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가 한국에 들여 온 문화 중 하나를 꼽는다면 나는 단연코 스탠드업 코미디를 꼽을 것 같다. 그렇지만, 사실 나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스탠드업 코미디 필름들을 보고 깔깔대며 즐거움과 동시에 약간의 괴리감을 느꼈다. 즐거움은 유머가 주는 즐거움이요, 괴리감은 저렇게 테이블에 삼삼오오 앉아 마이크만 하나 놓인 무대 위의 코미디언을 보는 공연의 광경 자체가 주는 괴리감이었다. 여러모로 그 풍경이 ‘한국적'이지 않다고 느꼈다.
물론 이건 트렌드를 다 따라가기에는 참으로 구시대적 인간인 나의 개인적인 문제일 수도 있겠다. 결국 유병재(가 스탠드업 코미디를 한국에서 처음으로 ‘메이저'하게 흥행시킨 데에는 개인적인 기분 나쁨의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는 홍대 번화가에서 스탠드업 코미디 티켓을 팔았고, 작년에도 래프라우더가 성공적으로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 이벤트를 개최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본격적인 스탠드업 코미디 바에 찾아가 마치 그 넷플릭스 필름 속의 그 관객처럼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본 것은 지난 21일 강남 코미디헤이븐에서 블러디 퍼니 코미디가 개최한 <그 날>이 처음이었다.
웃긴 사람 있으면 같이 웃깁시다. 그 말 하고 싶어서 오늘 쇼를 열었어요.
<그 날>의 프로듀싱을 맡은 최정윤이 말한다. <그 날>은 코미디언 전원이 여성인 스탠드업 코미디쇼다. 이날 코미디언으로 나선 이들은 다섯. 그레이스 정, 최성희, 해리엇 초이, 최정윤, 그리고 최예나다.
이들은 각각 국내외에서 꾸준히 스탠드업 코미디를 해 왔다. 하지만 한국에서 여성 코미디언이 설 수 있는 기회는 너무나 적었다. 해리엇 초이는 이태원 등지에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영어 코미디를 4년째 해왔지만 남성 코미디언들이 ‘무리'에 끼워주지 않았다. 코미디언으로 ‘전직'한 지 1년이 된 최정윤은 여자 코미디언이 이렇게 웃긴데, 어째서 없는지를 자꾸 고민하게 됐다고 했다. 그래서 어느 날, 그들은 결심했다. 무대가 없어? 그러면 우리가 만들면 되지.
<그 날>은 전원 여성 코미디언인 스탠드업 코미디쇼라는 점을 쇼의 제목에서부터 명백하게 드러냈다. 하우스에서 주문할 수 있는 칵테일도 월경이라는 컨셉에 맞추어 준비했다. 공연 전, 현장 분위기는 가벼웠다. 둘셋씩 함께 와 자리잡은 손님들은 테이블마다 모여 앉아 코미디언의 등장을 기다렸다. 자리는 만석이었다. 나중에 입장한 손님들은 클럽의 뒷편에 서서 공연을 즐겨야 했을 정도. 호스트 최예나의 등장으로 시작한 쇼는 다섯 명의 코미디언이 번갈아 나서며 한 시간 반을 꽉 채웠다.
여성이 이렇게나 웃기다, 웃길 수 있다는 값진 명제는 스탠드업 코미디가 한국에서 서서히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꾸준히 증명되고 있다. 아래는 각각의 코미디언에 대한 주관적이기 짝이 없는 평. 읽어보고 궁금하다면 이들의 공연을 보러 가자. 내가 더 웃길 수 있을 것 같다? 마이크를 잡고 나서자. 오는 2월 23일 오후 4시, 여성을 위한 오픈마이크 <Bloody funny open mic>가 열린다.
그레이스 정
한줄평: 이민자와 교포의 위치를 영리하게 활용하는 능숙한 코미디언.
코미디 맛보기: “이젠 아저씨들이 인사방식을 바꿔줬으면 좋겠어요.”
최성희
한줄평: 한국에서 경상도 기독교도 엄마를 둔 이성애자 여자로 살기,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건 불가항력.
코미디 맛보기: “정액의 맛은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에요. 입에 들어왔을 때 이걸 삼키면 살겠다 죽겠다의 문제인데.”
해리엇 초이
한줄평: 회사 생활에 찌든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그의 코미디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코미디 맛보기: “회사생활의 99%는 거짓말이에요. “안녕하세요!” 죽었으면. “조심히 들어가세요!” 죽었으면.”
최예나
한줄평: 시원하게 웃기며 거침없이 내달린다.
코미디 맛보기: “우리는 유리천장을 깨야 합니다. 일단 한 번 닦고요.”
최정윤
한줄평: 가지각색의 경험을 바탕으로 풀어내는 입담.
코미디 맛보기: “한국인답게 보지 사진은 스노우필터를 입혀서 보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