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생 미즈킴씨 3. 32세 박은혜씨

생각하다30대여성의 삶

80년대생 미즈킴씨 3. 32세 박은혜씨

미즈킴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저는 대구에 사는 박은혜입니다. 남성 맞춤정장 샵에서 디자이너 일을 오래 했어요. 현재는 11개월차 백수랍니다.


일러스트 이민

내가 했던 일

정장을 맞추러 오는 고객들이 TPO(Time, Place, Occasion)와 니즈에 알맞은 옷을 맞출 수 있도록 도와주고 디자인하는 일을 했어요.

편안함을 우선으로 추구하던 과거와 달리, 현대 남성들은 미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또 다양해졌어요. 옷에 몸을 맞추는 기성복보다 개인의 몸 형태에 기반하여 전체적인 밸런스를 맞추고, 원하는 디자인과 원단, 부자재 그리고 미묘한 핏(fit)까지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소소한 재미가 더해진 맞춤업계가 발달하기 시작했죠.

저는 맞춤정장 디자이너로서 고객의 체형과 피부 톤, 트렌드 등에 적합한 색상이나 디자인을 제안합니다. 이후 수많은 원단 중에서 고객의 라이프스타일이나 계절, 환경 등에 맞는 원단을 선별해, 충분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고객이 원하는 수트가 결과물로 나오도록 디자인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이 일을 선택한 이유

대학에서 패션디자인학과를 전공했고 어릴 때부터 패션에 관심이 있었어요.

대학교 졸업반일 때 이미 취업한 선배의 추천으로 웨딩박람회에서 단발적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어요. 박람회에 방문하는 예비 신랑신부들에게 맞춤 턱시도의 특징과 장점에 대해 설명하고 제안하는 일이었지요. 그게 8년 전인데, 그때 지금의 사장님과의 인연을 통해 취업하게 됐어요.

아르바이트였지만 그와 관련한 패션지식과 정보들을 미리 조사하고 숙지해서 갔어요. 그 덕에 부가적으로 가계약을 많이 따는 결과물을 내게 됐어요. 졸업과 동시에 입사 후, 좋은 사장님과 직장동료들, 업무 환경 덕분에 오랜 시간 일할 수 있었어요.

맞춤옷의 특성상, 옷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내야' 합니다. 때문에 옷이 완성되기까지 눈으로 미리 볼 수 없어서 고객의 입장에서는 기대와 걱정이 함께하게 마련입니다. 고객들이 만들어진 옷을 받고 무척 만족하고 기뻐하며 돌아가는 모습을 볼 때면 일하는 원동력을 얻곤 했어요.

작게 보면 의복 하나를 만들어 판매하는 일이지만, 넓게 보면 중요한 날에 한 사람의 외적 가치를 최대한으로 이끌어내고 자신감을 상승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그런 자부심이 있었기에 이 일을 선택하고 유지했던 거 같아요.

일러스트 이민

패션의 어떤 점이 은혜씨를 매료시켰나요?

어릴 적부터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어요. 한 번은 엄마가 저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가만히 쪼그려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느라 손쉽게 발견되었어요. 그림 덕분에 미아가 되지 않았던 기특한(?) 해프닝이었습니다.

저는 모든 인간의 본성이 그러하듯,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해요. 물건이든 꽃이든 그림이든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물의 디테일에 관심을 갖게 되고, 미에 대한 안목을 기르게 되고,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됐죠.

패션디자인 전공을 결심한 이유는 단순히 예쁜 옷이 좋아서요. 그런데 점점 생각이 바뀌었어요. 패션에는 하나의 정답이 없어요. 또한 디자이너의 살아온 환경과 가치관, 추구하는 모토와 성향 등이 녹아 있는 하나의 창작물이에요. 단순히 예쁜 것을 넘어서 보다 의미 있는 것 같아요. 스페인의 건축가 가우디의 유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그러하듯, 패션도 한 사람의 생각이 녹아 있는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면 매료되지 않을 수 없죠.

게다가 어떤 옷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사람의 이미지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어요. 악세사리와 모자, 벨트 등으로 전체적인 룩을 180도 바꿀 수도 있고요. 개성과 장점을 살린 다양한 믹스매치는 정말이지 보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일이에요.

주변 동료에서부터 고객에 이르기까지 남성을 상대하는 일이 많았을 것 같아요. 여성 디자이너로서 패션업계에서 일하면서 특별히 힘든 점이 있었나요?

남성복은 당연히 남자가 더 잘 알거나, 여성의 전문 분야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고객들이 종종 있어요. 생각나는 고객 중 한 명은 여성분이었는데 남자친구의 옷에 대한 전반적인 리드를 하며 대뜸 제게 서브 디자이너(여성)가 아닌 메인 디자이너(남자)를 불러 달라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바로 메인 디자이너입니다." 라고 웃으며 다가가 그 분의 생각을 바꾸는 응대를 해드렸어요. 겉으로는 담담한 척했지만 그 때는 지금보다 몇 년 더 어린 마음에 속으로는 허탈했죠.

결국 일은 잘 마무리했지만, 여성 디자이너이기에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었던 일화는 지금 생각해도 개인적인 관점에서 속상한 경험이에요.

퇴사

저에게는 얼마 간의 휴식과 새로운 도전, 더불어 좀 더 버라이어티한 인생 경험이 필요했어요.

수많은 직장인이 그러하듯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특정 장소에 매여 있었어요. 게다가 주말이 바쁜 서비스업의 특성상 주말과 저녁이 자유롭지 않았고요. 이 일을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제 여가시간과 자기계발에 대한 욕구가 점점 커졌고, 사장님과 의논 하에 당분간 일을 쉬기로 결정했어요.

지금 반(半) 자발적 백수가 된 지 11개월째에요. 그 동안 시간이 부족해 못해 본 것들을 해보고, 여행도 많이 가고, 푹 쉬기도 했어요. 인생의 방학을 만끽하고 있지요.

저는 요즘 그런 생각을 해요. 나이가 꽤 들어 한 여행지에서 여행자들과 모닥불에 둘러앉아 살아온 얘기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실 때, 내 이야기가 심플하고 무미건조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요. 다시 말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모험과 도전을 택하고 싶어요. 그게 제 인생을 사랑하고 즐기는 것이라고 확신해요. 그렇게 해야 훗날 청춘을 돌아봤을 때 후회하지 않겠죠.

일러스트 이민

백수로 보낸 시간들

휴직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여행이었어요. 휴직을 한 제일 큰 이유가 반복되는 삶을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이었거든요. 홍콩, 마카오, 중국, 프랑스에 다녀왔습니다.

중국계 프랑스인인 친한 언니 덕분에 관광객으로 지내기보다 현지인의 삶에 녹아들 수 있었어요. 특별한 경험을 했지요. 그리고 언어를 넘어 문화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 체감하고 왔어요. 다른 문화권의 매력을 분명히 느꼈고, 이전보다 조금은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된 것 같아요.

여행에서 돌아온 후 중국어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지금도 재미가 붙어 열심히 하고 있어요. 곧 일본과 몽골로의 여행을 앞두고 있어요. 그 곳에서 찾을 또 다른 즐거움과 배움이 무척 기대됩니다. 올해 이 여행을 마지막으로, 제가 가장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디자인 일을 계속해서 할 계획이에요.

불안감은 없었나요?

휴직을 결심할 때 30대 중반이나 후반이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큰 고민과 불안함을 느꼈을 것 같아요. '조금이라도 더 빨리 실행하자!' 라는 마음이 컸어요. 돌이켜 보면 너무도 값지고 행복한 11개월을 보냈어요. 다시 과거로 돌아가 선택하라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 같아요.

이 기간 동안에 제가 얼마나 많은 걸 보고 느꼈고 성장했는지를 따져보면 절대 실이 아닌 득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일을 쉬면서도 고민과 불안감보다는 뿌듯함과 안도감이 더 느껴지는 듯해요.

연애와 결혼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결혼적령기'가 되면 꼭 결혼을 해야 하는 것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은 언제 결혼을 할 건지, 또는 비혼을 선택하는 것도 좀 더 자유로워진 거 같아요. 

저는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반갑게 바라보는 입장이에요. 개인마다 가치관이나 상황이 각기 다른데, 나이에 '적기'를  대입하는 것은 공감이 안 가거든요.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것이 낯설지 않은 나이가 되었지만, 저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아요. 누군가의 아내, 며느리, 엄마가 된다는 일이 상상이 안 되기도 하고, 좀 더 혼자만의 인생을 즐기고 싶거든요.

예전에 즐겨보던 <비정상회담>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었어요. 한 외국인 패널이 자신의 부모는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지만 아직도 몇 십 년째 서로 열렬히 사랑하고 있고, 그러한 가족 형태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인식을 갖고 있었어요. 어느 것이 옳다라고 할 순 없는 문제에요. 당사자인 두 사람이 더 행복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리면 된다고 생각해요.

코코 샤넬의 일생 중 사랑에 빠지고 연애를 할 때 가장 영감이 샘솟고 멋진 디자인이 나왔다고 해요. 좋은 연애를 할 때 감정만큼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싶어요. 서로의 감정을 소모하게 하거나 구속하는 연애는 지양하고, 둘의 시너지로 더 나은 사람으로 발전할 수 있는 관계를 추구하고 있어요. 연애하는 동안 상대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주도록 노력하는 편이에요.

나 자신만을 위한 일

중국어 모임에 꾸준히 나가고 있어요. 언어를 가르치고 배우려는 목적을 가지고 모인 사람들이다 보니, 같이 공부할 때마다 열정적인 에너지를 받곤 해요. 혼자 하는 것보다 더 의욕이 생겨요. 애착을 갖고 하고 있는 활동 중 하나에요.

인테리어와 공기 정화, 새 잎을 보는 기쁨을 위해 식물을 많이 키우고 있고요. 아직 운전이 서툴러서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기 위해 열심히 운전 연습 중이랍니다.(웃음)

가능하면 건강을 위해 좋은 재료를 듬뿍 넣고 직접 요리를 해먹으려 하고, 지금은 잠깐 쉬고 있지만 곧 운동도 시작하려고 해요.

일러스트 이민

대한민국에서 30대 여성으로 산다는 것

앞줄이 3으로 바뀌면서 마냥 어리고 예쁜 나이를 졸업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미국 드라마 <How I met your mother>에서 바람둥이 바니가 헌팅을 하려다 30세 여자인 걸 알고 포기하는 장면이 있어요. 분명 웃기려고 만든 장면인데 웃을 수 없었고요(웃음). 스스로는 아직 철도 덜 들고 어른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그 30대'가 되었네요.

어린 나이만으로 무기가 되고 근거 없는 자신감이 넘쳐나는 시기는 이제 지났지만, 그래도 내 인생에서는 가장 젊은 날에 살고 있잖아요. 이 순간을 즐기면서 젊은 마인드로 살아가고 싶어요. 

한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테지만, 평균적으로 30대 여성들이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 많이 서면서 고민도 많아질 것 같아요. 아무래도 사회적인 분위기 자체가 그렇잖아요. 여성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려면 좋은 시기가 정해져 있고, 늦기 전에 결혼해야 한다는 주위의 암묵적인 압력이 있는 거 같아요. 그러다 보니 많은 경우 개인의 상황과 가치관의 차이가 이런 압력과 충돌하기도 해요. 그래서 대부분 30대에 ‘적기’에 관련된 고민을 하게 되는 거 같아요.

결혼을 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릴 것인지, 연애만 하거나 싱글 라이프를 즐길 것인지. 출산을 할 것인지, 한다면 언제가 적기일지. 아무래도 이런 부분은 30대 여성이 더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출산에 있어 나이가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출산이 결혼의 전부는 아니고, 육아로 인한 커리어의 유지 여부도 인생을 적잖게 좌우할 가능성이 있고. 결혼 자체도 평생의 동반자를 찾는 것이기에 신중해야 하고,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개인의 선택으로 존중 받아야 하고. 그렇기에 30대 여성의 고민과 선택이 많을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30대 남성도 고민이 많을까요?

개인적인 생각으로 나이에 대한 인식이 여자보다 남자에게 관대한 거 같아요. 남자는 30대부터라는 말도 들어본 것 같구요.

그렇다면 이 가운데 은혜씨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가요?

패션 일은 트렌드와 디자이너의 감각에 민감하기 때문에 사실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하는 게 쉽지 않아요. 그래서 언젠가 제가 이 일을 그만 두었을 때 저의 진로와 방향에 대해 이런 저런 고민이 들죠. 게다가 저는 넓은 세상을 무대로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하고 싶은데, 샵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일을 하기 때문에 한계를 느끼기도 했어요.

오랜 시간 몸 담고 있던 패션이 아닌 새로운 일을 도전하고 싶어요. 쉽지만은 않겠지만, 저의 성향과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자 고민하고 있어요. 그 가운데 하나로 무역업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무역에 관련된 책도 사서 보고, 필드에서 일하고 계시는 분께 부탁드려 과외도 받고, 틈날 때마다 어떤 아이템이 좋을 지 시장 동향을 살펴보고 있어요. 여행을 통해 시야를 넓히고 글로벌한 마인드를 가지려고 노력하고, 언어 공부를 하는 것도 사실 그 준비의 일환이죠. 물론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시도해 보지 않고 포기하면 후회할 걸 알기에 천천히 단계적으로 도전해보려 합니다.

내가 꿈꾸는 미래

“과거에 '○○'을 할 걸!” 이라는 후회를 하지 않도록 살고자 해요. 할까 말까 고민이 되면 하려고요. 혹시 후회하더라도 실행을 바로 해보려고 해요.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과 미래를 위해,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언어를 비롯한 배움을 놓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고요.

거창하고 막연한 미래를 준비하기보다는 당장 10년 후 40대의 박은혜가 지금보다 더 지성과 연륜이 갖춘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책 한 권 더 읽고, 세계 경제 뉴스를 보고, 다른 분야의 사람과의 대화에 관심 있게 참여하려고 노력해요. 아직 인생이라는 수업을 듣는 학생이라는 마음가짐으로 현재를 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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