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를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이거나 페미니즘과 같은 저항 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있어 ‘지금보다 더 좋아질 미래’는 중요한 가치다. 오늘 내가 적극 참여한 운동이 당장 내일의 삶은 아니라고 해도 몇 년 뒤 나와 내 동료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들 것이라는 기대는 운동을 지속시킬 중요한 동력이 된다. 그래서 지금 내가 사는 곳보다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정보는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
미국은 이렇고, 프랑스는 저렇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이렇고, 대만은 저렇다는 식의 정보는 한국보다 더 낫다고 평가하는 사회 혹은 한국에는 없는 법과 제도를 갖춘 사회를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이를 통해 지금 한국 사회에 무엇이 필요하고 장차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고민할 때 참고할 수 있다. 이것은 더 나은 미래의 청사진이기도 하다.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라는 상상은 현재 시점에서 다른 나라나 사회와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과거라는 시간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조선시대 여성의 삶에 비해 현재 한국 여성의 삶은 정말 많이 좋아져서 차별은 존재하지 않고, 과거 인권 개념 자체가 없던 시대에 비해 지금 한국의 성소수자의 삶은 그래도 더 좋아졌다는 식이다. 즉 과거는 언제나 불행하고 불운하고 열악하며 현재는 과거보다 좋아졌고 미래는 당연하게 더 좋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좋아지지 않은 미래는 실패를 뜻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태도는 다양한 질문을 야기한다. 과거는 정말 현재보다 나빴는가? 더 나은 미래라는 희망은 우리의 삶이나 운동을 가능하게 함에 있어 정말 중요한 요소인가? 미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여야 하는가? 더 나은 미래라는 희망은 정말 필요한 일인가?
'더 나은 미래' 뒤에 숨은 것들
예를 들어 ‘여성’의 인권을 논할 때 그 비교군은 매우 자주 조선시대 아니면 ‘어머니’의 삶이다. ‘우리 어머니 때는 출산하고 바로 농사를 지으셨다’라거나 ‘조선시대도 아니고 지금 여성이 억압받고 차별받는다니 말도 안 된다. 오히려 남자가 더 차별받고 있다’와 같은 식인데 이런 식의 비교 자체가 ‘여성’이 차별받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한 사회의 권력자 혹은 지배자에 해당하는 집단은 항상 과거에 비해 현재의 삶이 나빠졌고, 한 사회의 피억압 집단은 항상 과거에 비해 현재의 삶이 더 좋아졌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위계 질서의 상층부에서 권력과 폭력을 당연한 권리로 누리던 삶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을 때 그 삶은 과거에 비해 ‘나빠진’ 삶이다. 그런데 피억압자가 겪는 억압과 차별이 과거에 비해 현재 더 좋아졌다는 평가는 어째서 가능한가? 그 평가의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정말 나빴는가?
과거에 비해 현재가 더 좋아졌다는 식의 평가는 성소수자의 삶과 인권을 말할 때 자주 언급된다. 이 평가는 과거 성소수자의 삶은 현재에 비해 매우 열악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1970년대 신문기사나 잡지 등을 살펴보고 당시를 연구한 논문이나 발표문 등에 따르면 ‘레스비안’ 사이의 결혼은 종종 신문이나 잡지에 기사로 실리기도 한 일이었다. 퀴어 역사학자 토드 헨리의 연구에 따르면 두 ‘여성’의 결혼식 장면과 이 부부의 삶을 자세하게 다룬 기사가 주간지에 두 쪽이 넘는 분량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남장여자가 범죄에 연루되어 경찰에 잡힌 사건 기사에서, 이 남장여자가 ‘같은’ 여자와 부부처럼 살고 있더라는 식의 언급도 드물지 않게 찾을 수 있다.
1980년대 초반 에세이집을 보면 ‘여자’끼리 부부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언급하는 글도 찾을 수 있다. 이들의 결혼식이나 부부 관계는 모두 법적으로 등록될 수 있거나 증명될 수 있는 관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 성소수자의 삶이 1970년대보다 2010년대가 더 좋아졌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성소수자의 차별을 금지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유무? 동성결혼 허용 여부? 트랜스젠더퀴어의 성별정정 허가와 관련한 법안 여부? 트랜스젠더퀴어를 향한 의료보험 지원 여부? 학교 내 성소수자 차별 여부? 사회적 인식? 이 모든 것에 대답은 '아니오'다. 1970년대, 아니 1960년대에도 2019년 현재에도 달라진 것은 없다. 지금 나열한 조건이 ‘더 나은 인권 상황’의 지표가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가 현재보다 나빴다는 단순한 상상력 자체를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이다. 과거가 현재보다 인권 상황이 나빴다고 볼 근거는 없다.
나빠져도 버티는 것
과거는 현재에 비해 열악했다는 식의 상상은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와 연결된다. 하지만 더 나은 미래라는 희망이 꼭 필요한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1980년대 자료를 찾다보면 당시 트랜스젠더 업소에서 일하는 트랜스와의 인터뷰를 여러 건 찾을 수 있다. 물론 인터뷰 내용은 대동소이한데, 태어날 때 남성으로 지정받았지만 어릴 때부터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했고 그로 인해 가족과 불화를 겪다가 결국 가출했고 현재의 일을 하며 살고 있다, 지금 사는 삶이 매우 어렵고 힘들다는 식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트랜스로 사는 삶이 매우 불행하니 혹여라도 트랜스로 살고자 하는 이들은 그런 ‘선택’을 하지 말라는 ‘교훈’(즉, 경고)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내용이 흥미로운 이유는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트랜스 인권 운동을 전개하지 않았다고 알려진 시기, 민주화 운동에 비해 인권 운동은 덜 다루었던 시기, 인권을 말한다고 해도 트랜스 의제를 인권 의제로 인식하지 않았던 시기, 그래서 정책 변화보다 사람들의 호의에 호소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던 시기였다. 그 시기에 ‘10년 뒤면 트랜스 인권이 더 개선될 것이다’라는 인식이나 언설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말로 오늘날 말하는 방식과 같은 그런 희망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 삶은 계속된다. 그렇다면 희망이 필요하고 더 나은 미래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이나 기대가 없어도 삶과 운동은 지속된다. 미래는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 서사가 과거를 일방적으로 불행하게 만들고, 과거와 현재를 온전히 인식하기 힘들게 만든다.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을 알지만 운동을 할 수 있다.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 자체를 갖지 않고 운동을 할 수도 있다.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는 방식으로 삶과 운동을 조직하는 태도 그 자체를 질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