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중립적'이고 ’과학적'일 뿐 아니라 ’평등'하고 ’혁신'적이며 열려있다는 이공업계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삶을 세션에서 자세히 들여다 본 후, <여성과 일: 일터에서 평등을 찾다>를 바탕으로 한국에서 여성들은 어떤 노동환경에 처해있는지 살펴보았다.
2차적 노동자
책에서는 먼저 ‘노동'과 ‘노동자'의 정의 자체를 되짚는다. ‘이상적인 노동자'의 기준이 이미 ‘남성 노동자’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언제라도 회사의 필요에 따라 노동을 할 수 있는 시간적/공간적으로 자유로운 노동자, 아이나 노인을 돌볼 책임도 없이 하루 8시간 이상 일을 할 수 있는 노동자를 ‘이상적인 노동자'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규범에 따르면 임신과 출산을 하고 출산휴가를 필요로 하는 여성은 주변화될 수밖에 없다. 남성이 임금노동을 수행하고 여성 이 가정과 돌봄노동을 전담하는 근대적 젠더 체제는 남녀 의 불평등한 역할 분담을 전제한다.
이처럼 돌봄노동을 할 필요 없는 사람이 근대적 ‘노동자'의 전제 조건이다. 그런데 여성은 돌봄노동도 요구받기 때문에 '이상적인 노동자'의 기준에 다다르기 자연스레 힘들어진다. 근대 산업사회에서 만들어진 낡은 노동자 개념이 그대로 이어지며 문제는 지속된다.
‘2차적 노동자'라는 개념도 여성 노동자의 위치를 설명하는 데 적절한 개념이다. 첫 주 세션에서 ’청년 담론에도 여성 청년의 이야기는 없다', ‘남성 청년 기준으로 모든 문제들이 재편된다'는 이야기, 청년 문제에 여성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들이 나왔는데, 여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불안정 노동자이자 잉여 인력인 '2차적 노동자'로 구분돼 왔다.
“2차적 노동자란 노동시장에 지속적으로 머무는 노동자와 구분하여 부르는 명칭이다.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시장에 잉여적인 존재이며 경기 변동에 따라 민감하게 조절되는 집단이라는 것이다(이재인, 1998).”
“과거 서구 사회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경기가 불황일 때 가계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노동시장에 진출 했다가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거나, 경기가 호황일 때 늘 어나는 일자리를 메우기 위해 노동시장에 진출했다가 불황이면 노동시장을 떠나는 경향이 있었다.“
통계와 법률로 살펴보기
한국의 성별 임금격차는 생산성이나 직무 관련 요인 등의 합리적 요인이 아닌 ‘연령이나 성역할 고정관념에 의한 불합리한 요인의 영향’이 매우 크다. 한국 여성들의 임금은 남성의 60% 밖에 되지 않아 OECD 국가 중 최하위라는 점은 수많은 기사를 통해 유명해 진 사실이지만 명백한 임금 차별, 저임금 그리고 불안정 노동에 여성들이 더 많이 노출되어 있는 현실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2013년 세계경제포럼에서 발표한 통계에서 한국 여성의 지위는 136개국 중 111위고, 고용 부문에서 성별 격차는 가장 크다. OECD 보고서 역시 성별 임금격차가 가장 큰 국가로 한국을 지목했다. 2010년 기준 OECD 28개국 평균 임금격차는 15.8%고, 한국은 36.1%다. 2009년 이후 여성 대학 진학률이 남성 대학 진학률보다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근속 년수는 늘어나지 않았고, 비정규직 일자리와 중소기업에 집중되어 있는 취업 분포 역시 개선 되지 않았다. 이처럼 여성들의 학력 신장효과가 크게 상쇄되고 임금격차가 축소되지 않는 이유는 IMF 이후 여성에게 제공되는 일자리의 질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6공화국 시절에 이미 여성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안은 만들어져 있었다.
<1987년 제6공화국 헌법>
“여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고용/임금 및 근로조건에 있어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또한, 남녀고용평등법이 만들어지고 여성단체들의 법 개정 노력에 따라 계속해서 법안이 수정되어 온 역사가 있지만 이 역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2010년 <남녀고용평등법> 제2조를 보면 여전히 차별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기대고 있는 것은 ‘합리성'인데, 특히나 성차별적 관념과 관행히 광범위하게 작동하는 사회에서 이는 더욱 모호하게 적용된다. 그 외에도 직접차별만 규제할 뿐 눈에 보이지 않는 간접 차별은 규제할 수 없다는 문제도 있다.
직접차별과 간접차별
IMF 경제 위기 후 많은 여성 노동자들은 가부장적 문화가 지배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직접적인 성별을 이유로 한 차 별보다는 임시직 내지는 일용직 등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직군이 다르다는 이유로, 맞벌이 부부 사원이라는 이유로 불리한 대우를 받았다.
그래서 여성단체들은 근본적인 요인인 사회적 편견과 통념을 단순히 직접차별 규제 법안으로는 변화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해 남녀고용평등법에 간접차별 개념 도입을 제안한다. 간접차별은 ‘표면상 남녀에게 동일한 기준이 적용되나 그 기준이 특정한 성별에게 불이익을 초래하거나 결과적으로 불평등한 효과를 발생시킨 경우를 지칭’한다. 현행 남녀고용평등법 상의 간접차별에 관한 안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는 군 복무 가산제, 평균 신장 규제 등이 해당되며, 그 외에도 ‘교육, 배치, 승진에서의 차별'이 포함된다.
실제로, 이제는 공식적으로 여성이라는 것을 이유로 승진에서 탈락시키는 경우는 많이 사라졌다. 다만 근무 성적, 인사고과 등 승진과 관련해서 성별 을 이유로 불공정하게 평가하기도 하며, 일정 직위 이상으로의 여성 승진을 제한하거나 승진 서열상 남성을 우선시하는 관행은 여전히 암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교육, 배치, 승진에서의 차별은 직접적인 문제가 되기보다는 성차별적 모집/채용, 배치, 승진, 임금에 이르는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차별이 정년 차별이나 성차별적 해고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여성들은 회사 내의 주요 결정직에 도달하기가 어렵게 되며, 여성 임원이 없는 기업 상황 속에서 여성들을 위한 고용 정책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조사(2014)에 의하면, 기업들은 여성관리자/임원 확대 계획에 대해서 ‘늘리겠다'가 17.7%에 그쳤고, 81.1%의 기업이 ‘현재 수준을 유지하겠다'고 밝혀 여성 승진의 미래는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남성중심적 조직 문화와 여성
책은 모임에서도 많이 다루었던 문화 부분인 문화의 문제도 자세히 다루고 있다. 특히, 조직이 여성성을 어떻게 정의하는지가 여성 노동자들이 일을 하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조직 문화가 여성적인 것을 체계적으로 평가절하하는 성별 체계에 기초를 두고 있다면, 성평등을 촉진하는 조치가 도입되더 라도 그것이 본래 의도한 효과를 거두기가 어렵다. … 조직이란 사회적 성 gender을 생산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조직은 성원 자격, 일상적 권리, 권위의 행사, 공정성의 규칙 등 구성원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정의를 둘러싸고 다양한 성원 들의 해석과 이해관계가 만나 부딪치는 공간이다. 조직은 노동과 보수의 지급이라는 경제적 교환뿐만 아니라 정체성의 자원 들, 사회적 지위와 위신 등 개인에게 필요한 사회/문화적 자원과 그에 대한 접근 기회를 제공한다. 다시 말해 조직 내 여성의 위치는 공식적/제도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비공식적/문화적인 차원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회사'가 단순히 생계를 유지 하는 데에 필요한 임금과 노동력의 교환만 일어나는 곳이 아닌, 문화를 생산하고 개인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는 곳이기 때문에 이런 성별 문제에 더욱 민감해져야 한다는 지적은 날이 갈수록 그 무게를 더한다.
“여성의 일에 대한 평가절하는 여성들이 수행하는 일 자체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그 일이 수행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Kemp,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