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29일 제주도 신산공원에서 제2회 제주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인천퀴어문화축제 이후 혐오 세력의 방해를 우려했지만 제주에서 반퀴어-혐오 세력은 작년에 비해 현저하게 줄었다(대신 인천퀴어문화축제를 방해했던 이들 다수를 제주퀴어문화축제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적은 인구나마 반퀴어-혐오 세력이 제주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를 방해했음에도 인천경찰과 달리 제주경찰의 적절한 대응으로 행사는 무사히 끝날 수 있었다. 제주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가 제2회 제주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 행사가 끝났음을 알리는 자리에서 “살아서 내년 퀴퍼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살아서 내년에도 만나자는 말. 이 말에 눈물이 나려고 했다. ‘살아서 다시 만나자’라는 말은 성소수자의 삶에 죽음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현실, 죽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정도의 지독한 혐오가 만연한 현실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부디 살아서, 부디 살아남아서 다음에 꼭 만나자.
30년 후의 우리
몇 년 전 특강을 진행하던 자리에서, 자신을 트랜스젠더퀴어로 설명하고 있는 사람이나 이제 막 정체화한 퀴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잠시 답변을 망설였다. 당시 나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구체적 미래는 몇 살일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 트랜스 활동가 중에서, 혹은 트랜스로 정체화하고 있는 사람 중에서 그나마 유명하고 오랜 시간 활동을 한 분의 나이는 40대 후반 정도다. 물론 그 분이 아니어도 다양한 연령의 트랜스가 있고 당연히 70대, 80대의 트랜스가 있다. 몇 년 전엔 60대 트랜스가 그의 파트너와 함께 성전환수술을 상담하러 병원에 찾아갔다는 말을 전해 듣기도 했다. 하지만 막연하게 나이 많은 트랜스가 있음을 아는 것과 트랜스로 살아가는 구체적 인물을 알고 있고 때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구체적 역할 모델을 찾는 것, ‘나’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모델을 찾는 일은 ‘내가 계속해서 트랜스나 퀴어로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만드는 일이며 지금의 내가 내가 원하는 정체성으로 살아도 괜찮다는 삶의 확신과 원동력을 얻는 일이다.
그 질문에 답변을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지금 이 특강에서 만난 트랜스젠더퀴어를 30년이 지나서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물론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다양한 사건을 겪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더이상 살아가지 않겠다고, 이제는 삶을 스스로 마감해야겠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나는 자살이라는 행위가 의지가 나약하거나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아서 선택한 일이 아니라 너무도 많은 고민을 하고도 또 몇 번, 몇 십번을 더 고민하는 과정에서 내린 결정이라고 믿는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재 상황에 대한 판단, 이대로 계속 살아도 괜찮을까라는 미래 전망, 현재 시제로 반복되는 과거의 고통이 모두 얽혀 있는 상황에서 내린 어떤 결정이기도 하다.
성소수자의 죽음은 혐오와 무관할 수 없고, 그렇기에 이 죽음이 온전히 ‘나 개인의 선택’이라고만 말할 수 없고 자살은 익히 알듯 사회적 타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죽음에 이르는 상황에서 개인의 어마하게 많은 고민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나는 30년 뒤에 혹은 지금 20대인 트랜스가 60대가 되었을 때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 시간 동안 많은 고통과 괴로움,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내년에 혹은 10년 뒤에, 50년 뒤에 살아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삭제된 죽음
살아서 내년 퀴퍼에서 만나자. 얼마 전 한 트랜스 활동가가 삶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현재 한국 의료 제도에서는 제대로 진단하지 못 하는 질병이 있고 장애인이기도 한 그 활동가는 기억을 남겼다. 그가 he를 뜻하는 ‘그’가 아니라 한 사람을 지칭하는 ‘그’다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사람이 그와 나누었던 에피소드를 공유하며 슬픔과 비통함을 표현했다. 장례식 조문 일정과 맞지 않아 장례식장을 찾지 못 한 사람들은 그곳에 가지 못 했다는 사실만으로 미안함을 느꼈다.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어느 행사장에서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때 그와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 하고 헤어졌다는 점이 계속 미안함으로 남아 있다. 그때 내가 그에게 다음에 꼭 다시 만나자고 말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까 싶지만, 그럼에도 그 한 마디를 건네지 못 한 내가 참 못났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는 그 한 사람만이 아니다. 나는 활동을 하며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는 퀴어의 소식을 일 년에 몇 번은 듣고는 한다. 내가 전해 듣지 못 한 죽음은 더 많을 것이고, 퀴어의 죽음으로 인식되지 못 하고 그저 사라진 죽음도 많을 것이다. 그와 매우 친했던 활동가는 살아서 그를 외면했던 가족이 그의 장례식 절차와 조문 절차를 유일하게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데 애통함을 표현했다. 많은 ‘가족’이 퀴어의 죽음을 다른 이유의 죽음으로 포장하고 고인이 퀴어였다는 사실 자체를 삭제한다. ‘우리’의 삶을 외면한 가족이 ‘우리’의 죽음을 관장할 유일하게 적법한 책임자가 될 때 ‘우리’의 삶과 죽음은 어떻게 남겨질까? 죽음 조차 누구에게도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사건(죽음)이 될 때 삶과 죽음은 무엇일까?
살아서 내년 퀴퍼에서 만나자. 그것은 내년 퀴어문화축제가 무사히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인 동시에 이번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사람(뿐만 아니라 참가 못한 많은 퀴어와 그 지지자)이 내년에도 참가해서 서로가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라는 염원이다. 내년 퀴어문화축제에서 만나자. 내년에는 어떤 사정으로 퀴어문화축제에는 참가하지 못 한다고 하더라도 살아서 나중에는 꼭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 혐오가 만연한 사회이지만 그럼에도 살아 남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살아서 나중에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