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면 아르바이트를 한다. 밤 열 시에 일이 끝나고, 빵을 하나 사서 씹으며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걷는다. 원체 속이 좋지 않은 편이고 걸으면서 먹다 보니 자주 체한다. 한 시간 반 동안 버스를 타고 가면서, 혼자 정말 별 생각을 다 한다. 일 그만 두고 싶다. 지금 상황으로는 일을 그만두는 게 아니라 더 해야 하는데.. 이번 달 월급으로 작업실 월세까지 내고 나면, 얼마나 저축할 수 있을까. 애초에 안정적인 직장에 다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야, 남는 시간 쪼개서는 원하는 작업을 할 수 없을 거야.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언제까지 내가 지낼 수 있을까. 당장은 괜찮지만 곧 부모님 집에서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왜 나는 이런 길을 선택해서 고생을 하고 있는 거지. 아니야, 내가 문제가 아니야, 나한테 화살을 돌리지 말자. 그럼 누구한테 화를 내지? 그냥 다 포기하고 싶다. 너무 구질구질하다 모든 게. 생각을...생각을 멈춰야, 내가 산다.
절망과 괴로움
어릴 때, 진심으로 닮고 싶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오랫동안 다녔던 학원의 논술 선생님. 그는 좋은 어른이자 선생님이었고, 나는 그를 진심으로 잘 따랐고 좋아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너무 힘들고 불행해 보였다는 점이다. 한 번은 맹랑하게 묻기도 했다. “선생님, 학원에서 일하는 게 너무 싫어요?” 선생님은 아니라고, 너희랑 공부해서 즐겁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쯤, 선생님은 시인으로 등단하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때의 나는 여러 번 속으로 생각하고 다짐했다. 절대 저 사람처럼 되지 말아야지, 저게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미래야. 안타깝게도 나는 선생님과 완전히 비슷한 사람으로 자라났고, 그때의 선생님처럼 학원에서 힘들게 일하며 시를 습작하고 글을 쓴다.
이제는 왜 선생님이 힘들고 불행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하고자 하는 일로 돈을 벌 수 없는 사람이 갖게 되는 절망이 무엇인지 나는 안다. 또 그러한 절망감을 뒤로 하고 당장의 생활과 미래의 대비를 위해 밥벌이를 할 때 느끼는 괴로움이 무엇인지 나는 절절하게 안다. 별별 아르바이트를 다 전전해본 끝에, 나는 현재의 상황에서 시간 대비 가장 높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학원 강사가 되기로 하였다. 그래봤자 작업하는 시간을 빼고 일하는 시간을 정하다 보니, 학원에서 전임으로 일할 수는 없고 매번 파트타이머로 일을 한다. 요즘 학원들은 월급이나 시급으로 급여를 주지 않고 비율제로 급여를 주기 때문에, 학원에서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의 영업사원처럼 스스로를 팔아야 한다. 학부모와 아이의 입맛에 맞추어 나의 급여는 매달 파도를 친다. 물론 큰 파도는 못 되고 작은 파도다. 애초에 급여가 너무 적으니까.
어른 구실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돈도 많이 못 버니 매번 학원에 일을 하러 다녀오는 길에 마음이 너무 힘들다. 다른 것보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언제까지 이런 방식으로 살면서 버틸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한숨이 난다. 유독 밥벌이에 관해 생각할 때 나는 문제의 원인을 객관적인 상황이나 사회 구조가 아니라 스스로에게서 찾는다. 어떤 문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문제의 원인을 자신 안에서 찾고 자신을 벌주거나 책망하는 태도는, 그것을 해결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겪는 당사자를 우울과 절망으로 몰아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시작된 생각은 끝이 없다. 내가 나 하나 먹여 살리지 못하는 무능한 인간이구나. 언제쯤 사람 구실, 어른 구실을 할 수 있을까. 가족들과 친구들이 보기에 나는 한심한 인간이겠지. 이렇게, 나는 자꾸 같은 방식으로 구렁텅이에 빠진다.
얼마 전 학원에서는 부당한 일을 당하기도 했다. 친구들에게 사정을 털어놓으니, 모두 화를 내며 당장 학원을 그만두라고 이야기했다. 엄마 아빠는 학원 원장을 고소해야 한다고 말하며, 네가 문제제기를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똑같이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가족들과 친구들의 말이 모두 맞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끝끝내 망설였다. 당장의 수입원이 끊기는 것이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다. 새로 일을 구한다고 해도 바로 좋은 자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지금까지 버틴 시간들이 억울하기도 했다. 학원 원장은 나를 볼 때마다 기 싸움하듯이 나를 누르기 위한 말들을 했다. 습관적으로 내 인상이 너무 세서 아이들이 싫어하고 무서워할 것이라는 말도 했다.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생글생글 웃어 보이며 버텼던 날들이었다.
그깟 일에 내 존재를 넘겨주지 않겠다고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일에 나는 적극적으로 문제제기하고 밥벌이를 그만두곤 했다. 존재가 꺾이거나 마음이 상하지도 않았다. 대학 시절 철학과 교수님께서, 본인이 마음에 새기고 있는 말들을 우리에게 전해준 적이 있다. “작은 일에는 작은 마음, 큰 일에는 큰 마음.” 학교 밖에 나가 힘들고 어려울 때면 “그깟 일에 내 존재를 넘겨주지 않겠다!”라고 생각해보라고 조언해주시기도 했다. 내게 그게 가능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내게 밥벌이와 돈은 인생에서 너무나 큰 일이며, 나는 그것 들에게 여러 번 존재를 넘겨주고 말았다. 밥벌이를 하고 돈과 싸우면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존재와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 언제쯤 이 지점을 지나 다른 이야기들을 할 수 있을까.
대학에 들어간 후 논술 학원에 한 번 찾아갔다. 예상했던 대로, 선생님은 논술 학원을 이미 떠나고 안 계셨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내 블로그에 댓글을 하나 달았다. 선생님은 자신이 시집을 냈다며 내게 그것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비를 맞고 왔는지 도착한 시집은 조금 젖어 있었다. 앞 장에는 비에 젖어 흐려진 글씨로 이렇게 써 있었다. “나리야!/세상이 이러하므로/잘 지내라는 얘기는/못 하겠고.//잘 살아야겠구나/잘 생각해봐야겠구나/잘 움직거려봐야 하겠구나.” 시집에는 밥벌이의 고단함과 돈의 가혹함에 관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선생님이 그간 힘들게 살았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저려왔다. 나는 이제 선생님과 전혀 연락하지 않고 그에 관한 소식 역시 까맣게 모른다. 내게는 그저 시집 한 권만 남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시편 <토마토 하나의 이유>는 엄마가 토마토 하나 하나에 이름을 붙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작품 속 나는 고작 토마토 따위에 이름을 붙이는 엄마가 못마땅하다. 장에 나간 엄마와 나는 토마토들을 판다. 사람들은 토마토들에 헐값을 매기고 그것들을 함부로 다룬다. 나는 서서히 화가 난다. 우리 모두가 이미 알다시피 시를 읽거나 쓰는 일은 인생에 별 도움이 안 된다. 밥벌이의 고단함과 돈의 가혹함 앞에 마음에 풍요를 불어넣고 영혼을 달래는 일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렇게 토마토 하나 하나에 이름을 붙이는 일을 한다. 시편의 마지막 문장은 “그깟 토마토 하나 가지구.”로 끝난다. 그러나 시편을 읽어 내린 사람들에게 이미 토마토는 시인이 사랑하여 새겨 넣었을 어떤 이름들이며 존재들이다. 누구든 이름을 가진 존재는 소중하고 값을 매기거나 함부로 다루어 지면 안 된다.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가 필요한 시절이다. 더운 날 어디선가 밥벌이하며 돈과 싸우는 당신에게도 이 얘기를 꼭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