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북클럽&살롱의 이공학 세션이 시작됐다.
첫 주차에는 미국의 IT 업계 내의 성차별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며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2주 차에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감상을 나누며 이/공학계열 뿐 아니라 여성들이 경험하는 전반적인 노동 문제를 짚어보았다.
이어서3-4주차에는 역사 속 여성 과학자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그들의 성과가 어떤 식으로 배제되어 왔는 지 그리고 그 원인이 지금까지 어떤 식으로 모습을 바꾸며 계속 이어져 왔는지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산업과 엔지니어들의 관계를 다룬 <엔지니어들의 한국사>라는 책을 읽고 한국의 여성 엔지니어/공학인들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며 세션을 마무리 했다.
외국의 상황과 한국의 상황, 또 지금 2030 여성들이 경험하는 현장의 상황을 다각도로 살펴보는 5주였다.
무엇이/어떻게 바뀌어야 하며, 우리는 어떤 것들을 해야 할까?
세션 첫 시간에는 다큐멘터리 <CODE: debugging the gender gap(코드: 젠더 격차 디버깅하기)>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다큐멘터리를 보기 전에는 간단하게 최근 다양성 문제에 관심이 많은 실리콘 밸리 이야기로 시작했다. 실리콘 밸리의 테크 기업들이 만드는 다양성 보고서 자료들을 위주로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뒤에는 참여자들이 열띤 분위기에서 문제의식을 공유해주었다.
선언이 차별을 없애지는 못한다
<CODE: debugging the gender gap(코드: 젠더 격차 디버깅하기)>는 시작하자마자 이런 말이 가장 먼저 나온다.
2020년이 되면 컴퓨터 관련 업계에 140만 개의 일자리가 생겨납니다. 미국인은 그 중 29%만을 차지하게 될 것이고, 그 중에서도 3%만을 미국인 여성들이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일을 훌륭하게 해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요. 만약 당신이 테크 업계에서 일하는 여성이라면요.
8월 초, 애플이 ‘성.인종별 보수 격차를 없앴다’고 선언했다. ‘없앤다'가 아닌 ’없앴다'라는 말에서 그들의 자신감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그래?’라는 의심이 드는 게 사실이다.
구글, 애플과 같은 거대 테크 기업들은 매년 다양성 보고서를 내며 회사 내 젠더, 인종 다양성을 반영한 데이터를 공개하고 격차를 없애기 위한 본인들의 노력을 역설해왔다. 하지만 이 다양성 보고서를 살펴보면 “여전히 갈 길이 먼데??? 띠용!?”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구글 다양성 보고서를 살펴보면, 전체 직원 중 여성 비율은 간신히 30%를 넘기고 있다. 인종 구성을 살펴보면 약 2/3가 백인, 남은 1/3 가량이 아시안이고 히스패닉, 흑인은 2-3%를 맴도는 수준이다. 결과적으로 ‘백인 남성’ 위주로 회사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만 다시 확인하게 될 뿐이다. 물론 전체 통계는 그나마 나은 수준으로, ‘Tech’로 탭을 옮겨 기술직 통계를 보면 여성 비율은 20%도 채 안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처럼 테크 분야의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는 것만 확실히 볼 수 있다. 물론 테크 직무가 아닌 경우(‘Non-tech’)에도 여전히 남성 비율이 더 높으며 고위직(‘Leadership’)의 여성 비율은 전체의 1/4도 채 되지 않는다.
‘임금 격차를 없앴다’고 선언한 애플 역시 다양성 보고서에 나타난 여성 비율은 아직 30%대에 머물러 있고 인종 다양성도 구글 보다 아주 조금 더 나은 수준이다.
이쯤 되면 실리콘 벨리가 다양성 보고서를 내며 ’우리 노력하고 있다!’며 자위하고 있는 건 아닌지, 또 이걸 보고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입장은 다시, ’백인 남성’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색 인종 여성으로서 이 다양성 보고서를 보며 드는 생각이란, 그들의 ’다양성'은 딱히 자랑할 만한 상황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장 혁신적이고 진보적이라는 실리콘 밸리에서도 여전히 임금격차와 성차별 문제 등을 쉽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업계에 종사하는 많은 여성들이 실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얼마 전에는 페이스북 트렌딩 팀에서 일하던 한 여성이 팀 내의 성차별적인 문화에 대해 가디언지에 익명으로 기고를 해 이슈가 되기도 했다.
기고문에는 동일한 문제 제기나 같은 성과에 대해서도 여성인지 남성인지에 따라 다르게 대우 받았다는 등의 에피소드들이 반복적으로 나오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여성 직원들이 점점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면서 곧 조직 내에 여성의 목소리가 삭제되는 상황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여성들의 노동 방식, 태도 등에는 회사 생활을 하며 경험하는 일들을 둘러싼 다양한 젠더 요인들이 얽혀있다는 사실을 읽어낼 수 있다.
젠더 격차 디버깅하기
<CODE: debugging the gender gap(코드: 젠더 격차 디버깅하기)>는 미국 테크 기업 내 불평등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작년에 개봉했고 북미 등지에서 공동체 상영이 계속 이어지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다분히 미국적 상황에 맞춰져 있지만 테크 업계 내의 성차별 문제를 꼬집고, 역사 속 위대한 여성 컴퓨터공학/과학자들을 다루며, 테크 교육에서의 성차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다큐멘터리는 IT업계 내의 성차별을 만들어낸 다양한 원인을 조명한다. 가장 먼저 ‘업계종사자 수의 부족’, 이어서 ‘롤모델의 부족’을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로 여성들이 ‘공학 교육을 받기 어려운 환경’과 관련한 사실들을 알려준다. 그 외에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여성은 수학을 못해'라는 편견에 시달리거나 이공계열 과목에 재능이 있더라도 ‘이상한geeky 여자애'로 낙인찍히고 남학생만으로 꽉 찬 강의실에서 교사나 교수로부터 ’포기하라'는 말을 들으며 공부하게 된다는 환경의 악영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 ‘Mean Girls’에 나오는 전형적인 geeky한 남학생들과 그 사이의 여학생)
다큐멘터리는 많은 시간을 할애해 ‘이미지'의 정치가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는 지를 강조하는데, 특히 매체에서 ‘너드'하고 ‘긱'한 남성들을 프로그래머의 전형으로 묘사한다는 문제를 보여준다. 또 청소년 여성의 경우 ‘귀엽고 멍청한 여자애(cute girl)'와 ‘똑똑하지만 매력이 떨어지는 여자애(smart girl)' 사이에서 계속 본인의 능력을 평가절하하거나 과소평가 하게 된다는 점도 지적한다.
힘들게 원하는 학과에 혹은 회사에 들어가서도 남성들끼리만 모여 과제를 한다든지, 여성을 대상화하거나 배제하는 문화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자유롭게 펼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은 이 외에도 많다.
다만 이런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에서도 볼 수 있듯, 테크 업계 내에서 많은 여성들이 문제해결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례도 나온다. 세계적인 오픈소스 플랫폼 깃허브의 첫 여성 개발자였던 호바스는 2012년 입사한 이후 계속해서 깃허브 내부의 성차별적 문제에 대해서 지적하고 공론화했지만 결국 변화는 없었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문제제기를 한 뒤 2014년 3월 사직의사를 밝히게 된다. 그리고 이후 수많은 2차 가해들을 경험해야 했다.
이렇게 그녀가 문제를 공론화 한 덕분에 깃허브에서는 성차별 문제를 조심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다양성 보고서 페이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실리콘 밸리 전체에 성차별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 외에도 개발자 트레이스 추(Tracy Chou)는 2013년도부터 미국 내 모든 테크 기업 내 여성 직원 수를 구글 시트에 기록하고 업데이트 하는 등 시도를 하고 있다.
한국은?
이처럼 다큐멘터리는 중요한 이야기들을 던지고 있지만, 주로 미국 상황 위주로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테크 업계는 어떠한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이 이뤄지고 있나? 적어도 문제가 가시화되기는 하나?
어떤 분야에서나 여성 노동자들은 미숙련 반복노동에 쉽게 노출되는 경향이 있고 저임금을 받으며, 발언권을 제한당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는 이공학계열의 여성들이 진출하는 분야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출산과 함께 매우 쉽게 경력 단절을 겪는 직업이며, 단순 작업을 반복하는 ‘코더(coder)’로만 배치되기 쉽고, 따라서 논의에서 배제되는 경험 또한 잦다. 프로그래머로 성장하고 싶지만 이야기를 함께 나눌 여성들도 부족하고, 디버깅(debugging: 실수를 바로 잡는 단순반복적인 작업)만 하다 보니 프로그래머로 성장하고 싶어도 쉽지 않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기존의 산업 사회보다 비교적 더 자유롭고, 열려 있으며 평등하다고 일컬어지는 디지털 시대로의, 정보기술 노동으로의 이행이 과연 여성노동자들에게도 같은 자유, 평등을 가져다 줄지 의문이 생긴다. 오히려 지금의 문제가 비슷하게 유지되거나 혹은 더 공고해 질 수 있으리라는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참여자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노동자, 연구자로서 자신의 경험들을 기반으로 문제의식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뒤 이어진 세션에서 나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몇 가지 발췌해 보았다. 앞으로 이어지는 글에서 맥락과 함께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나갈 예정이다.
“진짜 남성중심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어도 겉으로는 전부 엄청 혁신적이고 수평적이라고들 해요. (웃음) ‘아 이 정돈 해야지’, ‘네가 지금 왜 가’라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죠. 그 “이 정도”가 굉장히 누군가의 기준에 맞춰져 있고 성차별적gender biased라는 걸 아예 생각 못해요. ‘일하는 건 원래 이런 거’죠.(웃음)”
“고3 때 ‘화공과로 진학하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저희 담임 선생님이 상담 중에 그런 이야길 했어요. ‘여자애가 화공약품 사이에서 뭘 하겠냐’, ‘간호대 가는 거 어떠냐’. … 상담하면서 엄마아빠를 끌어오고 그러는 거에요. ‘너희 엄마아빠 고생하시는데 네가 화공과를 가서~’... 그런데 옆에 가만히 듣고 있던 연구실 학생이 ‘너 발 묶고 너 가지 말라고 때린 것도 아니고, 그 말이 어떻게 차별일 수 있냐’는 거에요. 그 얘길 듣고 거기서는 이야기가 더 진행이 안 되겠구나 싶어서 포기했어요.”
“IT 업계 직장인 익명 어플이 있는데, 평소 분위기가 너무 별로에요. ... 여느 남초 커뮤니티 - 남고나 남초 공대 같은 데서 나올 법한 이야기들이 주로 올라오고요. 아침에 딱 들어가면 ‘설현 타임’이라고 하면서 게시물 쫙- 올라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