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이 사건이 될 때
연극은 깔끔했다. 페미니스트에게 깔끔함은 인생 최대의 과제인데 말이다. ‘지나치다’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어디까지, 어떻게 말해야 될지 고민하다 보면 시작도 못한 적이 많다. 한시간 반 동안 ‘과’한 캐릭터들이 ‘과’한 이야기를 했고, 결론은 하나도 나지 않았는데, 이 모든 게 깔끔하게 느껴진다. 연극을 보고 나오면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줄거리
여성 킬러 듀오 ‘코카’와 ‘트리스’의 사무실에 의뢰인 ‘노비아’가 불쑥 찾아온다. 의뢰한 대로 납치는 잘 되었는데 무슨 일로 온 거냐고 묻자, 갈 데가 없어서 왔단다. 이어서 고백한다. "오늘이 제 결혼식 날인데, 신랑 될 사람을 납치해달라고 부탁한 거거든요." 코카와 트리스는 ‘질문은 받지도 하지도 않는다’라는 쿨한 킬러로서의 원칙을 깨며 질문 공세를 시작한다.
"대체 왜 그랬는데요?"
사건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연극 내용은 이게 다다. 세 여자가 낡은 방 안에서 삼계탕에 와인을 곁들이며 이야기를 하는 것. 이들의 이야기를 방해하는 남성들이 자꾸 등장해, 마치 자신들이 극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인물인 것 마냥 설친다. 하지만 걱정 말자. 여기는 페미니즘 연극제고, 그들은 목소리만 큰 엑스트라다.
가령, 술에 취한 남성이 방문을 두드린다.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여기서 중요한 건 이들은 방 안에 연장이 가득한 ‘킬러’라는 점이다. 극은 한국 남초 영화같은 상황에 캡틴마블처럼 반응하는 여성들을 통해 유쾌해진다.
"(망치로) 뭐 하게?"
"죽여달라잖아."
오히려 이들은 경찰의 등장이 더 두렵다. 살인청부업을 하고 있는 데다, 화장실엔 사람도 납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경찰은 술 취한 남성으로 인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다. 킬러들은 대답한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러니 얼른 가세요.)
자, 이제 네가 이야기를 해
사건은 ‘사건’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그 자체로 일어나는(happened) 게 아니라, 그것을 겪은 사람의 판단에 의해 만들어진다(made)고 생각한다. 정신승리를 하자는 게 아니다. 모든 사건은 주관적으로 해석된 결과물이라는 거다. 그러므로 청자는 어떤 입장을 들어줄지, 이것이 '어떤 사건'인지 결정해야 한다. 코카와 트리스는 화자를 노비아로 결정했다.
여성으로부터 발언권을 받은 여성의 입을 통해 ‘진짜 사건’이 무대 위로 올라온다. 그리고 잔뜩 힘이 들어간 관객들의 귀에,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들려온다.
노비아는 결과적으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결혼을 파기했다. 그리고 파혼 방식을 상대를 납치하는 쪽으로 결정했다. 여기서 이 연극이 과장된 영웅담도, 흔한 푸념도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코카와 트리스, 그리고 노비아의 첫날밤>은 사건의 밑바탕에 숨겨져 있던 여성의 ‘느낌’을 발굴하는 연극이었다.
노비아는 쉬지 않고 말한다.
"아직까지 절 때린 적은 없어요."
"물뽕 같은 것을 써 본 사람이면 어떡하죠?"
"성범죄자 알림e 사이트엔 이름이 없었지만"
"나쁜 짓을 하고도 평범한 척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극은 노비아의 사연이 개인적 느낌과 직감으로 점철되어 있다 해도 계속 말할 수 있게 놔둔다. 이것에 용기를 얻은 코카와 트리스도 자신의 과거에서 ‘사건’이랄 만한 것을 떠올려 꺼내기 시작한다. 모두의 사건이 젠더라는 한 지점에서 만나고 있음이 밝혀지는 지점마다 극은 섬세해지고 달아오른다.
한편으로는 뭔가를 밝혀내려고 했던 탐정놀이가 짜게 식는다. 코카는 말한다.
아무, 것도, 확인된 건, 없다.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들의 겸허가 극장에 엷게 깔린다. 깔리고 깔리다가 더 이상 비울 것이 없어졌을 때, 인물들의 사고방식이 변한다. 지금까지 걱정을 위해 쓰이던 ‘상상력’이 다르게 쓰이기 시작한다.
상상력이 현재의 나를 위해 발동될 때
이전까지 극은 ‘왜’라는 과거에 묶여 있었다. 이것이 특별히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이 사회에 인과주의가 익숙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이유가 있고, 그것을 알면 다음을 대처하기 쉽다는 얄팍한 이데올로기. 하지만 인생엔 인과 관계가 없다. 게다가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 대처할 대상인 ‘악(惡)’은 평범하다. 골라낼 수도 없다.
그리하여 세 여자는 깨닫는다. 우리 그냥, 누군갈 단죄할 게 아니라, 지금 이 이상한 연대의 밤을 즐기는 게 낫겠어. 그러기 위해선 어떤 게 필요할까. 그래. 상상이 좋겠다. 지금 여기가, 나의 사랑하는 친구와 가자고 약속했던 아름다운 바닷가라고 상상하자. 상상이 시작되면 끝이 없다. 이성애자 남성이 부르는 노래라고 생각했던 칸초네 ‘La Novia'는 친구를 추모하는 노래로 재해석된다.
‘오늘은 그대 떠나는 날. 당신이 행복하기만을 기도합니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누구를 위해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고 했다. 소수자의 사고방식이 온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해 돌아갈 때, 사람들은 이상하게 쳐다보거나 손가락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는 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삶의 느낌인지를. 각자의 느낌을 한데 모여 공유하는, 춤을 추는 셋을 보면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You've got a feminist friend
나는 연극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말할 게 없었다. 내가 아는 것은 오직 나 혼자만의 감상(感想) 뿐. 느낌(感)과 생각(想) 중에 생각은 이 글로 옮겼다. 느낌은? 관객의 느낌은 실시간으로 공유된다.
제 2회 페미니즘 연극제가 시작되었다. 키워드는 ‘연대’다. 첫 연극의 커튼콜 곡은 여성과 성소수자 인권에 목소리를 내는 Carole king의 'You've got a friend(당신에겐 친구가 있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