잇감처럼 조용히
천천히 생각을 거두어 탈출을 내려놓아라.
철문의 걸쇠는 풀려 있고 책임은 벗어버렸다.
버려진 도시가 불타오를 때
당신 안의 부름을 받아들여라. 남아 있는
사람들을 걱정하라. 죽은 듯 꼼짝 않고
먹잇감처럼 조용히, 천천히 뒤를 돌아
본질적인 무엇으로 변하여라. 쓰러진 자들의
이름을 기억하라. 먼저 달아나지 말라.
버려진 도시가 불타오를 때
가만히, 조용히 서서 기도하라. 돌아오라.
해설
이 시는 재난 앞에서 맞서 증언하는 페미니스트로서의 ‘선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목의 ‘아내’는 구약 성서에 나오는 ‘의인(義人) 롯의 아내’입니다. 소돔이 멸망할 때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으로 변했다는 전설의 주인공이죠. 이 시는 롯의 아내를 위한 재난 대피 매뉴얼인 셈입니다.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도망치던 롯의 아내는 왜 뒤를 돌아보았을까요? 이를 두고 성서에서는 물질세계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해서라고 경계 삼습니다. 당사자인 여성의 시각에선 어떨까요? 과연 탐욕이나 물질세계에 이끌린 ‘죄악’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시인은 롯의 아내라는 이 경계적 인물에 집중합니다. 돌아보는 행위는 오직 그의 선택입니다. 그것은 재난과 잔혹한 참극을 증언하고 목소리를 내는 행위이기를 기도합니다.
시인: 데버러 패러데즈(Deborah Paredez)
1970년 미국 텍사스 주 샌앤토니오에서 나고 성장했다. 시집으로 《피부의 이쪽(This Side of Skin)》이 있다. 전쟁과 여성, 흑인과 라틴계 등 소수 인종을 주제로 시를 쓰고 있다. 현재 콜럼비아 대학에서 시 창작과 소수민족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라틴계 시인 단체인 ‘깐또문도(CantoMundo)’의 공동대표이자 편집위원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