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북클럽 & 살롱 : 8 여성 엔지니어의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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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북클럽 & 살롱 : 8 여성 엔지니어의 한국사

주연

이공학 세션의 마지막 시간에는 <엔지니어들의 한국사>를 읽고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의 엔지니어를 둘러싼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환경들을 통시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책이자 여성 엔지니어 및 젠더 문제도 다루고 있어 세션을 마무리 하는 도서로 선정되었다.

1. 한국의 산업 발전:
박정희 시대의
국가-남성지도자 합일체

시대에 따라 ‘기술'의 의미가 달랐으리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다만 국가주도의 압축 성장을 겪은 한국에서 그 의미는 국가와 아주 긴밀히 결합해 변화했다.

“일부 학자는 어느 국가의 엔지니어들이든 공학 전문성의 발전과 그들의 정체성, 국가에 대한 기여라는 관념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전쟁이라는 이미지에 상당히 의존해 왔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엔지니어와 기술 노동자 역시 노동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군대식 문화와 관념을 접했고 이런 관념들이 환기하는 정체성은 남성적인 것이었다."

한국의 노동 현장은 유난히 군대문화, 남성적 문화 일색이다. 책에서는 산업이 급격히 성장했던 1960-1970년대에 만들어진 남성 지도자-국가-기술의 연계를 그 이유로 꼽았다.

특히 종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군인 출신의 지도자가 국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이러한 남성성과 산업 발전을 더욱 밀접하게 했다. 박정희 정권은 남성 지도자(군대)-국가의 연결을 권위 유지에 사용했고, 이러한 방식이 경제 발전을 위한 방법론에도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Y는 책을 통해 공학 분야에 남성 위주의 산업 분위기가 어디서부터 강화되었는지에 대한 힌트를 찾았다고 했다.

“일종의 단서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대 사회로 이행하던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남성 지도자 이미지를 강화한 것이 산업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되었고, 여기서부터 산업-남성 지도자 이미지가 만들어진 거다.”

“이유 없이 복종해서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문화, 까라면 까는 문화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산업 발전 자체가 군대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박태준 포항제철 창립자가 현장에 내린 지시는 지금으로선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오늘 중으로 하루의 타설량을 이유 없이 다 채워놓으라'(p 150)는 ‘명령’은 놀라운 부분이다.”

이렇게 한국의 노동 현장에서 군대식 문화와 관념은 당연한 것으로 체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여성은 당연히 배제되었다.

2. 여성 노동자는 지워지고:
산업 발전의 반쪽짜리 역사

“… 애국심을 강조하는 군사적 관념이 지배적인 상황은 특히 공학 분야에서, “군대에 다녀온 남학생을 핵심 인력으로 파악하고 여학생을 이등 시민으로 인식하는” 현상을 부채질했다."

이처럼 여성이 배제되거나 주변화 되는 현상은 산업 발전 초기부터 시작된다.

위로공단 스틸컷

1960년대 한국의 산업은 경공업 중심으로 구성되었는데, 당시 기술 노동자는 대부분 여성이었다. 국가는 이 시기를 ‘비교적 단순한 여성 기능공의 시대'라고 지칭했다. 이 시기 한국에서 기술이란 산업에 사용되는 ‘기계’를 의미했는데, 이 기계를 다룰 ‘기술공’과 ‘기술자’의 역할은 남성에게 부여되었기 때문에 여성에게는 보다 낮은 지위를 뜻하는 ‘기능공'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노동자들 가운데 가장 지위가 낮았던 이 여성들은 ‘공순이’라는 호칭으로 비하될 때가 많았고 심지어는 수출을 위한 국가적 노력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참가자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 기술-국가적 지위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p113-114)

1970년대는 반대로 ‘남성 중심의 산업 팽창기', ‘숙련된 남성 기능공의 시대'라고 명명된다. 하지만 사실상 1970년대 중반까지 총 수출액의 70%를 차지했던 건 여성 노동자들이 떠받치고 있던 제조업이었다.

한편 여성의 고교 진학률은 1970년 54%에서 1979년 90% 이상으로 급증했고, 여성의 대학 진학률 또한 1980년 대에는 22%가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학력이 높아진 여성들이 직업 기술인이 되거나 공학 관련 고등 교육을 받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1980년 공대 여학생 비율은 1% 정도로 집계된다.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다. 기업이 중화학이나 경공업 외에 보다 고급 기술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산업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일명 '여성화', 즉 어떤 분야의 사회적 위세가 한풀 꺾이거나 기존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나고 나면 그제야 여성들에게도 진출할 기회가 열리는 일이 공학계에서도 일어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성들이 주요 직책에 진출하게 된 것은 아니다. 공대를 졸업한 여성의 비율은 여전히 18% 수준이었고 공학 석사 학위자 가운데 여성의 비율은 10% 미만이었다. 20-30년이 지난 2010년대에도 공학 전공의 여성 학부생 비율은 20% 정도에 머물러 있다. 

3. 대담:
지금, 그리고 미래의 여성 엔지니어

디지털 정보 산업 사회로 이행하는 시기인 지금, 한국의 여성 노동자와 여성 기술자의 지위가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 놓여 있는지를 살펴 보는 것은 중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의 여성 기술자에게 다가올 상황에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행기의 완전 끝물이다. 그런데도 여성 노동자의 지위는 너무 변하는 게 없는 거다. 여전히 낮은 임금에 결혼하지 말라 출산하지 말라는 별의 별 헛소리를 듣는다. 이런 분위기가 한 번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코드> 다큐에서 본 깃허브 여성 노동자처럼 투쟁하지 않으면 더 힘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공학 세션에서 다루었듯 자유와 공유 가치, 혁신에 열려있는 IT 업계 역시 성차별적 문화에서 만큼은 자유롭지 않다. J는 얼마 전 이슈가 된 ‘디지털 노마드’ 역시 남성 중심적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노마드'하며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건 출산이나 육아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없는 젊은 남성들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디지털 노마드가 될 수 있을까? 출산 거부, 육아 거부해야 어느 정도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걸 생각해봐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기술 산업과 경제 체제가 언제나, 중립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효과를 주지는 않는다는 점은 자명하다. 시대적 변화가 여성의 삶에 미칠 영향을 논의하지 않는다면, 여성 기술자/노동자의 위치는 고착화될 것이다.

이러한 우려와 관련해 H는 공유 경제 영역, 특히 그 중에서도 온 디맨드(On-demand) 서비스를 예로 들었다. 온 디맨드 서비스는 현재 미국의 가장 투자가 활발한 분야다. 그런데 에어비앤비나 우버같은 온 디맨드 서비스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가사 노동과 관련된 요구를 해결하는 서비스들이다.

H는 이런 서비스들이 주로 여성이 전통적으로 도맡아왔던 가사 노동과 연관되어 있거나 저평가 되어온 자활 노동, 심부름 등을 대신 해주는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개 산책, 집 수리, 음식 배달과 같은 것들이 그 예다.

“처음에는 온 디맨드 서비스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며 오히려 젠더와 상관없이 노동에 투입되어 사회의 성역할이 깨질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진보에 대한 기대는 없다. 업무로 인해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여성들이 정규 직장을 갖기 보다는 가사 노동 다 하고 남은 시간에 이런 노동을 수행한다. ”

H는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 온 디맨드 서비스가 사회에서 전반적인 여성의 지위 향상이나 가사 노동 해방과는 관련 없이 흘러간다고 보았는데, 이런 ‘실시간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할 주요 노동자는 결국 다시 여성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면 모두에게 자유와 평등을 가져다 줄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경제 생태계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기존의 구조를 재생산하는 데 일조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가장 주변화된 계층, 불안정 노동을 할 수 밖에 없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온디맨드 서비스의 노동이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4. 마무리 하며

물론 책에서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책에 나오는 통계 자료나 간헐적인 이야기만으로 여성 엔지니어들의 노동 환경이나 어려움을 파악하기는 충분치 않다. Y는 “어쨌든 여성들이 산업 내부에 조금씩 진입해서 내부의 문화나 흐름에 변화를 준 부분도 있을 텐데, 그런 주체적인 입장에서 해석해 낸 부분이 없어서 아쉬웠다”며 여성 주체의 시각에서 산업과 기술의 변화를 읽을 수 있기를 바랐다.

여성 노동자/기술자들은 일련의 변화 속에서 주변인으로 남겨져왔다. 기술이 갖는 함의가 변하면서 이를 다루는 사람에 대한 명칭도, 인력 안에 존재하는 위계도 변해왔지만 가장 낮은 위치에 있었던 건 늘 여성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엔지니어가 가져온 관료적 정체성(1960-70), 기업에의 헌신자 (1980-90) 이미지의 영향 아래에 있다. 

이는 모두 ‘남성 지도자'와 ‘남성 노동자'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여성 엔지니어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논의는 이제야 출발선에 다다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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