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안되잖아요.
이 말을 하기까지 어째서 이토록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을까? 작업 현장에서, 작품 내 재현에서, 작품에 대한 비평의 공간에서 여성은 어째서 말할 입을 가지지 못했을까? 그러면 안된다고 왜 말을 못했을까?
모든 규범과 가치의 전도가 허용되는 예술 영역은 '남성'이라는, 반쪽짜리 규범을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묘한 위반에 자리를 내주었다. 위반이 가능한 예술은 사회에서 남성-인간이 짊어진 과도한 이상을 벗어날 수 있는 작은 탈출구였으리라. 그러나 작품 내에서든 작업 현장에서든 그 작은 탈출구는 여성을 매개로 해서만, 그러니까 여성 예술가들에게 때로는 모욕을 또 때로는 공모에의 유혹을 안겨줌으로써만 열리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법과 위반, 수축과 이완의 남성적 순환체계에 여성의 자리는 없었다. 여성은 예술과 승화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 기껏해야 뮤즈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여성에게는 예술만이 허용하는 위반마저 허용되지 않은 셈이다. 이 극은 예술이라는 기만적 위반에 대한 반성에서 새로운 탈출구를 도모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내가 여자-후배-배우여서 연습을 불편하게 만들었나요?
극은 ‘배우 경지은’의 독백으로, 철제 구조물 위에서 자신이 지난날 이른바 ‘연극판’에서 저질렀던 공모들을 되짚어보는 모놀로그로 시작한다. 그는 미투운동 이후 기존의 ‘연극판’을 떠났으며, 그 판을 구성했던 철제 구조물을 이제 허물어버린다. 그리고 새판을 짜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 구조물은 새로 세울 수 없다. 그는 극중의 극, ‘지옥’과 그녀의 애인인 ‘재림’에 관한 소극(笑劇) 주위를 그저 빙빙 돌고 있을 뿐이다.
페미니스트라고 말해서 좋을 게 뭐가 있어, 한 개도 없어!
어쩌다 페미니스트가 된 지옥.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고 세상의 모든 오류들이 제자리를 찾는 희열의 순간에 불행을 마주하게 된 그녀. 사사건건 부당함과 오류들이 눈엣가시처럼 보이기 시작했지만 이제 그것이 내 눈에만 가시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외워둔 페미니즘 이론을 입 밖으로 내어 끊임없이 무지한 이들을 ‘계몽’하려 들지만 정작 나의 문제로 되돌아오면 스텝이 꼬이고 말문이 막힌다.
넌 씨네큐브도 모르고 아렌트도 몰라서 좋아... 근데 나 너 좋아해도 되는 거임? 끊임없이 자기 검열에 시달리는 지옥의 페미니스트는 결국 분열된다. 이런 망할, “페미니스트라고 말해서 좋을 게 뭐가 있어, 한 개도 없어!” 그래, 역시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것과 페미니스트로 사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야.”
너 콧수염 났다! 그거 솜털이야.
지옥과 재림의 드라마가 희극인 것은 필연적이다. 일베 친구를 둔 재림의 세계와 지옥이 입문한 페미니즘의 세계는 교집합도 없는 각각 나름의 논리적 경직성을 대표한다.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불일치는 자연스레 우스꽝스러움을 연출할 수밖에 없다. 한참 심각하게 철학자 한나 아렌트를 들먹이던 지옥은 “어, 너 콧수염 났다”는 남자친구 재림의 말에 그것이 사실 “솜털”이라며 민망한 듯 무마한다. 관객은 실소를 금치 못한다. 아렌트와 보부아르, 페미니즘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한들, 지금 당장 애인이 지적하는 나의 몸과 나의 털은 수치스런 존재다.
이런 충돌과 불일치는 재림과 지옥 사이의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지옥 안에 있는 모순되고 화해 불가능한 두 세계의 불일치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의 이상적 세계와 삶을 위해 여성성을 전략적으로 취해온 현실의 세계. 이 두 세계의 충돌과 소통 불가능한 불일치, 그 본질적 아이러니가 솟아오른다. 그리고 그 아이러니라는 ‘의미-없음’의 불안은 관객으로 하여금 너스레 떨며 무마하는 웃음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든다.
본래 희극은 관객에게 감상적 동일시를 허락하지 않는다. 극중 인물들의 결함에 대한 지적 우월에서 웃음이 터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옥의 희극은 지적이지만 동시에 자조적이어서 관객들은 쉽게 동일시한다. 웃는 관객들은 극의 계몽적 성격에 공모하는 이들일 뿐만 아니라 그 계몽의 아이러니에 지옥과 같이 허탈해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 극이 다층적인 극의 구조를 갖고 있고, 희비극을 넘나들며, 다른 매체를 끊임없이 참조하는 형식이지만 사실 새로울 것은 없다. 페미니즘의 계몽서사를 비판하면서도 또 다른 계몽을 시도하는 듯한 압도적인 양의 대사들은 해석을 욕망하는 비평의 언어를 무색하게 한다. 그러나 비언어적 아이러니를 아이러니하게도 남김없이 전달한 점은 이 극이 가진 힘이며 새로움이자 결함이다. 페미니즘 연극은 기존의 예술관행이 불가능하도록 만든다. 여성예술가에게도 위반할 수 있는 새로운 법과 말이 있다고 주장하려 한다. 그런데 그런 여성적 법과 말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할까? 극은 거울이 되어 이 질문을 관객에게 되돌려준다.
그러나 언어는 여전히 하나의 울타리일 뿐이며,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만을 체험할 뿐이다.’
‘배우 경지은’의 비극과 ‘지옥’의 희극이 만날 수 있을까? 극은 그 둘의 만남을 제안한다. 비극의 고통 속에 매몰되지 말 것, 희극의 허무에 사라지지 말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그 만남에서 우리는 그 둘의 어떤 화해, 어떤 종합도 기대할 수 없다. 평행선을 달리는 둘은 서로 웃으며 곁을 내어준다. 화해하지 않아도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 그 둘은 무릎도 발바닥도 없이 각자의 춤을 춘다. 어차피 허물어진 구조물은 되돌릴 수 없지만, 그리고 페미니즘을 알기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폐허와 심연에서 함께 웃을 수 있고 춤출 수 있는 이들이 있기에 그 폐허는 어느새 새로운 잉태의 공간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니까 이번 생에 페미니스트는 글렀으면 어떠하랴? 다음 생에도 똑같이 페미니스트는 글렀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