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북클럽 & 살롱: 5.이공계에서 여성으로 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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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북클럽 & 살롱: 5.이공계에서 여성으로 일하기

주연

1. 몇 가지 문제들의 합

지난 주 참여자들은 이/공학 계열 분야에서 여성들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들로 ‘밤샘'과 같은 업무 방식의 강요 뿐 아니라 이러한 라이프 스타일 자체가 일종의 남성 노동자 기준, 남성성에 기반한 것이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이러한 업무 방식은 곧 사내 문화, 업계 문화가 되면서 엔지니어 직종 자체의 이미지도 남성으로 대표되는 경향에 영향을 미친다. 

2. 낮에 열심히 일하면 되잖아?

“내게는 저녁이 있는 삶이 아주 중요한 것이었고, 절실히 필요했다. 화장실 가는 시간 줄여서라도 7시까지는 모든 일을 끝내고, 일도 많이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해봤쟈 나는 ‘밤에 없기 때문에’ 열심히 일 안 하는 사람이 된다. 개인주의적인 사람도 되고.(웃음) 회사에서는 야근을 통해 헌신하는 이미지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맞다. ‘헌신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도, 내가 열심히 해도 그런 사람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도 정신적으로 정말 힘들다.”

밥먹듯 밤을 새워 일을 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문화는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다. 하지만 특히 남초인 집단이나 남성중심적인 직종에서 이러한 문제가 더 많이 일어난다는 의견도 있었다.

“IT 업계에 있으면서 저녁에, 밤에 일을 더 많이 하는 모습을 하도 보다보니 정말로 생체 시계에 차이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고, 정말로 그런 것 같이 느껴져 헷갈린다.”

IT 업계에서 일하는 참가자 N은 이런 ’밤샘'이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의 특수성인지 가끔 헷갈린다고 했다. ‘밤에 일을 해야 집중이 잘 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항상 듣다보니 ’대체로 이쪽 분야의 사람들이 야행성인가', ‘정말로 생체 시계에 차이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직장 생활 10년 차로, 현재 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O의 경험에 비춰봤을 때, 그건 업무나 직종의 특성 때문이 아니라 ’그냥 개인 생활 습관의 차이’일 뿐이라고 했다.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은 직종에 상관없이 야근 없이 낮에 주로 업무를 보는 것을 그렇게 힘들어 하지 않지만 본인의 생활 습관과 리듬의 문제를 그런 식으로 합리화 하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는 것이다. 

“여성 동료/상사들과 일했던 경험을 생각해보면, 낮에 당연히 열심히 일한다. 아니, 보통 남성 동료들보다도 일을 훨씬 많이 한다. 업무상 의논할 게 있어서 자리에 가면 항상 계시고 그날 넘겨 주기로 약속했으면 그날 넘겨주시는 편이다. 남성 동료들은 낮동안 담배를 피우러 나간다든지 자리에 없는 경우도 많지만.”

당연한 이야기지만 막상 회사에서 야근을 강요하고, 밤샘하며 오래 일하는 게 일상이 되면 그것이 젠더문제인지, 아닌지 헷갈리기 마련이다. 이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내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는 사람들은 소위 ‘야근파’들이며, 이런 사람들 중 대다수가 남성’이라는 점도 지적됐다.

“회사나 업계 내부에 야근 하기 싫고 빨리 퇴근하고 싶다는 남자도, 여자도 많지만 야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균형잡힌 비율로 남성(일동 웃음)인 경우가 많다는 걸 목격한다. 저녁 8시에 하나에 만원씩 하는 도시락 까먹고 10시 반부터 다시 일하고 프로젝트 끝나고 3년 뒤에 만나서 막 서버실에서 잤던 기억 이야기 하고..(웃음) 무용담처럼. 그런 걸 힘들었지만 좋았던 기억들로 체화한 듯한 느낌이 든다. 그 사람의 원래 가치관인지, 일하면서 적응한 경험인지 모르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일을 하며 그런 문화를 직간접적으로 강요하거나 동일시하는 집단주의 문화는 군대경험과 뗄 수 없는 부분이다. 조직에서 적응해야만 사회생활과 생계가 유지되며 ‘나는 조직과 한 몸’이라는 군대식 관념에 기반해 굴러가는 기업들이 아직도 많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에 기반해 일을 하는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를 배제하는 문화가 생기는 방식을 볼 수 있었다.

3. 여성 코더의 직장생활

밤샘문화에 대한 열띤 토론은 곧 여성 코더로서 직장에서의 경험들, 혹은 코더가 아니더라도 업계에서 일을 하며 여성들이 경험하는 노동 환경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들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남성들의 경우 ‘그냥 아무렇게나 해서 달라'는 식으로 하면서 내 업무에 대해 폄하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네가 마크업해도 내가 다 뜯어고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알아서 정도껏 해'라는 태도로 업무를 논의한다.”

해당 세션에 참고자료로 본 <여성과 일>에서는 성평등이란 '남녀 간의 차이와 서로 다른 사회적 역할을 동등하게 받아들이고 가치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며,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를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한다’ 고 정의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성별 그 자체를 이유로 한 직접적인 차별보다는 임시직화, 일용직화, 비정규직화를 통해 불리한 대우를 하는 경우가 더욱 많다. 직군이나 직무의 차이를 이유로 불이익을 받게 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직군이나 직무의 특성을 이유로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유지시키는 사례는 소프트 웨어 설계와 관련한 직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직 코더로 일을 하며 소프트웨어 설계를 혼자 공부하고 있는 한 참여자는 직무와 관련해서 여성들에게 어떤 일이 어떻게 분배되는 지 설명했다.

“프로그램을 분석하고 설계하는, 소위 말해 로직(logic)을 담당하는 사람과 그 기능을 구현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으로 나뉘어 있다. 전자를 ’개발자’ 후자를 ’코더’(coder)라고 할 수 있고 코더는 보통 반복작업을 한다. 그리고 코더는 보통 여성들이 많이 한다. 똑같이 이력서를 들고 가도 개발자에는 남성이 우선적으로 배정되는 걸 많이 봤다. 프로필 검토하는 과정을 어쩌다 봤는데, 여성을 무조건 제하는 식으로 하더라.”

코더와 개발자 간 업무차이, 거기에 생기는 위계, 그리고 코더 작업에 여성들이 더 많이 배치된다는 이야기는 ’성별 직종 분리’와 관련이 있다. 보수가 높고 보다 권력을 가지는 직종에 여성이 배제되고, 보수가 낮고 권력 관계에서 하위에 해당하는 직종에 여성이 집중 고용되는 것을 수직적 직종 분리라고 부른다(<여성의 일>, 154p). 즉, 웹 프로그래밍 영역에서 단순 반복 노동을 하는 노동자와 ’고도의 설계'를 맡는 사람으로 나뉘는 모습은 전형적인 성별 직종 분리라고 할 수 있다.

Y는 개발자로 겪은 경험을 공유했다. Y의 주요 업무는 이미 만들어진 시스템을 유지,보수하는 일이다. 원래는 나누어 해야 하는 업무들을 혼자서 다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다. 연장자가 다수이고 여성 직원이 많지 않은 업무 환경 속에서 Y가 경험했던 일화는 참가자들을 경악하게 했다.

“얼마 전 팀 여성 상사 분이 육아 휴직을 가게 되셨다. 근데 나와 동기 두 명 다 여성이다. 여성만 둘이다보니 걱정되었는지 상사가 우리 둘을 불러놓고 ‘너희는 동시에 임신하지 마’라고 말하는 거다. (일동 경악) 간호사 순번젠가? 이런 생각을 하고…”

“여성 직원 태반은 반복적 업무, 접수하는 일만 한다. 전산 쪽을 전공했어도 말을 안 해준다. 어차피 너는 못 올 거니까, 라는 식이고.”

“일을 하면서 경험한 일들도 황당하다. 자료를 뽑아달라고 요청이 와서 쿼리/DB를 짜서 주면, 사수님한테 전화가 온다. ‘왜 이런 걸 여자를 시키냐’고.”

그 외에도 남자 직원들끼리 ‘어젯밤 어디를 다녀왔다’며 룸싸롱 이야기 하는 게 들려서 너무 힘들었다는 이야기, 동기가 곧 결혼을 하니 ‘Y씨는 1년 동안 결혼하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 등 참가자들이 기함한 이야기들이 마치 발언 사례집처럼 쏟아졌다.

또 다른 참가자 N은 이렇게 얘기했다.

“(남성 동료들이)여자 동료들을 ‘취미로 회사를 다니는 사람’ 정도로 취급할 때가 있다. 느낌이나 분위기라는 게 있잖나.”

이에 대해 Y는 ’조직'과 ’남성성'의 결합을 짚어냈다. 조직과 나를 무조건적으로 동일시하는 남성 중심적인 사내 문화에 동조할 수 있는 다수가 남성이며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많은 여성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곧 이러한 여성들의 어려움이 생겨나는 환경적 요인의 고려보다는 단순히 ’여자들이 일을 못한다’는 식의 단편적인 해석을 하면서 편견을 고착화 하는 경우가 생긴다.

즉 여성들은 어떻게 일하든 ‘여자이기 때문에' 야근을 안하는 사람, 너무 기가 쎈 사람, 회사에 필요없는 사람, 결혼도 안하고 일만 하는 사람 등으로 손쉽게 명명된다.

4. 대체 외모•연애•결혼 말곤 할 얘기가 없나?

’여자들은 회사에 인생을 바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명제의 반복 속에는 물론 결혼과 출산 등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된다. 참가자 N은 취업 시장에서 여성을 뽑기 꺼려하는 고질적인 문제, 즉 결혼과 출산이 취직과 업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팀에서 웹 기획 쪽에서 새로운 사람을 뽑는데 가장 적합한 분이 갓 결혼을 하신 여성 분이었다. 팀 내에서는 바로 뽑으려 했는데 윗 선에서 ’결혼하고 아직 애도 없는데 안되겠다’고 헤서 결국 못 뽑았다. 아예 미혼이면 별 문제가 없는 것 같다. 애매한 경우는 오히려 결혼을 하고나서 아이가 없거나 어린 경우더라. 그치만 나 역시 ’이 사람이 바로 가서 업무에 공백이 생기면 어떡할 거냐’는 말에 반박하기가 어려워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출산과 육아로 인한 업무 공백은 단순히 여성들이 감당해야 할, ‘여성들이 만들어 낸’ 차질이며 공백이 아니라는 점은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여성의 일> 4장에서는 여성의 임금노동자화와 일-가족 갈등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성 취업의 증가로 여성과 남성이 대등하게 일과 가족을 분담하게 될 것이라는 일반적인 기대와는 달리 취업 여성의 이중 부담에 대한 사회적/제도적 지원이나 성별 역할의 개선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여성의 취업은 당연한 일로 광범위하게 수용하면서 가정 영역에서의 일과 책임은 여전히 여성의 몫으로 남겨두는 ’변형된 가정 중심성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강이수, 2009: 75).”

즉 여성이 사회에 나가 임금노동을 하게 된다고 해도 여성은 가정의 영역과 임금 노동의 영역 둘 모두에 속해야만 한다.

“여성들이 야근을 잘 안하긴 한다. 런칭을 앞두고 있다거나 테스트를 돌리고 있을 때 등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말이다. 업무 시간 내에 할 일을 전부 마치니까 그렇다(웃음). 예를 들어 기혼 여성의 경우, 최선의 방식이 업무 시간에 최대한 집중해서 근무하고 아이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가는 거다. 그렇게 그날 하루 업무를 어디까지 할 거다 라고 보고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일을 끝낸다.”

그렇다면 가정과 일의 양립을 지원하려는 시도들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한 참가자가 ’잘못된 방식의 배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같이 일하는 박사님 중 한 분이 여성이신데, 아이를 낳고 출산휴가를 다녀오셨다. 그리고 돌아왔더니 계속해서 배려를 받는다. 출장갈 일이 생긴다 하면 ‘애기가 집에 있는데 가고 싶겠어? 물어보지도 마.’ 이런 식의 ‘배애려’를 하는 거다. 본인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 뭘하고 싶은지는 물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아이 위주로 생각하고, 결정할 기회를 줘야 돼’라고만 생각하는데 그게 차별이란 인식을 못한다.”

이처럼 일터에서 여성을 ’동료', ‘전문가'가 아니라 ’엄마’나 ’아내'로만 보는 것 또한 명백한 성차별이다. 이처럼 가정 영역에서 ‘엄마’ 역할에 치중한 발화, 나아가 ’배려'라는 이름으로 과업에서 배제되는 경험 가운데 여성들은 계속 ‘뭔가 이상한데?’라고 느끼면서 기회를 빼앗긴다. 결혼과 출산을 이유로 여성들이 계속해서 취업 문제와 경력 단절을 경험하는 차별적인 상황이 지속되는 이유는 여성 개개인의 삶이나 특성을 무시하고 ‘성별'에만 초점을 맞추어 기존의 고정된 성역할과 생애주기 속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혼 여성들이 남성중심적 조직의 문화, 분위기, 대화 주제와 그 압박에서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결혼과 출산이 아직 먼 일이거나 생각조차 없는 여성들은 또 다시, 여성이라는 이유로 다양한 헛소리를 들어야 한다.

“사생활에 관련된 질문을 회사에서 진짜 많이 한다. 결혼은, 연애는. 누구 만날 생각 없냐, 언제 결혼할 거냐, 나의 1부터 100까지 다 걱정해 준다.”

이런 이야기를 견디다 못해 아예 차단하는 방법을 썼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결혼 안 할 건데요?’, ‘알아서 할게요.’같은 식으로 맞받아쳐서 본인이 그런 발언에 귀 기울이고 있지 않다, 흥미 없다는 걸 티내는 전략(?) 이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저 사람은 너무 세다’ 라는 식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다시 ’쎈 여자' 프레임을 씌워서 다른 방향에서 힘들어지는 고통을 경험하지만.

“성희롱 교육 아무리 해봤자 그게 성희롱인지는 죽어도 모르잖나. 남자친구 있냐는 질문부터 결혼, 임신 … 끝이 없으니 미리 차단한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구체적인 질문까지 이어지지 않나? “왜” 결혼 안하냐고.(웃음) 애는 어떻게 할 거냐고.. 뭐 업체 만나서 아직 미혼인 남성 분들이 있으면 꼭 붙여주려고 너무 불편하게 만든다. ‘P씨 제가 대신 물어봐줄게요, 집은 있어요?’, ‘P씨 저 분 집 있대~ 나이도 괜찮지 않아?’ 이런 식이다.”

‘연애를 해라'부터 시작해서, ‘연애 얘기 좀 해봐라’, ‘안 싸우냐’ 등 사생활에 대한 이러한 질문들을 친밀함의 척도로 생각을 한다는 것,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거부하거나 최소한으로 축소하는 경우, 다시 ’너는 왜 동조하지 않냐’는 식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특히 (헤테로)남성들의 경우, ‘여자친구’가 없는 것을 굉장한 결핍상태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여자친구 없으니까 할 일 없지 않냐’, ‘소개팅 안하냐’고 서로 계속 이야기 하고, 곧 자조적인 답변을 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물론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식으로 ‘솔로'가 자기연민의 포지션을 취해야 하는 연애 중심적 문화와 사생활에 건강하지 못한 관심을 갖는 문화가 결합해 서로에게 스트레스만 줄 뿐이다.

J는 다른 맥락을 추가했다. ‘남자/여자친구 있느냐’는 질문 자체도 성차별적이며 성희롱이라는 얘기였다. 

“헤테론지, 바인지 게인지 레즈비언인지 알게 뭔가. 이미 그걸 상정하고 질문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이렇게 이성애에 기반한 연애와 결혼에 대해 집착적으로 이야기하지만, 막상 결혼을 한 기혼자들의 경우 자신의 결혼 생활을 비하하는 뉘앙스로 쉽게 이야기한다. 그런 대화 속에서 거론되는 연애와 결혼 역시 남성중심적 시각에 기반해 있다. 

“그들이 원하는 건 도대체 뭔가?(웃음) “이성”과 연애 해야하고, 하다보면 싸움도 있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고, 언젠가는 결혼도 해야하고, 애도 낳아야 하지만 막상 결혼하고 나면 자신의 결혼을 되게 싫어해야 하는 이상한 문화다.”

5. 시혜적 도움은 거부한다: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고정관념

“짐 같은 거 충분히 들 수 있는데 옆에서 ‘뺏어가는' 건 드라이한 예의 같은 느낌이 안 들고, 시혜적인 느낌이 많이 든다. 문 열어주는 그런 느낌이 아니라 애인을 대할 때 학습한 거 같은 느낌도 들고.”

‘여성 = 약한 존재'로 보기 때문에 ’남성 = 강한 존재 = 나'가 도움을 하사한다는 식의 도움은 호의가 아닌 자기 만족적 시혜 행위다. 이에 더해 N은 이러한 도움이 헤테로 남성으로서 여성을 잠재적인 헤테로 연애상대로 보면서 하는 행동들이라고 지적했다. ‘내가 잘해주는 건데, 내가 이렇게 하는 게 남자로서 여자인 널 배려하는 건데’, 그게 성희롱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성을 동료로서 대하는 방식을 학습한 경험이 고작 이성애적 연애 경험이 전부인 한국 사회의 젠더 학습 빈곤 문제로도 생각해 볼 수도 있는 지점이었다. 

“생수통 때문에 일이 있었는데, 제일 큰 것의 반절만한 것 있잖나. 그건 여자도 드는 게 무리가 없다. 그런데 남성 동료가 옆에 와서는 호들갑을 떨면서 도와주려고 난리인 거다. 그래서 ‘일 다 했어요?’, ‘일하기 싫어서 온 거 다 티 나요, 빨리 가서 일이나 해요’, ‘여자가 뭐요, 나도 이 정도는 들 수 있어요. 무시하는 거에요?’ 이랬다. ‘서류 밀리지 말고 오늘까지 해서 나 줘요. 이거 못하면 나 야근해야 되고 야근하면 진짜 짜증날 거야.’(웃음)"

이런 이야기들은 사실 이공학계 직군에서 일어나는 일만이 아닌, 남성중심적인 문화나 사회에서 어떤 직장, 어떤 업계에서든 많이 일어나는 일들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Z는 시혜적으로 굴거나 여성의 능력을 저평가 하는 면이 이공학계에서 조금 더 잘 드러나는 것을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이과에 진학했을 때부터 너는 수학 못하겠지, 물리 좀 어렵지 않냐, 이런 얘기들을 들었던 게 생각난다. 나는 그래서 오히려 그런 이야기에서 도망치고 싶고 ‘나는 너네랑 똑같다’는 메시지를 주려고 더 힘을 냈던 기억이 많이 있다. 소위 전형적인 ’남성성'을 키우게 되는 경우도 많다.”

연구실의 이야기도 이어졌다.

“학벌이랑 석박사 자체에 대한 차별이 심해서, 박사 남성은 석사인 여자를 쳐다보지 않는 분위기였다. 나는 프로젝트를 같이 하는 그 순혈, 그러니까 학교 학부 석사 박사 다 나온 사람이랑 눈을 마주치고 얘기를 못했다.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안 들으니까 연구실의 박사 오빠를 데리고 가니까 그제야 듣더라.”

“그렇게 해서 취직을 하거나 연구실을 가거나 해도 결국은 남초다. 그래서 내가 되게 불편한 상황에 놓여도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거다. 문제에 화를 내고 싶어도, 이미 너무 남초라 내가 말을 해봤자 그냥 내가 예민한 사람이 되고, 이 사람들은 내가 말해도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아 포기하게 된다.”

6. 차별인지도 모르게 무뎌질까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걱정되는 건, 내가 무뎌지는 것이다. 그냥 ’오늘도 또 개소리한다’며 내 정신적 타격을 덜기 위해 속으로 생각하며 넘길 수는 있는데,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그게 차별인지도 모를까봐 무섭다.”
“점점 더 이야기를 안 하게 되고 점점 더 침묵하고, 내가 더 참게 되고. 그러면서 더 괴로워진다. 회사니까, 더 내 목소리를 죽이게 되고 점점 무색무취의 사람이 된다.

참여자들은 대부분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답답하고, 불쾌하고, 불편하며 개선의 필요를 느끼지만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지 궁금해 했다.

정책을 통한 직접적인 규제의 필요성

연구자 H는 과학기술 계열의 대학원생들을 집단 인터뷰한 논문 자료를 보며 남성과 여성이 같은 계열 안에서 느끼는 환경이 얼마나 다른 지 느꼈다고 했다. 논문의 내용은 십여 개 학교의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성차별을 느끼고 있냐’, ‘과학기술계열 전공인데 어떻느냐’는 질문을 남/여학생들에게 물어보고 답변을 받은 자료였다.

“그걸 보면 여학생들은 ‘우리는 성차별 뭐 그런 거 없어요’ 하는 사람도 있고, ‘있어요’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꾸 덧붙이는 말이 있는데 ‘교수마다 다르다'라는 거였다. ‘저는 안 느끼는데 교수님마다 달라요’라는 거다.(웃음) 개인화시키는 방식으로 이야기 한다.

재밌는 건 남학생들 같은 경우 ‘있어요’ 라고 답하면서 ‘여성들이 오히려 우대받고 있다, 역차별이다’ 하는 사람도 있다. 혹은 ‘성차별은 없다, 왜냐면 과학기술은 객관적인 분야이고 과학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좌중 웃음) 실력만 있으면 가능하다. 그런데 여성들은 박사로 진학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답한다.

여성(들이 선택을 안하기 때문에) 박사 과정생이 없기 때문에 남성 중심적인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하면서, ‘사실 꼭 여자들이 박사 안 해도 되지 않느냐’는 답변, ‘근데 여성들은 석사만 하고 나가도 취업이 잘 되기 때문에 박사를 안 갈 것이다’와 같은 대답들은 논리가 너무 엉터리라 대학원생이 맞나 싶을 지경이다."

대학원의 소위 ’방문화' 역시 직장에서 경험하는 성차별적 문화 만큼 괴롭다고 한다. 과학계열 같은 경우 서울 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대학원이 많기 때문에 지방에서 학회가 열리는 경우가 잦다. 이렇게 1박 2일로 출장을 가는 경우, 보통 남성인 지도교수가 남학생을 데려갈지 여학생을 데려갈지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남학생을 데려가면 한 방만 쓰면 되니까 돈도 절약되고 운전도 시킬 수 있는데, 여학생 같은 경우에는 ‘내가 여자를 어떻게 시키겠어’ 같은 알량한 마음으로, 혹은 ‘여학생들을 데려가면 돈이 더 많이 드니까’ 하는 식으로 선택적 편의를 취하면서 참여학생을 성차별적으로 편성하더라. 그리고 그런 것들에 대해 여학생들이 ‘그래 내가 여자니까, 교수님도 그렇게 선택할 수 있어, 그게 합리적인 선택이야’ 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 혹 문제 제기를 했다 하면 교수가 ‘그저 나는 남자가 편해서, 남학생을 데려간 거야.’라고 답하는 거다.

그런데 그 과정이 회사에서 남성을 뽑는 것과 똑같은 이유 아닌가? 남자들이 야근을 잘하고, 남자들을 키우는 게 좀 더 쉽다고 느끼는 것처럼 많은 이점과 기회들이 남학생들에게 배당되는 거다. 그래서 나는 문화도 중요하지만 직접적인, 제도화되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연대의 필요성

한 참가자는 이곳에 함께 오기 위해 친구를 설득하며 겪은 답답함을 토로했다. 

“우리나라에서 그 직종의 여성 개발자는 걔 한 명이다. 학부 전공, 석사까지 하고  C++ 프로그래밍을 배워서 모듈개발까지 한다. 걔는 그 자리에 있기 위해 하루에 3시간씩 자면서 5년 째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대놓고 ‘여자가 이런 것도 할 수 있어?’ ‘여자가 한 게 돌아가?’라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가슴이 작아서 생각도 작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거기엔 걔 빼고 전부 남자밖에 없기 때문이다. 걔는 ‘여자가 개발하는 거 한 두번 보십니까, 제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라면서 넉살이 늘면서, 그런 식으로 살아남고 있다.”

친구는 굉장한 능력과 경력을 가지고 있지만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속적인 성차별을 경험하고 있었다. ‘서로 경험하는 일들을 공유하고 같이 힘을 내서 뭔가 더 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이야기 해봤지만 그 친구는 자기는 그 시간에 하나라도 더 노력해서 남자를 누르고 싶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너는 출발선이 100m도 아니고 1000m 전에 있잖아.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라고 물었다. 그건 알고 있지만 단지 징징거림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하더라. 불평등한 구조가 내면화 되어있다고 해야할까. ‘사회가 변하지 않는다면 나를 변화시켜야 해’라는 거다.”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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