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줍는 시 6. "미래가 온다"

생각하다

다시 줍는 시 6. "미래가 온다"

신나리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이 책에는 각주 대신 디졸브(dissolve, 장면전환기법)가 사용되었음을 밝혀둔다.

- 김현, <미래가 온다>, 『입술을 열면』, 창비, 2018, 190-194쪽.

너무 좋아해서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던 때였다. 너는 인사동에서 만나자고 해놓고 종로 2가 버스정류장까지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좋아해서 그랬을까, 나는 너를 만날 때마다 많이 쑥스러웠다. 버스정류장에서 인사동까지 걸어가는데 네 얼굴 한 번을 똑바로 못 쳐다봤으니까. 날씨가 덥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바람이 좋게 불었고. 우리는 인사동을 조금 걷다가 종로 3가 쪽으로 가서 밥을 먹었다. 나는 사실 그날 밥을 먹고 나왔는데 어쩌다 너에게 말도 못 하고. 근래는 미술 전시를 보고 작가와의 대화를 들었는데 이러저러한 부분이 좀 별로였다고, 우리가 함께 들었던 예술 관련 수업의 선생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가 끝날 때쯤 너는 내가 맨밥만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 그리고 무척 난감해하며 왜 밥을 먹고 나왔다고 미리 얘기하지 않았냐고 핀잔을 줬다.

그리고는 맥주를 마시러 갔던가. 내게 종로 3가는 익숙한 동네가 아니었기에 나는 네 손에 이끌려 걸어 다녔다. 아니 우리 손을 안 잡고 걸었던가. 낮은 건물들이 가득한 어두운 골목 사이를 걸어 다녔던 기억. 크게 트인 길을 걸으면서는 나의 말하기 방식과 가끔 과장해서 짓는 표정들을 가지고 나를 놀리기 시작했고. 나는 원체 잘 놀라고 자주 크게 당황하는 사람이니까. 그때도 당황하고 버벅거리며 고장이 났었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러 갔고 술이 들어가자 신이 나서 목소리가 커졌잖아. 스스로 좋은 점을 하나씩 말해보자고 했을 때, 너는 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린다는 점을 이야기했지. 네가 정말 그런 사람이라는 생각과 전혀 그런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오늘도 내 마음속에서 싸우고 있음을 너는 모를 것이다. 해가 거의 지고 저녁이 되어 우리는 종로 3가 역 근처로 다시 돌아왔다.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그리고 내가 너에게 뽀뽀를 했는데.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바로 이 장면에서 시작한다. 초가을 저녁, 종로 3가 역 앞에서, 술에 취해 열이 오른 내가 네게 뽀뽀를 하는데. 네가 아마 이렇게 말했다. “나 지금 남자처럼 보이고 사람들도 나를 남자라고 생각할 거야. 그치?” 근래는 너를 생각하면 이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씩 웃으면서 “나 그런 거 별로 상관없는데?” 꽤나 쿨한 척 말했지만. 중요한 건 나의 말이 아니라 너의 말이다. 왜 네가 그런 말을 했을까, 무엇이 네가 그런 말을 하도록 만들었을까. 나는 이제 너를 더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몸이고, 그러므로 앞으로 네 입에서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역시나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어떤 세월들이 그리고 어떤 사건들이 네가 그런 말을 하도록 만든 것일까.

사랑이라는 혁명

어떤 사람들은 그 자체로 살아가고 사랑하는 일만으로도 정치가 되고 혁명이 된다. 나는 내 존재와 내가 사랑하는 일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제니 리빙스톤의 다큐 <Paris is burning>(1991)은 할렘 댄스홀에서 열렸던 성소수자들의 파티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재작년 가을, 우연한 기회로 이 영화로 만들어진 무용을 한 편 보게 되었다. 네 명의 퀴어 무용수가 자신의 존재와 삶에 대한 이야기를 노래와 춤으로 표현한 작품이었다. 가슴에서 불꽃놀이가 터지는 것 같은 황홀을 경험했다. 그들은 자유로워 보였으며 그러므로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때 깨달았다. 아, 내가 저런 사람들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사랑하는구나. 퀴어라는 존재만이 가진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직관이 들었고 공연장에서 받은 강렬한 느낌을 언어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퀴어들의 존재와 삶이 가진 특별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왜 내가 그것에 이토록 강렬한 끌림을 느끼고 종국엔 그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

퀴어 미학에서부터 시작했다. 퀴어 미학에 관련된 글을 찾아 읽었고, 퀴어 미학으로 읽어낼 수 있는 작가들의 작품들을 찾아보았다. 더 잘 이해하고 더 잘 표현하고 싶었다. 친구들과 모여 퀴어 이론 공부 모임을 만들었다. 퀴어 커뮤니티에서 열리는 모임들에도 종종 찾아갔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낯설고 동시에 반가웠다. 해가 바뀌고 다른 학교에서 열리는 섹슈얼리티 수업을 부러 찾아들었다. 대학원 수업에서 나의 존재와 욕망과 관계와 사랑에 대해 숨김없이 그리고 거침없이 이야기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학계의 여러 분야에서 공부하는 퀴어 친구들을 만나, 우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떤 연구를 진행하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엇보다, 너무, 재미있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 여름, 한국 사회는 국정 농단과 대통령 선거로 들끓고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 이슈가 얼마나 뜨거운지가 매일 살갗으로 느껴지던 때였다.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문재인을 성소수자 인권 단체의 활동가들이 무지개 깃발을 들고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 일로 성소수자 인권 단체의 활동가들은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때 난 도서관에서 퀴어 이론가 이브 코소프스키 세즈윜의 원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인터넷에 뜨는 뉴스들을 보며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서 퀴어 이론이고 뭐고 가만히 도서관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경찰 연행에 항의하는 집회가 서울 영등포 경찰서 앞에서 열린다고 했다. 택시를 타고 학교에서 영등포 경찰서까지 갔다. 가는 길에 친한 퀴어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2년 동안의 고시 생활을 끝내고 갓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일하기 시작한 친구였다. 친구와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나누었지만, 친구에게 쉽게 너도 집회에 나오라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혹시 사진이라도 찍히면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이 사회는 우리의 존재와 사랑을 빌미로 우리의 꿈과 생계를 위협할 수 있기에. 공포가 밀려왔다.

도서관과 택시 안에서는 너무나 가슴이 뛰었는데 정작 집회 장소에 도착하니 마음이 진정되었다. 사람들 사이에 앉아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마음에 더 큰 안정과 평화가 찾아왔다. 그날 이후로 한국 사회에서 내 존재와 삶이 무엇이라 불리고 어떤 방식으로 정치화되는지, 이 사회에서 우리가 어떤 차별과 억압과 배제를 겪고 있는지를 보다 명확히 의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에서 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싸울 것인지. 지금의 내 존재와 삶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이후의 미래에 대해 그리기 위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내 삶을 정치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퀴어로 살아가는 일에서 퀴어적으로 살아가는 일로 나아가고 싶었다.

살아가고 사랑하고 싸우고 쓴다
그래서 "미래가 온다"

시인 김현의 두 번째 시집 『입술을 열면』은 근래 내가 만난 것들 중 가장 아름답고 단단한 책이다. 시집에 실린 시편들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한 인간이 이토록 실존적으로 삶을 끌어나가는 동시에 이토록 아름다운 시를 써 내려갈 수 있다는 점에 감격하게 된다. 이 책은 한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선하고 바른 것을 추구하며 쟁취해나가는 과정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것인지를 있는 그대로 증명한다. 그는 우리와 같이 살아가고 사랑하고 싸우고 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와 같이 답답하고 억울하고 서글프고 절망적인 현실과 함께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래가 온다”고 쓴다. 우리에게 미래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이곳에서 우리의 미래는 불가능하고 요원하기에, 우리는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닐까. 이곳을 바꾸기보다 이곳을 포기하고 떠나는 것이 더 나은 선택 아닐까. 그런 질문이 들 때, 김현은 이곳에도 우리에게도 미래는 온다고 쓴다. “은재야” 하고 부르면서 말이다. 시인 김현의 은재를 부르는 목소리는, 이곳에서 함께 살아가고 사랑하고 싸우고 쓰는 친구들을 부르는 목소리다. 친구들은, 친구들의 이름은 하나하나 우리의 미래가 된다.

나도 이곳에서 계속 살아가고 사랑하고 싸우고 쓰고 싶다.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그만하고 싶다. 언제나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고, 계속 살아간다면 계속 사랑하고 싶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계속 싸워야 할 것 같다. 보다 퀴어적으로. 종로 3가 한복판에서 자유롭게 뽀뽀할 수 있기 위하여, 머뭇거리는 애인에게 우리의 미래를 선사하기 위하여. 살아남아 은재의 이름을 따뜻하고 부드럽게 부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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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ES

다시 줍는 시

01

그녀가 내 의자를 넘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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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아름다운 세탁소에 대한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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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우리 다시 최승자부터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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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포기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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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기다림을 향하여, 친구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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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미래가 온다"

현재 글
07

보리차가 끓는 시간, 언 발이 녹는 시간, 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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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그의 비명과 나의 비명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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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그녀(들)의 가능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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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노래, 그리고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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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당신은 버려졌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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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저 눈이 녹으면 흰 빛은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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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우리를 괴롭히는 자는 처참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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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미모사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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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내 존재를 넘겨주지 않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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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엄마, 이토록 긴 글을 쓰게 만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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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풍경 사이를 가만히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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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어른의 세계를 사랑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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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청춘이라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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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투명한 슬픔의 힘으로 부르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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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마음 속 울음을 바깥 세상의 호흡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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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속절없이 우리는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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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나를 좀 이 노래에서 벗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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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여자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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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괴팍하고 사랑스러운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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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고통을 나누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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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낯선 시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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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여성의 고통은 어떻게 시가 되는가1 : 박서원과 고통으로 세계와 자신을 파멸시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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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여성의 고통은 어떻게 시가 되는가2 : 김소연과 고통으로 삶의 중심에 다가가기

30

마지막. 이소호가 이경진의 입술을 열고 말을 불러 일으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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