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북클럽&살롱 : 9-2. 페미니스트 정당 창당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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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북클럽&살롱 : 9-2. 페미니스트 정당 창당기(2)

주연

4. 구드룬
다음 세대와의 연대는 이렇게

F!의 창당 과정 초기에 젊은 여성들의 활동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많은 참가자들이 공통으로 여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꼈다. H는 얼마 전 개봉했던 영화 <서프러제트>의 장면을 떠올렸다.

“메릴 스트립이 분했던 수장 격 인물, 팽크허스트가 떠올랐다. 당시에 보면서 계속 의문이 들고 화도 났다. 왜 팽크허스트는 온갖 경호를 받으며 다니고, 정작 경마장에 뛰어들어 죽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인지. 운동에서 상징적인 인물이거나, 문화자본이 풍부하거나, 구드룬처럼 정당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운동에서도 좀 더 편안한 위치를 점한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한국으로 되돌아 와 생각해보면, 1세대 시니어 페미니스트, 90년대에 등장한 ‘영페미니스트'들, 그리고 2015-16년에 등장한 ‘영영페미', ‘넷페미', ‘헬페미'들은 윗세대와의 연대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작년과 올해 등장한 영영 페미니스트들의 가장 큰 특징은 페미니즘을 접하거나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된 계기가 대체로 ‘온라인 공간’이라는 점이다. 온라인은 젊은 페미니스트들에게 현장인 동시에 무기다. 온라인 공간은 성차별/성폭력을 경험하는 새로운 시공간이며, 운동을 이어나갈 수 있는 강력한 기반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2030 페미니스트들과 윗세대 페미니스트들 간에는 상당한 세대 격차가 있다. 그렇기에 한국의 페미니스트 세대들 사이에 특별한 연결고리를 만든다는 것이 더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참여자들은 영화 속 구드룬 슈만을 보며 조금 다른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내 의견이 제 1안이 되지 않아도 떠나지 않는 것이 정치다." - 구드룬(F! 창당자이자 당대표)

구드룬은 F!의 공동 창립자이자 가장 ‘어른’으로, 2005년에 페미니스트 정당을 창당하는 데에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다큐멘터리에서 그는 다양한 갈등 상황 속에서 가장 의연하고 담대하게 대처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구드룬을 보면서 그런 답답한 지점들이 많이 해결됐다. … 구드룬의 역할은 운동 과정에서 생기는 수많은 문제들에 쉽게 붕괴되지 않는 방법을 아는 ‘선배'였다.”

“세대 갈등 해소가 저런 식이면 좋겠다. 꼰대질 안 하고 진짜 선배가 해야 하는 것이 저런 역할 아닐까. 선배로서 자기가 잘 아는 부분을 전달하고 도움을 주고 나면, 나머지는 사람들이 본인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들, 하고 싶은 일들을 하도록 그저 내버려두는 거다.”

참여자 O는 “정치를 ‘아는’ 사람이 있고,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구드룬은 전자이며 이렇게 정치를 ‘아는 사람’ 역시 꼭 필요하다”고 했다. 어떤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만들어 질 다양한 문제들에 대처하는 방법을 다음 세대에 가르쳐 주는 것, 그리고 그 다음은 스스로 해결해 볼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것. 그것이 곧 우리가 바라는 ‘선배 페미니스트'의 상이었다.

5. 실무자들의 이야기

“중반까지 소피아를 아무도 케어해주지 않아서 보면서 괴로웠는데, 언론 담당자가 소피아를 북돋아주는 모습을 처음 보고 너무 기뻤다. … 업무에 맞게, 맡은 역할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서로 북돋아주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선배의 역할만큼 중요한 역할을 해내는 사람들로 ‘실무자'들에 대해 이야기가 이어졌다. 실무자들은 구드룬이나 소피아처럼 겉으로 보여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보이지 않는 실무자들은 실제 업무가 돌아가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보이지 않는 일은 단순 실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라면 누군가는 ‘돌봄 노동’을 수행하게 된다.

“조직 내에서 민주적인 절차로 인해 문제가 발생되는 장면에서, ‘실무자들에게는 회의 네 시간 진행하기보다 지시를 받아가는 게 효율적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페미니스트라서 더 민주성이 엄격하게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그 과정에서 실무자들의 소진에 대해 생각해 볼 지점이 있다.”

Y는 “가치나 목표만을 중심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누군가를 후려치면서 가는 방식은 개인이 병들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했다. 여러 사람들이 대의를 위해 협력하고 조금씩 자신을 희생하는 과정에서 더 신이 나는 게 아니라 소진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는 모종의 ‘장치’에 대해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F!가 보여 준 장치는 ‘충분히 축하하기'였다.

지난 해 4월, F!(Feminist Initiative)가 증가하는 당원들의 수를 축하하고 있다. 
“영화에서 보면서 좋았던 장면이 계획한 것을 다같이 달성했을 때, ‘여기까지 정말 잘했어!’ 라고 축하하고 품는 순간들이 단계마다 보였다는 점이다. 해냈다는 걸 서로 인정하고 기쁨을 누리는 순간들이 지난한 과정 속에서 힘을 얻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

Y는 축하하는 ‘의례’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몇몇 사람에게 공이 몰리거나, 혹은 감정노동이나 돌봄의 역할이 몰리지 않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자 중요한 장치라고 했다. 무언가를 함께 이뤄냈을 때 축하하는 순간들을 과정과정마다 배치하는 것, 그 외에도 조직의 ‘성취'를 조직원 개개인이 모두 누릴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함으로써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실무자들을 격려하고 감정노동을 분산할 수 있어야 조직도 운동도 지속가능하다.

6. 제인 폰다
자기에서 시작하기

“제인 폰다 이야기 중 좋았던 건 ‘나를 위해서 왔다’는 이야기였다. 결집되는 힘이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나를 위한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인 폰다

다큐멘터리 내에서 계속해서 타인을 위해, 정당을 위해, 목표를 위해 무언가를 고민하거나 희생하는 인물들이 등장한 가운데, 제인 폰다의 등장은 새로운 맥락을 추가했다. 그는 20대에 섹스 심벌로, 30대에는 반전운동가로, 40대에는 피트니스 비디오 스타로 활동하다가 50대가 되어 페미니스트 활동가가 되었다. 이런 그의 행보는 언제든 자신이 원할 때, 자기가 필요로 할 때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그가 스웨덴에서 최초의 페미니스트 정당이 만들어진다고 하자 이를 응원하기 위해 찾아온다. 그는 여기에 온 이유가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자신이 여기에서 첫 페미니스트 정당 탄생을 위해 응원을 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걸 자기희생적으로 생각하면 너무 지쳐서 오래 못갈 것이다. 개인을 지키면서도 집단적 운동이 가능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60년대에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페미니즘 구호가 등장했다. 페미니즘이 특히 이렇게 ‘개인'을 강조한 이유를 추론해 보기란 어렵지 않다.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들이 연결되어 있고, 때로는 개인적인 경험이 곧 차별 구조를 드러낼 실마리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에 집중하는 것이 연대와 확장에 어려움을 주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오히려 역전된다. 페미니즘은 개개인의 다양성을 사회에 정박시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행복과 운동은 배타적이지 않다. 이를 실제로 함께 추구해 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제인 폰다를 통해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나'를 위해 운동하고 있다는 것, 더 행복하게 운동해도 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가며 : 새로운 물음표

영화를 통해 전에는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정당'이라는 강력한 조직적 운동의 필요성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내부의 다양한 인간상들을 보면서 우리가 실제로 정당을 만들거나 조직을 만들 때 어떤 문제와 갈등들을 맞닥트릴 수 있는 지 매우 현실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덕분에 ‘그래서, 여기 모인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튀어나오며 정치 세션의 첫 모임이 마무리 되었다. 이 질문은 서로 다르고 잘 모르는 낯선 이들이 모여있는 ‘이 자리'에 스스로 물음표를 던졌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그저 모이는 것과 그 이상으로 무언가 함께 행동을 하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함께 무언가를 해보겠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곧 그 과정에서 굳이 경험할 필요가 없는 필연적인 갈등과 희생을 감내하겠다는 무언의 다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떻게 서로를 동료로, 개인으로 인정하며 공동행동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지, 그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필수적인 질문이 스스로에게 던져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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