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페미니스트 선구자
이번엔 대만에 이어서 인도네시아와 방글라데시의 전근대 페미니스트 여성, 라덴 아정 카르티니와 베굼 로케야를 살펴본다.
카르티니와 베굼 로케야, 이 두 사람은 각각 인도네시아와 방글라데시에서 나고 자랐지만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비슷한 삶을 살았다. 두 페미니스트 여성의 탄생일은 국경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인도네시아에서는 카르티니 날이 되면 여성들끼리 ‘카르티니 날입니다, 우리 페미니스트로서 열심히 싸워요!’ 라는 내용의 문자를 주고 받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베굼 로케야의 날 역시 방글라데시의 페미니스트들이 행진과 축제를 벌인다.
국가의 영웅national hero로 한 여성이 인정받는다는 거다. 무슬림이 대다수인 국가인데 말이다. 반면 한국에서 위인으로 인정하는 여성은 유관순 정도이지 않나? 신사임당은 현모양처 이미지로 소비되었고. 한국 근대의 페미니스트 인물을 떠올리는 것 역시 쉽지 않다. 나혜석 정도일까?
중산층 페미니즘도 한국보다 더 강한 편이다. 한국으로 유학 온 인도네시아 친구들은 ‘한국 여성들이 이렇게 억압받으며 힘들게 사는지 몰랐다’고 이야기한다. 외모나 가사 등 억압이 너무 크다고 보는 친구들이 많았다.
전근대 동남아시아에서 여성의 지위는 낮지 않았고, 여성은 오히려 경제활동에 적극 관여하며 상당한 힘을 행사했다. 필리핀의 경우에도 전통적으로 가족 내 어머니의 권한이 세다. 또, 여성 대통령도 몇 번 선출됐다. 때문에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의 사회활동에 갖는 반감이 적은 편이다.
다른 곳에서 비슷한 삶을 산 페미니스트: 카르티니와 로케아
카르티니는 1879년에 동인도 자바에서 귀족의 딸로 태어났다. 카르티니는 아버지와 남편이 여성 교육의 가치를 이해하는 사람들이었기에 네덜란드의 식민 통치를 받는 동안에도 공부를 할 수 있었다. 12살 이후로는 관습(하렘)대로 집안에만 머물러야 했는데, 이 격리 시기 동안 그는 알고 지내던 여러 네덜란드인들과 서한을 주고 받았고, 이 서신들은 문학적인 가치와 함께 당시의 정황을 생생히 보여주는 귀한 자료로 여겨진다. 이 서신들은 그의 사후인 1921년에 네덜란드에서 책으로 출간되었다.
네덜란드에서 이 책이 처음 처음 발간되었을 때의 제목은 <어둠에서 빛으로> 였다고 한다. 이는 ‘동인도 여성이 어둠(식민지, 가부장제)에 갇혀있다’는 뜻으로 식민 제국의 언어가 식민지 여성의 어둠을 밝히게 되는 모순을 돌아보게 한다.
카르티니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원주민 여성 교육기관을 설립했으며, 여전히 인도네시아 최초의 여성운동가로 그의 생일인 4월 21일이 카르티니의 날(국경일)로 지정되어 기려지고 있다.
로케야는 카르티니와 비슷한 시기인 1880년에 벵갈에서 태어났다. 벵갈은 켈커타 끄트머리에 있는 지역으로 당시 벵갈 무슬림은 아랍어, 페르시아어를 교육받았다. 로케야 역시 오빠의 지원으로 모국어 벵갈어와 영어를 배울 수 있었다. 후에 그는 남편의 유산으로 무슬림 여성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재밌는 사실로는 그가 1905년도에 이미 페미니스트 SF 단편을 썼다는 점이었다.
힘 센 아시아의 여성운동, 우리에겐 여전히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
두 여성을 공부한 참여자들은 다음과 같은 소회를 나누었다.
아시아의 여성운동이 오히려 ‘생각보다 덜 우울하다’ 라는 걸 느낀다. 힘센 선구자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신이 난다.
남자들이 만들어놓은 운동판에서 여자들이 자기 자리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의 가장 큰 버전이 민족, 민족국가라는 판일 텐데, 여기에서도 여성의 자리가 잘 없다. 식민지때부터 끊임없이 제국/민족과의 관계 사이에서 협상할 수밖에 없다.
특히, ‘여성의 언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언어’가 중요한 키워드다. 언어가 다양했던 인도네시아에서 엘리트 여성들에게는 제국의 언어가 ‘빛'이 될 수밖에 없는 부분을 과연 비판만 할 수 있을까?
20세기 초, 어떤 언어를 채택해야할 것인지 자바어, 네덜란드어, (새롭게 만들어진)인도네시아어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섰던 동인도의 지식인들 중 민족주의자 남성지식인들은 손쉽게 인도네시아어를 채택한다. 하지만 여전히 ‘어둠’ 속에 있던 여성들에게는 제국의 언어인 네덜란드어가 그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언어이기도 했다. ‘갈색 남자들에게서 갈색 여자들을 구하기 'saving brown women from brown men’라는 모순인 거다.
한국과 일본의 페미니스트 학자가 주고받은 서신을 묶은 <경계에서 말하다>라는 책을 보면 ‘여성은 바이링구얼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성들은 늘 주류 언어로 자신의 경험을 전부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식민 역사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언어의 문제도 단순히 민족적 ‘박탈'이 아닌 새로운 해석도 가능해진다. 어쩌면 여성들에게는 새로운 언어가 생기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온전한 ‘나의 언어', ‘우리의 언어'에 대한 갈망은 쉽게 저버릴 수 없다. 동아시아의 유교문화권 여성이 비서구 맥락에서 선택적으로 서구 페미니즘을 차용할 때 피할 수 없는 간극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데에 있어 내게 도움이 되었던 것들은 항상 영어로 된 것들이나 그게 번역되어 온 것들이었다. 어쩌면 나부터 가장 강한 국가가 중심을 잡아주는 데에 약간 기대고 싶었다는 정서가 있었는데, 이번에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결국엔 내 삶이 다 표현이 안 되는 부분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페미니즘은 삶을 해석해내는 다른 언어인데, 노출되어있는 것들이 늘 서구 페미니즘 자료들인거다. 아시아의 이야기들을 많이 노출 하는 것부터가 필요하다. 이대생 이야기도 계속하고, 기록도 많이 남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를 계속해서 전유해 오는 데에 의미가 없지는 않다. 일종의 공통점이 분명 있다. 남성중심적 언어보다는 우리에 훨씬 가까우니까.
이어 아버지나 남편이 허락해야 할 수 있었던 운동, 공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여기에 대해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여성 각각의 삶을 좀 더 세심하게 이해하면서 가혹한 평가를 지양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완벽한 지침과 모든 잣대를 들이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우리 스스로를 평가하든, 다른 페미니스트를 평가할 때든 비판하자면 끊임없이 비판할 수 있다. 오빠가, 남편이, 아빠가 허락해준 것이네, 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그 사람의 환경 안에서 최선을 다했던 거라고 생각해야 한다. 페미니스트들이 자신에게 관대해질 필요가 있는 거다. 실수할 수 있지, 바로잡으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