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최승자 시인이 쓴 짧은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짧기도 하지만 쉽게 읽히기도 해요. ‘독 안에 든 쥐’는 흔하게 우리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비유니까요. 그 비유는 가볍다 못해 우스꽝스럽기까지 합니다. 이 비유를 들어 상대를 놀리며 깔깔 웃었던 시절이 누구나에게 한 번쯤은 있었을 테죠. 하지만 이 시에서 ‘독 안에 든 쥐’는 그야말로 절박합니다.
시적 화자는 세계를 ‘독’에 비유합니다. 둥글고 딱딱하고 깊은 항아리 말이죠. 이 세계가 '독'일 때 세계의 바깥은 없습니다. 지금-여기에서의 구원이란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죠. 세계 바깥을 상상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런 세계는 '화자의 생각'에 의해서 시작되고 또 계속 이어져갑니다.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는 쥐였”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생각에 의해 세계는 공포가 되고, 또 그 공포에 의해 화자는 “먼저 앙앙대고 위협”하는 자가 됩니다. 아무도 쥐를 먼저 건드리거나 공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세계의 그 보이지 않는 강제와 위력은 누군가에게는 더 끔찍하고도 폭력적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최승자에 이어
꼬리를 물고
수순처럼 떠오르는 수많은 여성들의 이름을 미루고, 그 이름의 맨 앞줄에 이 시를 쓴 최승자를 세워 봅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밀려난 삶을 살아야 했던 한 뛰어난 시인 말입니다. 물론 그 이유와 얽혀 있거나 혹은 별개로 있는 다른 많은 이유들 또한 있을 테죠. 하지만 그 많은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여성 시인’이라는 이유를 지울 수는 없을 겁니다.
최승자에 이어 “꼬리를 문 쥐”처럼 연쇄적으로 떠오르는 얼굴들도 있습니다. 발견되지 못한 채로 묻히고 죽어갔던 많은 여성들 말입니다. 박서원과 이연주와 나혜석과 전혜린, 그리고 이름 없이 죽어간 ‘그 밖의’ 이름들. 죽어서야 발굴되는, 죽어서조차 발굴되지 못하는 수많은 이름들. 비단 시인이나 예술가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그들을 불러내고 있습니다. 슬픔과 분노로 단단해진 우리의 목소리가 그들을 호명해내고 있습니다.
공포마저
평등하지 못한
이제 이 시 안에 든 ‘악순환’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봅시다. 사실 세계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있을’ 뿐이죠. 언젠가 나를 ‘잡아먹을지’ 모르는 가능성만을 가진 채 그렇게 ‘있을’ 뿐입니다. 이런 서사는 ‘생’에 대한 은유로도 비칠 수 있겠습니다. 죽음의 때가 예정되어 있지 않은 보편적 인간의 삶에 대한 것으로요.
하지만 그 ‘죽음’에 대한 공포라는 것마저도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평평한 땅 위에 있다고 믿는 자와 기울어진 땅 위에 있음을 보는, 양자에게는 삶만큼이나 죽음에 대한 상상의 값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단적인 예로, 여성은 강간에 의해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을 훨씬 쉽게 상상합니다.
시적 화자는 그래도 사정이 좀 나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 공포가 나를 잡아먹기 전에/지레 질려 먼저 앙앙대고 위협하는 쥐”이니까요. 앙앙대고 위협할 줄은 아는 쥐이니까요. 자신의 언어를 자신의 용법대로 사용할 줄은 아는 쥐. 공포와 억압으로 가득 찬 이 세계에서 입이 틀어 막히고 언어조차 잃어버린 여성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볼 때, 그 쥐는 상대적으로 형편이 나은 것 같다는 이야깁니다.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그 공포의 앙앙댐은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2연에서 언급하듯이. “오 한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앙앙댐의 연쇄이자 침묵의 연쇄일 것입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 세계를 빙빙 돌 수밖에 없는. 이것이 공포를 더 키우고 이 세계를 더 나쁘게 만든다는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악순환’의 양상인 동시에 악순환의 계기인 것이라고 시인은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를 다르게 독해할 수는 없을까요? 어차피 세계 바깥이 없다면 모든 행위는 세계의 안쪽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앙앙댐이든 빙빙 도는 행위이든 어쨌든 쥐들은 무언가를 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그저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죽음에 ‘대하여’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다는 거죠.
이 끝없는 ‘연쇄’를 지칠 줄 모르는 우리의 ‘연대’로 바꿔 읽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식상한 독해인가요? 하지만 세계는 아직 바뀌지 않았고 남성 연대의 고리와 백래쉬 또한 강력합니다. 연대는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식상함이라면 식상함은 더 깊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