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라서 그래
퇴사한 여성 동료의 험담을 늘어놓던 어떤 남자가 있었다. 그는 퇴사자가 "여자치고는 잘하시네요"라는 본인의 발언에 항의했던 일화를 좌중에 털어놓으며, 칭찬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여자에겐 문제가 있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날의 나는 그 발언이 성차별임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고, 여자를 업무적으로 평가할 때 "여자치고는"이라는 사족을 붙여야만 속이 시원한 사람들의 아집에 질려 버렸다. 그들은 자신이 여성의 비교대상을 여성으로 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
나는 여성 개개인이 여성이라는 무리를 규정하는 표본으로 존재하며, 여성과 얽힌 부정적 경험이 또다른 여성을 추방할 근거로 활용되는 이상한 세계에 살고 있다. 그곳에서는"여자는 좀", "여자는 안 돼", "여자라서 그래"라는 조악한 편견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남성이 키를 잡은 공간에서, 남성이 승인하고, 남성이 유포하고, 남성이 강화했다는 이유로.
왜 이렇게 된 걸까요
어쩌면 여자아이는 '얌전하게' 기르고 남자아이는 '활달하게' 키워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이 시작인지 모른다. 여성의 인생은 애초부터 너무 큰 야심을 가지지 않도록 설계된다.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이라곤 엄마, 할머니, 주인공 친구, 잘해야 공주님이 절대다수인 창작물 속에서, 또는 대다수 직군의 기본형을 남성으로 묘사하는 어린이용 교재 속에서 여아들은 롤모델을 발견하는 데 실패한다. 교단의 여초화 현상을 완화할 대책을 마련하라는 성토는 으레 동성 멘토와 연결되지 못한 아이들의 '딱한' 형편을 헤아리는 데서 출발한다.1)
단 한 명의 아동도 낙오되는 일 없도록 심혈을 기울이는 배려 깊은 사회는 남아의 서사에만 선별적 공감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기만적이다. 우리는 여아들을 위해 각계각층에 여성의 지분을 늘리고, 아버지는 남아를 위해 집으로 돌아가라는 주장이 온당하게 여겨지는 사회를 살아온 일이 없다. 여아는 줄곧 장외의 구경꾼으로 남아 있었다. 여자가 어떻게 자라서 무엇이 되는가는 세간의 관심을 받기엔 ‘너무 사소한’ 문제였으니까.
작은 기대를 받는다는 바로 그 이유로 여성은 적은 투자를 받는다. 남자 형제에게 경제적 자원을 몰아주기 위해 지방 거점 국립대를 선택했던 딸, N수를 포기했던 딸, 유학의 꿈을 접었던 딸들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여자는 어차피 대단한 것이 되지 못한다'며 여성의 자기 계발과 사회 진출 기회를 제한하고, 그 결과로 여성이 한계에 부딪히면 다시 '여자는 역시 안 된다'고 가능성을 절하하는 차별의 고리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고용시장에서 고학점 여성보다 오히려 적당한(moderate) 학점의 여성을 선호하며, 남성 지원자를 평가할 때 능력과 헌신에 높은 가치를 두는 반면 여성 지원자의 경우 호감도(likeable)가 특혜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연구 결과2)는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역할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들은 보스가 될 가능성이 엿보이는 여성들을 원천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커리어우먼'이나 '워킹맘'이라는 유별한 타이틀을 획득하길 희망하는 여성에게는 숨 막히게 좁은 공간만이 허용된다. 남성 경쟁자들을 수없이 제칠 만큼 뛰어나야 하지만, 조직 내 남성 구성원을 위협할 만큼 두드러져서는 안 된다. 너무 진취적이면 나댄다는 평가를 받고, 너무 보수적이면 무능하거나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혼여성은 조직보다 가정을 우선하는 민폐덩어리라 뽑을 수 없다더니, 비혼여성에게는 '노처녀 히스테리'라는 사이비 병명을 진단하고 결혼이라는 처방을 내린다. 남초 직장에서는 업계 특성이 그렇다는 이유로 남자를 선호하고, 여초 직장에서는 남자를 좀더 뽑아서 균형을 맞추고 싶어한다. 출중해도 모자라도, 능동적이어도 수동적이어도 안 되고, 결혼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문제지만,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면서도 그 수가 너무 많아서는 안 되었던 여성은 그 모순된 조건들을 가까스로 충족시켜야만 위태로운 자리 하나를 넘겨받을 수 있다.
2013년, 하나은행에서만 600여 명에 달하는 지원자가 여성이라서 미끄러졌다. 선발 기준을 남성 지원자에 유리하도록 차등 조정하는 '내규'는 고등학교 입시문3)부터 취업문까지 폭 넓게 적용되어 왔다. 저득점 남성을 고득점 여성과 같은 위치에 끌어올리는 ‘성별 프리미엄’은 단순히 취업 성패를 가름하는 데서 끝나지 않으며, 여성들의 하향 선택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는 점에서 사회에 반영구적인 영향을 끼친다. 남성이 다수인 근무환경을 사수하기 위해 여성은 본인의 역량에 걸맞는 자리보다 몇 단계씩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했다(어떻게 저 능력으로 그 지위에 오를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수많은 남성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자).
수많은 핸디캡을 뚫고 직장인 되기에 성공한 여성에게 (여초)직군이 결정하는 절대적 저임금ㆍ직장내 임금 차별에 의한 상대적 저임금ㆍ더딘 승진 등으로 인한 경제적 취약성은 추가적인 난관이다. 여성으로 하여금 비혼 상태의 지속가능성을 회의하게끔 부추기는 환경은 결혼을 ‘안전성이 검증된 선택지’로 제안한다. 그렇게 여성은 가정으로 돌아가게끔 유도되어 왔다.
뇌피셜과 팩트 사이
성별이라는 생득적 조건에 따라 능력의 값이 달리 매겨지는 경험은 여성의 자아존중감과 자아효능감을 마모시킴으로써 사적인 영역까지 침투한다. 여성의 발언이 주목을 받을 때마다 ‘뇌피셜’나 ‘주작’이라 조롱하며 신뢰도 깎기를 시도하는 남자들에 대항해, 여성들은 경험에 객관성을 확보해줄 숫자들을 발굴하는 일에도 힘을 써야 했다. 한국의 성별대비 경제활동참가율4), 성별 임금격차5), 여성의 고용 형태6), 한국 기업 내 여성 관리자 비율과 유리천장지수7) 등을 조사한 자료들이 활발하게 공유되기 시작했다. 이 통계 싸움은 처음부터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의향이 없었던 청자들의 훼방으로 지지부진하게 전개되곤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흥미로운 결론을 도출해내는 데 성공한다. 시도때도 없이 진위여부를 감별하겠다고 나서는 팩트 신봉자들이 사실은 숫자보다도 본인의 해석 -아마도 그들이 ‘뇌피셜’이라고 불러온- 에 더 큰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팩트가 더 이상 남성의 편이 아닐 때, 팩트마저도 과감히 업신여기는 남성들을 목도한다. 남성 근로자가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더 높은 임금을 가져가는 노동시장의 불공정은 장시간 노동 및 고강도 노동을 ‘기피’한 여성 근로자가 자초한 결과라고 주장하면서, 남성들은 통계의 행간을 짚어낸 자신의 모습에 도취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말로 이 사회는 여성이 남자보다 고된 일하기를 싫어하고, 남자보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남성을 뽑아온 것일까?
남성들이 여성의 근력이나 근성을 여성 차별의 정당한 근거로 제시할 때, 단순 생산직이나 저임금 서비스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들, 혹은 주변 여성의 무급 돌봄노동에 기대야만 사회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여성들의 존재는 누락된다. 그리고 나는 남성들이 여성의 삶에 관해 심각한 무지를 전시하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당당한 태도의 비결을 알고 있다. 자의식 때문이다. 여성이 받아야 했던 응원과 격려의 몫을 빼앗아 배태된 그 거대한 자의식 말이다.
각주
1) 세계일보, [이슈 플러스] "남자 선생님 만나고 싶어요"...초등교사 80% 여성(2017. 04. 26)
2) Natasha Quadlin, The Mark of a Woman's Record: Gender and Academic Performance in Hiring,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2018. 3.
3) 한겨레, [사설] '교육 정의' 짓밟은 하나고 '여학생 차별 선발'(2015. 08. 27)
4) 경향비즈, ‘한국 청년, 여성 고용은 사각지대? 고용률 OECD 평균보다 크게 낮아’(2017. 08. 13)
5) https://data.oecd.org/earnwage/gender-wage-gap.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