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엔 메두사가 산다
“사람들이 너한테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면 크고 강한 남자가 필요하다’고 했니?”
“네! 근데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그렇다면 ‘공주’가 확실해!”
-영화 <주먹왕 랄프2>(2018) 중-
디즈니 프린세스들의 자조(?)처럼, 오랫동안 ‘공주’는 남성 인물의 구원 아래에 놓여있었다. 과거 디즈니 영화서부터 2000년대 인터넷 소설,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매스미디어가 이 ‘공주’ 여성상을 재생산해왔다.
이를테면 우리의 ‘공주’, 즉 여자 주인공은 이런 사람이다. 착한 심성, 욕심 없는 순수한 마음, 사랑을 위한 희생을 보여주는, 그야말로 내·외면이 ‘예쁜’ 여자. 그녀는 재력·지위를 갖춘 남자 주인공의 사랑과 구원을 받고, 끝내는 그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다. 백설공주는 왕자의 키스로 깨어나고, 평범한 여고생은 세계서열 1위(?) ‘일진짱’과 사랑에 빠지며, 외로워도 슬퍼도 안 우는 여자 주인공은 대기업 본부장과 연애를 한다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이 위계적인 판타지는 낭만으로 둔갑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유구히 그놈만 멋있었고, 그녀는 그저 예뻤다.
사실 이 오랜 판타지는 엘렌 식수의 지적과 상통한다. 식수는 남성중심 문화가 공인하는 ‘좋은 여자’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 “(남자가) 자기의 힘과 욕망을 실감할 수 있도록 꽤 오랫동안 저항하지만”
- “남자가 자기 자신이 보기에도 위대해지고 든든해져서 자기 자신에게로의 회귀를 향유할 수 있도록, 너무 지나친 장애 없이, 너무 오래 저항하지 않는 여자.”
잘 상상되지 않는다면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주인공 길라임을 떠올려보시라. 김주원의 조인트를 깔 줄 알던 그녀였지만, 동의 없는 막무가내 동침엔 순식간에 무력해졌다(심지어 설렘까지 내비친다). 로맨스 서사는 남성의 강압적인 행위를 달콤한 장치로 흘려보내고, 서사 속 여성은 이에 저항하다가도 곧 저항하길 포기하며 남성 질서 안에서 사랑을 완성한다.
그에 따라 여자 주인공의 서사적 성취는 힘을 가진 남성과 사랑을 이루는 것에서 멈추고, 그의 권력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연인 자리를 보장받는다. 근래 그 강압을 폭력이라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토대가 마련되었지만, 글쎄, ‘공주’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전히 그 성으로, 학교 옥상으로, 저택으로 여자 주인공을 데려가는 호박마차는 은밀히 운행되고 있다.
추방 당한 메두사들
한편 그렇지 못한 여성은 쉽사리 여과된다. 자신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여성. 남성과 알력다툼을 하는 여성. 그가 통제할 수 없는 여성. 남성의 자리를 위협하는 여성. 그래서 지워지지 않는 여성. 이들은 ‘좋은 여자’의 반대항인 ‘악녀’ 혹은 ‘요부’ 신화로 오래고 전승되어 왔다.
대표적으로는 ‘메두사’ 이미지를 들 수 있겠다. 메두사는 남성의 욕망을 불러일으키지만 남성을 화석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이유로 혐오스러운 “괴물”로 취급되었다. 프로이트가 메두사 신화를 ‘남성이 가진 거세 불안’으로 해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남성에게 위협이 되는 이 여성은 영웅 페르세우스에 의해 처단당하는데, 학자들은 이를 가부장제가 ‘나쁜 여자’에게 내린 일종의 응징이라고 분석한다. 참정권을 요구하는 여성에서부터 현대의 여성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힘을 가지려는 여성들에게 메두사 이미지를 씌워온 역사는 이 주장을 강력히 뒷받침한다.
연극 <마음의 범죄>가 다루는 것도 이 ‘괴물’들의 이야기다. 이 작품은 ‘공주’·‘좋은 여자’에서 여과된 ‘메두사’들에 주목한다. 2019년 제2회 페미니즘연극제에서 프로덕션IDA가 선보인 이 작품은 베스 헨리의 동명 희곡을 바탕으로 한다.
이번 <마음의 범죄>는 원작의 배경이었던 1970년대 미국 남부에서 2019년 제주도로 무대를 옮기곤, 현대의 기호로 재단장했다. 작품의 시발점은 동일하다. 1970년 미국 남부의 베이브 매그라스가 그런 것처럼, 2019년 제주도의 유아진은 남편을 총으로 쐈다. 이 사건을 통해 유순진, 유가진, 유아진, 세 자매가 집으로 모이게 되고, 연극은 이 집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서사화한다.
이때 세 자매는 정숙한 여성상을 강요하는 기성 사회와 부딪혀, 가부장제의 주류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이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순진, 남성을 불구로 만들었던 가진, 정신적·신체적 폭력을 가해온 남편에게 총상을 입힌 아진. 이 세 사람은 가부장제가 규정하는 ‘괴물’에 다름 아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면 사랑받을 수 없다는 모욕적인 소리를 듣고, 자기주장이 강하다고 쉽게 비난 받고, 웃지 않는다고 구타당하는 이들이지만, 사회는 이 여성들을 그저 질서를 이탈한 ‘괴물’로 바라본다.
<마음의 범죄>는 이들의 내면에 주목하며, 가부장제 사회가 만든 분열적 자아의 모습을 좇는다. 아버지는 도망가고, 어머니는 고양이와 함께 자살하고, 세 여성은 할아버지라는 가부장 아래에서 자라왔다. 할아버지는 ‘좋은 여자’라는 환상을 주사하며 자매에게 자신의 왜곡된 기대를 불어넣었고, 동시에 사회는 그들에게 정숙하고 착한 여자가 될 것을 요구했다.
집 내외에서 가해지는 억압으로 인해, 자매의 욕망은 점차 분열된 방식으로 배출되고 만다. 순진은 “할머니”처럼 살아가면서도 욕망을 억눌렀던 기억을 계속해서 토로하고, 가진은 노래하는 법을 잊은 채 자기파괴 충동에 휩싸이고, 아진은 일렉 기타를 끌어안은 채 자살하려 한다. 할아버지가 잔뜩 사주었던 간식 때문에 세 자매가 배탈이 났었다는 회상은 이에 대한 직접적인 비유로 기능한다. 그리고 역시나 가부장제가 만든, 그러나 가부장제가 승인하지 않은 이 행동들은 ‘광기’라고 단정 지어진다. ‘괴물’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그렇게 다시 유통된다.
이야기해야 한다, 연대해야 한다
흥미로운 건 이 연극이 가부장제를 가시화하는 방식이다. <마음의 범죄>는 배우의 연기로, 혹은 음성으로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무대에 등장하지 않고, 아진의 남편·시댁의 목소리 역시 전화기 너머로 짐작 가능할 뿐이다. 틀거지만 남은 문이 소규모 커뮤니티를 넌지시 암시하고, 끊이지 않는 전화벨 소리가 인물의 불안을 추동하는 정도다.
오히려 이 무대가 강조하는 건 바로 연대다. 무대 위에 오르는 모든 캐릭터는 약하게 또 강하게 세 자매와 연대한다. 원작의 '칙 보일' 캐릭터는 가부장제가 보낸 감시자이자 그 논리의 대변인으로 현현했지만, 2019년 연극의 '양념반'은 그 캐릭터성을 유지하면서도 작품 말미엔 도움을 주는 인물로 변주되었다. 베이브(아진)를 향하는 변호사의 애정 기류도 친구 사이의 우정, 피해자 간의 유대로 방향을 틀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를 최우선에 놓았다.
그리고 <마음의 범죄>는 가진의 입을 빌어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그건 인간의 중요한 욕구”라고. 각자가 자신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욕구. 그 욕구는 오롯이 무대 위로 쏟아지고, 모든 인물은 각자가 살아내고 있는 생애를 발화한다. 그들이 말하는 삶에는 배 잡고 웃을 만한 희극도, 눈물을 훔칠 만한 비극도, 또 말은 슬프게 뱉지만 웃음이 본능적으로 새어 나오는 희비극도 있다. 혼자 삼켜둘 수 없는 이야기들을 토해내며 인물들은 욕구를 되찾고, 가부장제에 도둑맞은 주체성을 자각한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서부터 연대는 출발한다. 자매는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하고, 서로에 대해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된다. 또한 생판 남의 사정도 들여다보며, 새로운 삶을 함께 다져나가려 한다. 때론 서로를 ‘괴물’처럼 바라보는 순간이 있다. 이해관계가 어긋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로는 서로를 심연에서 끌어올리며 “힘든 날을 견디어 내는 방법”을 배워간다.
연극은 초코파이에 초 하나를 꽂고 맞았던 순진의 외로운 생일에서 시작해, 번듯한 케이크의 촛불을 끄고 자매가 함께 웃는 생일 다음 날로 끝난다. 결여에서 채워짐으로, 하나에서 여럿으로 나아가는 이 이야기는 ‘우리’의 가능성을 진하게 전한다.
세 여성을 ‘공주’, ‘좋은 여자’ 속에 가두려 했던 할아버지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곧 그 집은 자매의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서의 해방이 완전한 자아의 해방을 의미하진 않는다. 순진도, 가진도, 아진도 또다시 파고를 넘어야 할 테다. 여긴 동화·인터넷 소설·로맨틱 코미디 속 세상이 아니기에, 막연한 해피엔딩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이들을 ‘괴물’로 취급하는 사회 속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는 꽃노래일 뿐이다.
다만 세 자매가 행복해지길 바란다는 순진의 (하루 지난) 생일 소원처럼, 그래도 함께한다면, 서로 말하고, 서로 듣는다면 더 나은 삶이 가능해질 거라는 아주 작은 희망이 있다. 누구를 위한? 연극 속 세 자매, 우리 집 세 자매, 그리고 지구상의 수많은 자매들을 위한.
다시 식수의 문장을 빌리자면 이런 사람들.
나와 동족들, 바로 나인 그 모든 자들, 그리고 나와 같은 자들, 추방당한 자들, 식민지 지배를 당한 자들, 화형당한 자들.
그들을 생각하며 나 역시 소원 하나를 빌어본다. 순진의 소원처럼, 그리고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나는 ‘우리’가 여전히 애틋하고 잘 되길 바란다.
<참고>
-이형식 역, 베스 헨리, 『마음의 범죄』, 한신문화사, 1996.
-박혜영 역,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 동문선, 2004.
-박혜영, 「메두사의 신화와 여성, 누가 메두사를 두려워하는가?」, 『한국프랑스학논집』 61, 한국프랑스학회,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