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선 어디에 있든 내 근처에서 열리는 이벤트에 관해 알림이 온다. 그중 내가 글래스고에서 참여했던 이벤트 중 몇 가지를 얘기해 보고자 한다. 이벤트는 5명이 모인 북클럽부터, 글래스고가 주최하는 도시 행사들까지 다양하다.
비건 축제
글래스고를 비롯한 유럽의 많은 식당에는 무조건 하나에서 두 개 이상의 비건 푸드(Vegan food)가 존재한다. 그만큼 비건 음식은 꽤 대중적인데 좀 더 많은 사람에게 비건의 다양한 음식과 또 레시피를 공유하는 푸드 마켓이 매년 열려 좀 더 많은 사람에게 비건이라는 단어를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이벤트들이 많았다. 때로는 작은 카페에서 또는 공원의 일부를 빌려 비건 음식을 만들어 볼 수 있었다. 비건의 음식의 수는 다양했고 음식이 정말 맛있었다. 내가 놀랐던 것은 우리가 먹는 가장 기본적인 음식에도 동물성 재료들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빵부터 시작해서 샌드위치에 발린 마요네즈, 나초를 찍어 먹는 소스, 또 샐러드에 올려진 치즈도 의식하지 않았으면 전혀 모르고 넘어갔을 것들에 대해 좀 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사실 동기 중에서 꽤 많은 수가 비건이고 또 비건이 아니더라도 최대한 비건 음식을 지향하는 친구들이 꽤 많았다. 비건 음식에 대한 행사를 몇 번 참가하고 또 반 동기들에게서 다양한 비건 음식을 만드는 법과 음식의 맛에 대해 얘기를 나누며 비건이 생각보다 어려운 게 아니라는 걸, 또 비건이라는 그 이름이 그렇게 힘들거나 제한이 많은 단단한 벽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매일 비건이 아니어도 좋다. 횟수보다는 비건이 필요한 이유가 있기에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
세계 음식 축제
비건 축제만큼이나 사람들이 지나치지 못하는 또 다른 행사는 세계 음식 축제다. 글래스고의 메인 도로 위에 천막을 치고 열리는 세계 각지의 음식들을 판매한다. 누군가에게는 그리워하던 고향의 음식을,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음식을 통해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 축제가 열리는 날이면 학교에 가는 길 곳곳에 음식 냄새가 나고 사람들이 북적여서 마을 축제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스의 길거리 음식과 인도의 전통 디저트, 20가지 방법으로 담근 올리브와 치즈들을 보면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음식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같은 올리브 절임이지만 서로 다른 가족 레시피로 담그고, 나라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방법으로 치즈를 만드는 걸 맛보면서 음식을 단순히 먹는 축제가 아니라 서로의 문화를 배우는 축제임을 느낄 수 있었다. 한 해에 두 번은 꼭 열리는 이 인기 있는 이벤트 덕분일까? 한국인이 많지 않은 글래스고에, 그리 크지 않은 번화가에 한국 식당이 하나둘 들어섰고, 비빔밥이라는 이름의 비빔밥과 라이브 재즈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상상도 못 한 문화가 섞인 식당들도 생겼다.
글래스고 필름 페스티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축제는 글래스고 필름 페스티벌 (Glasgow Film Festival)이다. 독립 영화를 비롯해 그 해에 주목을 받은 영화들을 소개하고 정식 상영 전 이 페스티벌에서 영화를 선공개하기도 한다.
내가 이 축제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 축제에서 볼 수 있는 영화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제작자나 관계자가 와서 영화가 끝난 후 그와 관련된 이런저런 워크숍이나 관객과 대화를 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붉은 거북(Red Turtle)>이라는 영화 상영이 끝나고 있었던 대화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영화 자체도 좋았지만 재미있었던 것은 붉은 거북이라는 영화가 대사도 없고 무성 영화에 가까운 영화인 만큼 이런 영화에서는 어떤 점을 더 신경을 써야 하는지에 중점이었고, 마지막에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청각이 약하거나, 청각 장애가 있는 분들도 즐길 수 있다는 얘기를 했다. 그래서 당신의 세상에서 이 영화에 관한 피드백을 줄 수 있냐는 강연자의 질문에 뒤를 돌아보니 영화관에는 많은 청각 장애인분들과 그분들의 대화를 돕기 위한 수화 통역사가 있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시위들
이런 행사나 축제 말고도 페이스북에서는 하루 걸러 하루 새로운 시위에 관한 알림이 도착했다. 내가 한국을 떠나 글래스고에 있던 2016년 여름에 영국은 2016년 6월 EU를 탈퇴하는 일명 브렉시트(Brexit)를 가결했다. 이 결과에 대해 엄청난 찬반 시위가 열렸다. 2016년 겨울 한국에서는 대통령 탄핵시위가 열렸고 글래스고를 비롯한 영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자신이 있는 곳에서도 이 일을 알리고자 시위를 열었다. 글래스고에 있지만 한국인이고, 한국인이지만 글래스고에 있는 나의 2016년은 정말 혼돈의 한 해였다.
이 정신없는 시간 속에서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시위는 아일랜드에서 열렸던 여성의 임신 중단권 합법화에 관한 찬반 시위였다. 아마도 작년에 SNS에서 한 번쯤은 여성들이 캐리어를 끌고 줄을 지어 걸어가는 기사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글래스고에서 비행기를 타면 두시간도 안 걸리는 아일랜드의 여성들은 임신중단권 합법화를 위해, 캐리어를 끌고 고국을 찾았다. 따지자면 글래스고와는 별개의 국가이기 때문에 글래스고와는 아무 상관도 없고 특히 나는 가본 적도 없는 아일랜드의 법에 관한 시위가 주말마다 글래스고에서 열리는 게 신기했다.
아일랜드의 임신 중단권 합법화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하자면, 이 시위의 도화선이 된 것은 2012년 사비나 할라파나바르(Savita Halappanavar)라는 여성이 패혈증으로 사망하는 사건이었다. 척추의 통증 때문에 병원을 찾았는데 검사 결과 태아는 더 생존할 수 없다는 유산 진단을 내렸다. 양수도 터지고 이미 유산이 된 태아를 꺼내는 수술을 해야했지만 아일랜드 법에 따라 태아의 심장 박동이 뛰고 있으면 태아를 낙태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의사로부터 거절당했다. 이로 인해 결국 태아가 숨지고 나서야 수술을 받았지만 조기 유산으로 인한 후유증인 패혈증으로 사비나가 결국 사망하게 되었다. 좀 더 일찍 태아를 꺼냈다면, 상황이 더 악화하기 전에 수술을 받고 적극적인 치료를 받았다면 그는 살 수 있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분노했다.
내가 이 시위에 찾아보고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같은 반의 유일한 아일랜드 친구 카할 덕분이었다. 그는 글래스고에서 열리는 이 시위를 위해 작업실에서 열심히 시위 팻말을 만들었다. 종이를 자르고 글씨를 쓰고, 그걸 지켜보던 반 아이들도 하나둘씩 관심을 갖고 무엇을 위한 시위인지 그리고 다 같이 모여 팻말을 만들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에는 이 문제에 남자인 카할이 시위를 나가고 함께 나가자고 주도하는 이 상황이 낯설었다. 하지만 그 시위에 참여하는 친구의 이유는 간단했다.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생각이 이렇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 나간다고 했다. 본인의 여동생이나 엄마나 여자친구가 겪을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본인이 낙태하지 못해 패혈증으로 죽어가야 했던 사람이라면, 수술을 거부 당해야 했던 사람이라면 이 문제를 그냥 지나치지 않을 테니까. 결국 2012년부터 시작된 이 시위는 2018 압도적인 찬성률로 임신 중단권 합법화를 이뤄 냈다.
소리 높여 즐기고 말하라
비건이 아닌 사람이 비건 축제를 즐기는 것, 아일랜드 출신이 아닌 사람이 아일랜드의 시위에 나가 는 것. 여자가 아닌 남자가 낙태 시위에 나간다는 것. 이 모든 일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비건이 아닌 사람도 비건 음식을 먹으며 그 축제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아일랜드 사람이 아니더라도 아일랜드 법의 불합리함을 말 할 수 다수가 옳다고 그러니까 그래야만 한다는 암묵적인 규칙에 나는 그리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학교 수업이나 내 프로젝트만큼이나 이 행사에 참여하고 팻말을 만들고 시위를 나갔던 순간들은 짧았지만 강렬했다. 유학을 비롯해 다른 나라에서 다른 문화가 있는 곳에 산다는 건 어떻게 보면 학교에서나 학교 밖에서나 매일 배워나가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영화를 보면서도 많은 것을 되돌아보았다. 서로의 다른 문화가 그 차이가 만들어낸 생각들을 배우는 것. 생각을 행동으로 그리고 그 행동이 그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마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