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살기 시작한 뒤 끊임없이 겪었던 크고 작은 인종차별에 불구하고 시간이 멈추는 일은 없어, 눈 떠 보니 2년이 지나 있었다. 네 학기가 지나는 동안 나는 수업 11개를 들었으며, 학회 세 개에서 발표를 했다. 대학원 밖의 삶도 단단하고 풍성해졌다. 이사를 한 번 했고, 연애를 두 번 끝냈으며, 요가 지도자 과정을 수료했다. 사이사이에 보스턴이 힘들다는 핑계로 한국에 자주 갔고, 십 년 넘게 알아온 가까운 친구들이 두 명이나 놀러 왔다. 음식은 여전히 맛이 없고 차별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연구에 대한 열정이 옅어지는 일도 없어, 그럭저럭 보스턴에 익숙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2018년 9월, 가을학기가 시작했다. 2016년 가을에 박사과정을 시작했으니 학기로 치면 다섯 학기 째, 연수로 치자면 박사과정 3년차가 된 것이다. 지난 편에 언급한 수업 강의를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 이 가을 학기였는데, 하필 코스웍 마지막 학기라 나는 처음으로 강의를 함과 동시에 필수 학점을 전부 이수하기 위해 세미나 두 개를 들어야 했다. 게다가 그렇게 들은 세미나가 둘 다 소설 세미나라서 매주 읽어야 하는 양이 수업 세 개 못지 않았다. 다가오는 봄 학기에 치룰 자격시험(qualifying exam) 준비도 시작해야 했는데, 교수 최소 여섯 명을 만나 어떤 책들을 시험 목록에 올릴 지 상의하고 인준을 받는 귀찮은 과정을 한 학기 내내 거쳐야 했다. 매 주 학교 라이팅 센터에서 일도 했고, 그 와중에 워라밸을 챙긴다고 요가도 다녔다. 요약하자면, 2018년 가을 학기는 내가 박사과정에 입학 한 후 가장 바쁜 학기일 예정이었다.
거기서 끝났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가을학기가 시작하기 직전, 8월 중순에 나와 절친 A는 한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발신자는 나와 A가 지도교수로 염두에 두고 보스턴에 온, 그리고 함께 독립연구까지 진행했던 L교수님이었다.
숙희와 A에게.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 지 모르겠구나. 나는 다음 학기부터 이 학교를 떠나 다른 학교에 가게 되었어. 오퍼를 받은 것은 5월인데, 최종 결정을 내린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너희에게 먼저 얘기하고 싶었어. 공식적인 발표가 있기 전까지는 주위에 얘기하지 말도록 해. 조만간 만나서 의논을 하도록 하자.
처음 이메일을 열어 글자를 읽고 마침내 그 내용까지 이해했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어느새 정신 차려 보니 나는 침대에서 몸을 말고 울고 있었다. 유학생활 내내 서로를 지켜왔던 친구들에게 겨우 문자를 했던 것도 같다. 그 와중에 부모님을 걱정시키기 싫어서, 부모님이 불가피하게 꺼낼 질문들("그럼 이제 어떻게 하니?")에 대한 답을 나조차 알 수가 없고 생각하기 싫어서, 부모님에게는 바로 연락하지도 못했다. A가 나에게 문자를 하기까지 나는 한참을 가만히 누워있었다.
게다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앞선 봄학기 초에 나와 A가 의지하고 있던 흑인 여자 교수님 C 또한 자신이 우리 학교를 떠나 다른 학교로 갈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C교수님은 5월에 봄 학기가 끝나자마자 보스턴을 떠났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없던 L교수님도 학교를 떠난다고 한 것이다. 그럼 나나 A는 누굴 지도교수님으로 하지? 세 명으로 이루어지는 박사논문 위원회는 지도교수를 포함해 교수 최소 두 명이 우리 학교 소속이여야 했는데 (남은 한명은 외부의 학교에 재직 중인 교수여도 상관없었다) 우리는 당장 우리가 속한 학교에서 함께 논문을 쓸 만한 교수가 없다시피 했다.
처음에는 울었지만
직접 L교수님을 만나는 날까지도 나는 얼떨떨 하기만 했다. 길 가다 크게 넘어져 생각보다 큰 충격에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 있는 기분이었다. 함께 만난 A는 생각보다 멀쩡했고, 패닉에 빠진 나를 달랬다. L교수님이 너무 바빠 우리는 강의실 밖에 서서 소리를 죽인 채 10분 밖에 얘기를 나누지 못했는데, 교수님은 우리에게 지금 있는 곳에서 석사학위만 받고, 다른 학교로 옮기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말이 “옮긴다”지, 인문학의 경우 박사과정을 옮기다는 것은 사실 학교를 하나 관두고 새로 지원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박사과정을 반쯤 수료한 우리는 코스웍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학교측에서는 박사과정 수료 중에 학교를 떠나면 석사학위는 주지 않는다고 얘기했었다. 나나 A 모두 내켜 하지 않았기에 교수님과의 만남은 그렇게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그 뒤로 집에 돌아와 또 한참을 울었다. 그런데 문득,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시간이 지나며 익숙함을 안락함이라고 착각했을 뿐이다. 보스턴도 학교도 내게 한없이 폭력적인 공간이었고,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 한 명 떠난다는 것만으로 그 안락함은 순식간에 무너질 만큼 부질없는 것이었다. 학교에 남으면 나는 자발적으로 그 폭력 속에 남기를 선택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L교수님께 다시 이메일을 썼다. 생각할수록 교수님의 말이 맞는 것 같은데, 한 번만 더 만나 달라고. 교수님은 이번에는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조금 더 길게 만나자고 했고, 나는 그 만남에 A도 끌고 갔다.
우리가 미처 체감을 못했을 뿐, 대학원생에게 지도교수는 단순히 논문을 지도하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다른 학자들을 소개하며 네트워킹을 도와주고, 논문을 쓰거나 연구비 지원을 받을 기회가 있으면 연결해주고, 나중에 직업 시장에 나갈 때 수없이 많은 추천서를, 학생이 자리잡을 때까지 최소 10년은 써주는 긴밀한 관계의 사람이다. 그런데 보스턴에 남아 이도 저도 아닌 지도교수와, 우리에게 관심조차 없는 교수들로(모두가 우리 둘 다 L교수님과 일하기 위해 보스턴에 왔다는 것을 알았는데, L교수님이 떠난다는 것이 공식화 되었을 때 너네 괜찮냐고 연락을 한 교수는 단 한 명에 불과했다) 논문 위원회를 꾸리면 논문 뿐만이 아니라 박사과정 졸업 후의 앞날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이 명백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여기에 남아 아시안 디아스포라 문학에 대해 논문을 쓸 경우 학계의 누구도 너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이 학교에 그 분야 연구를 하는 사람이 전무하다시피 한 것을 모두가 아니까.
우리가 학교에서 2년 간 방치당하면서, 생각보다 지도교수의 중요성이나 학계의 원리에 무지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L교수님이 찬찬히 설명했다. 우리 둘 다 학교에서 하루하루 살아남기에 급급해 큰 그림을 그릴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어렴풋이 짐작만 했던 것을 확인 받자니 오히려 확신이 섰다. 나도, A도, 떠나야 했다.
떠나야 한다
나는 교수님께 제발 도와달라고 했다. 교수님은 알겠다고 했다. 면담을 마치고 나오는데, 나보다 침착하다고 생각했던 A의 얼굴이 오히려 하얗게 질려 있었다. 교수님들이 떠나는 것이 이렇게까지 우리의 커리어에 영향을 미칠 줄 몰랐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패닉에 빠진 A를 달랠 차례였다. 그 다음 날 우리는 L교수님께 또 하나의 메일을 받았다.
숙희와 A에게. 너희가 좋은 결정을 내려 기뻐. 영문과를 통하지 않고 행정담당자를 통해 비밀리에 알아보니 박사학위 도중에 떠나도 학점을 전부 이수하고, 외국어 시험을 하나 통과했다면 얼마든지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다고 해.
L교수님은 행동력도 빨랐다. 교수님이 행정담당자까지 개인적으로 연락할 정도로 우리가 학교를 떠나길 바란다는 것도 명백했다. 그만큼 답이 없는 학교라면, 떠나는 것 외에 수가 있겠는가. 우리 둘 모두 그 메일을 받자마자 결정을 확고히 했다. 다시 박사과정에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문제는 확고한 의지로는 어떻게 되지 않는 현실이었다. 점점 없어지는 추세라지만, 여전히 많은 대학원들이 GRE시험 점수를 요구한다. 이 GRE시험은 독해, 수학, 작문 3 개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대학원 유학 준비를 하는 사람은 피해 가기 어려운 관문이다. 한 번 치른 시험은 점수가 5년 간 보관된다. 문제는 지나치게 성실한 학부생이었던 내가 학부 졸업도 전에 GRE시험을 쳐서 점수를 만들어 뒀다는 것이다. 유학 3년차, 내 점수는 이미 말소된 지 오래였다.
분야마다 차이가 조금 있을 뿐, 보통 여름 동안 GRE점수를 내고, 가을에 자기소개서와 라이팅 샘플이나 포트폴리오 등을 마무리 지어 11월~12월 사이에 박사과정에 지원한다. 그런데 이미 9월초였다. 나는 당장 준비없이 시험을 쳐서 2018년 말에 지원을 할 지, 1년을 기다리며 시험점수를 만들어 2019년 말에 지원을 해야할지 정해야 했다(L교수님은 추천서는 얼마든지 써줄테니 늦게라도 꼭 지원을 하라고 강조했다). 가장 빨리 칠 수 있는 시험이 9월말, 10월초여서, 준비할 시간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시험 신청을 했다가 덜컥 겁이 나 시험을 취소하는 뻘짓도 할 정도로 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GRE시험 점수를 요구하는 미국의 많은 대학원들은 통상적으로 “점수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원자의 모든 특성을 고려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행정 직원이 아무리 그렇게 말해봤자 입학사정 위원회의 교수들은 생각보다 보수적이고, 무수히 많은 지원자들 사이에서 학생을 거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수치화된 점수를 보는 것이다. 영어가 제1언어가 아닌 사람, 시험을 여러 번 볼 돈이 없는 사람에게 한 없이 불리한 체제다. 낮은 점수가 나온다면, 이미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내가 고생해서 지원하는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떠나기로 마음 먹고 나니 내 현재가 얼마나 불행한지, 내가 매일 겪는 인종차별이 얼마나 지독한 지, 내가 얼마나 그런 것이 둔감해졌는지가 선명해졌다. 나는 결국 한 번 치르는 데에 200달러가 넘는 GRE를 울면서 신청했다. 운전하지 않고 갈 수 있는 시험장에서 시험을 치르려면 평일에 가야 해서, 수업도 빼먹었다. 대학원을 헛다닌 것은 아니었는지, 다행히 만족할 만한 점수가 나왔다.
탈출
그 학기 내내 너무 바빠서 나는 지금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당시에는 우울증을 느낄 새도 없이 바쁜 나날이었는데, 그 여파를 뒤늦게 겪는 것 같다. 수업을 듣고, 강의를 하고, 일을 하는 와중에 자기소개서를 써야했다. 영문학의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라이팅 샘플인데, 학교에 따라 짧게는 12장, 길게는 25장짜리를 요구하기 때문에 에세이도 써야했다. 이 에세이는 보통 자신이 연구할 분야에 대해 쓴다. 보통은 수업을 위해 썼던 기말페이퍼를 다듬어 제출하는데, 나나 A나의 경우 L교수님과의 독립연구에서 썼던 기말페이퍼가 유일하게 우리의 학문분야, 아시안 디아스포라 문학에 대해 쓴 것이었다. 우리의 백인 동기들이 저널 투고를 위해 페이퍼를 가다듬는 사이, 우리는 박사과정에 다시 지원하기 위해 페이퍼를 고쳐 썼다.
더구나 이 모든 것을 비밀리에 해야 했다. 다른 박사과정에 지원해도 합격한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학교에 남을 경우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런 만큼 결과가 발표 될 2019년 봄까지는 학교에 남아있는 사람들, 특히 교수님들과의 관계를 그르칠 수 없었다. 학교를 떠나려 했던 학생을 예쁘게 볼 교수가 얼마나 많겠는가. 나와 A는 점점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지원 준비를 하는 데에 익숙해졌다.
다행히 학교를 떠난 C교수님이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흔쾌히 약속했다. C교수님도, L교수님도 유명한 학자라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아무리 공명정대한 척해도 학계는 지연이 중요하다. L교수님은 우리를 적극적으로 도왔는데, 우리가 지원할 학교에 재직 중인 교수님에게 이메일을 통해 소개를 해주기도 하고, 어떤 학생들을 선호하는 지 물어보기도 했다. 비록 학교를 떠나기 위해서였지만, 무언가를 하면서 교수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것이 처음이었다. 나와 A는 크게 감동 받았지만, 동시에 구조적인 지지를 받는 백인들은 늘 이런 기분인거냐고 씁쓸한 농담을 하기도 했다.
나와 A는 연구하는 분야가 같고, 문학을 읽으며 인용하는 학자도 비슷하다. 그래서 학교의 백인들은 종종 우리를 한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사이로 오해하고는 했다. 마지 그러기를 부추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단 한번도 서로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일이 없었다. 서로 겹치지 않도록 나는 동부에, A는 서부의 학교에 지원하기로 했고, 우리는 서로의 라이팅 샘플과 자기소개서를 두세 시간씩 첨삭해주었다. 그 때의 경험 덕분에 우리는 외려 누구보다 가까워졌고, 지금도 서로의 연구를 돕는다. 먼저 졸업을 해서 학교 탈출에 성공한 친구 F는 내가 너무 바빠 요리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반찬통 가득 저녁 거리를 담아주기도 했다. L과 C교수님, 그리고 A와 F같은 여자들이 없었다면 나는 몇 번이고 포기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2019년 2월, 나는 가장 가고 싶었던 학교에서, 가장 만나고 싶었던 교수님에게 개인적인 연락을 받았다. 합격이었다. 보스턴 탈출이 현실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