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줍는 시 27. 낯선 시간 속으로

생각하다

다시 줍는 시 27. 낯선 시간 속으로

신나리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얼마 전 일본 교토로 혼자 여행을 다녀왔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을 걸어 다니며, 푸른 바람과 함께 밀려오는 자유로움에 정말로 신이 났다. 여행의 이튿날, 종일 걷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한 오래된 까페에 들어갔다. 달콤한 토스트를 먹고 향 좋은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가방에 챙겨온 시집이 생각나 펼쳐 읽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이 세계가 오직 시의 시간으로 가득차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랜만의 여행으로 한껏 들떠 있던 나의 시간은 온데 간데없이 말이다. 그때 내가 읽었던 시집은 시인 김이강의  <타이피스트>였다.

김이강은 과거의 자신이 머물렀던 어떤 시간의 풍경을 시에 담아내는 작업을 한다. 그러므로 그의 시를 읽는 일이란, 그의 시간과 조우하여 그것을 감각하는 일이다. 마치 영화나 음악처럼 작품을 통해 시간을 감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우리에게 특별하고 낯선 시적 경험을 선사한다. 그의 시를 통해 우리는, 내가 오직 현재만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어떤 풍경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어린 시절 홀로 공터를 바라보며 고독감을 느끼던 나, 잠에 든 연인을 바라보며 사랑과 그리움을 느끼던 나, 어떤 풍경을 바라보며 비현실감을 느끼던 나. 김이강의 시를 읽는 시간은 우리가 과거에 두고 온 ‘나’들이 현재의 내 곁으로 떠오르는 시간인 것이다.

“나는 계속 상상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동원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시계를 보았고 시간인 시계 바깥에서/집을 짓고 그런 곳으로 아이들이 한 명씩 옮겨지고 있는 날들”(「봄날」) 

오후 5시 44분, 작품 속 나는 홀로 옥상의 폐타이어 위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옥상에서 뛰놀던 아이들은 엄마가 불러서 집으로 갔거나, 밥 짓는 냄새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아무도 나를 부르러 오지 않는다는 사실과, 그것은 아마 내가 우리집 옥상에 앉아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사실과, 그러나 실은 누구도 내가 우리집 옥상에 앉아 있을 것이라 상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번갈아 생각한다. 귀신이 되어버린 기분으로 옥상에 앉아, 나는 귀신처럼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가버린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마 내가 앉아 있는 이 오래된 타이어는 아버지가 옥상에 올려 둔 것이리라.

비가 오는 날 초등학교 앞에 엄마가 우산을 들고 찾아오지 않을 때, 집에 사람이 없어 밥을 혼자 차려 먹어야 할 때, 어린 나는 딱히 슬프지 않았다. 우산을 쓴 친구들이 엄마 손을 붙들고 집에 돌아가는 모습을 볼 때도, 티브이에서 사람들이 따뜻한 식사와 함께 저녁을 보내는 모습을 볼 때에도 그들과 나의 처지를 비교하며 비애에 젖지 않았다. 대신에 마을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며 하교길의 정취를 즐기는 호기를 부리거나, 짜파게티를 끓여 먹고 식탁 의자에 늘어져 가만히 부엌창으로 비추어 드는 노을빛을 감상하며 그 시간들을 보냈다. 「봄날」은 어린 아이가 홀로 느끼는 고독감을 과장이나 전형화없이 전달하면서도, 아무도 부르러 오지 않는 아이의 시선으로 이미 사라진 것들과 지금 사라지고 있는 것들과 앞으로 사라질 것들의 자리를 매만지고 있어서 좋다.

“내가 오는 줄도 가는 줄도 모르고/시계가 고장 난 것도 모르고/세상이 끝난 것도 모르고//엎드린 채로 영영 자라고 있다”(「네가 잠든 동안」) 

밤 늦은 시간 신문사 빌딩의 한 구석에서 나의 연인이 신문을 오려 붙이고 있다. 좁은 구역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조명을 받으며 그는 내게 이것은 취미가 아니라 밥벌이라고 말한다. 나는 한 켠으로는 연인의 말하는 소리를 듣고, 한 켠으로는 연인의 큰 키를 헤아려보며 서 있다. 그리곤 이 뜨겁고도 차가운 곳에서 연인의 키가 더 자라나버리면 어쩌나 생각한다. 곧 읽다 만 책을 펼친 채로 엎어 두고, 나의 연인은 가만히 잠에 빠져 들어 간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작품 속 나는 연인의 규칙적인 호흡이 이 세계의 성벽을 무너뜨리는 상상을 한다.

대학 시절 지방에서 상경하여 홀로 지내고 있는 연인의 방에 자주 놀러가곤 했다. 함께 국을 끓여 밥과 함께 먹고, 좋아하는 시집을 나누어 읽고, 자소서를 쓰거나 하염없이 뒹굴거리며 보냈던 시간들. 연인의 방과 그때의 우리를 생각하면, 깊고 추운 겨울 밤 그가 나를 위해 전기 매트를 틀어줬던 일이 떠오르고 그게 좋다. 집안의 공기가 너무 차가워서, 우리는 이불 속에서 한없이 껴안고 자야 했다. 매트 아래에 손을 넣고 이불이 따뜻하게 데워졌는지를 확인하던 사랑스러운 연인이 꿈 속으로 잠들어갈 때, 잠든 그를 바라보던 나의 마음. 「네가 잠든 동안」은 연인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란 곧 연인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의 시간임을 보여준다. 시의 첫 구절이 말하듯, 

“드문드문 너를 보는 일/그리워하는 일/유행이 지난 일”.(「네가 잠든 동안」)

김이강은 어떤 풍경을 기억해내기 위해 작은 대화를 한다. 그에게 어떤 풍경이란 꽤 이상해 보였으나 어색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것에 대해 조금 말하고 생각해보다가, 곧 입을 다물고 그저 세계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는 세계의 일부가 된다. 과거의 내가 머물러 있는 어떤 시간에 대해 말하고 생각해보는 일은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을 하나의 세계 속으로 이끄는 일이다. 이러한 작업을 되풀이하는 일을 통하여, 그는 제 3의 시간으로부터 다시금 조립된다. 김이강의 시를 읽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시를 읽는 일은 과거의 어떤 풍경을 상기하도록 만들고, 우리는 시 읽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는 어떤 시간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우리를 재조립한다. 시간이 우리를 조립하고 시가 우리를 쓰는 것이다. 

신나리님의 글은 어땠나요?
1점2점3점4점5점
SERIES

다시 줍는 시

이 크리에이터의 콘텐츠

시에 관한 다른 콘텐츠

콘텐츠 더 보기

더 보기

타래를 시작하세요

여자가 쓴다. 오직 여자만 쓴다. 오직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플랫폼

타래 시작하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