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은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언어를 주는 학문이다. 예를 들면 페미니즘 덕분에 우리는 그건 ‘몹쓸 짓’이 아니라 ‘성폭력’이라고, 그 말은 단순한 ‘막말’이 아니라 ‘성차별’이라고, 그런 행동은 ‘호기심’이 아니라 ‘2차 가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언어는 엄밀하게 사용해야 한다. 페미니즘이 정립한 언어를 오용하거나 남용하면, 자칫하면 여성의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성폭력 피해자에게 당시 상황을 자세히 묻는 것을 어떤 경우에라도 ‘2차 가해’라고 해버리면, 결국 사건은 가해자 입장에서만 서술된다. 피해자에게 불필요하게 여러 번 상황 설명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면, 피해자에게 일어난 일을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고 했다고 해서 그 자체로 2차 가해라고 할 순 없다. 피해자를 돕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으로 피해자 입장에서 사건을 구성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에서 피해자가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다. 어쨌든 자신의 끔찍한 경험을 타인에게 설명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 경험을 전혀 누구에게도 공유하지 않으면 피해자를 도울 수 없다. 이렇듯 미묘한 차이 같지만 분명히 2차 가해와 2차 가해가 아닌 것의 선이 그어지는 경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 경계는 아주 중요하다.
가스라이팅에 대한
심각한 오해
<남의 연애>는 이런 지점에서 최근 페미니즘을 통해 한국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단어를 오용하고, 남용하고 있다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그 단어는 ‘가스라이팅’이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는 <남의 연애>에도 등장하는 희곡 <가스등(Gas Light)>에서 비롯한 심리학 용어다. 희곡에 등장하는 남편은 집안의 가스등을 일부러 희미하게 만들고, 아내가 집안이 어둡다고 말하면 그건 사실이 아니라며 아내를 정신적으로 몰아간다. 결과적으로 아내는 자신의 인지능력과 정신 건강을 의심하며 점점 더 남편에게 의존하게 된다.
헷갈려서는 안 된다. 여성이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가해자에게 의존하게 되는 건 ‘결과’다. 가스라이팅은 그런 결과를 유도하는 ‘과정’이며 악의적인 일련의 행동이다. 가해자는 여성을 고립시킨 뒤, 여성에게 거짓말을 했다. 여성의 인지능력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알면서, 마치 문제가 있는 듯이 근거를 조작하고 연출한 것이다.
그런데 <남의 연애>에 등장하는 ‘가스라이팅의 사례’는 너무나 포괄적이다. 연애하다가 상대방이 나에 대한 실망을 내비치거나, ‘너는 너무 무심하다’며 투정을 부리는 것까지 모두 가스라이팅이라는 범주에 넣었다. 연애 당사자인 내가 그 말을 듣고 ‘정말 그런가?’하고 스스로를 의심했기 때문에 가스라이팅이라는 식이다.
이건 사실이 아니다. 만약 A와 B가 연애를 하는데, B가 “A, 넌 매번 나와 데이트에 지각을 해. 나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아. 좀 더 노력해줘.”라고 말했다고 치자. A가 정말로 항상 데이트에 지각을 한다면, 그건 그냥 B가 자신의 심경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A는 항상 정시에 오는데, B가 기를 쓰고 약속시간보다 10분 먼저 와서 기다렸다면? 그래놓고 카카오톡 메신저에 남아있는 “나 도착했어. 빨리 와. 오늘도 내가 먼저 왔네?” 따위의 기록을 근거로 내세우며 A를 항상 지각하는 사람이라고 몰아간다면? 일부러 그런 기록을 남겼다면? A가 “난 항상 약속시간을 잘 지키는데 네가 일찍 오는 거잖아.”라고 진실을 말해도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가 있어. 우리 약속시간은 그 전인데 네가 늦게 온 거잖아. 벌써 까먹었어? 넌 항상 이런 식이라서 믿을 수가 없어.”라고 부정하고 속인다면? 그건 가스라이팅이다.
그러니까 가스라이팅은 의도를 가지고 악의적으로 사실이 아닌 걸 사실로 우기면서, 근거를 조작해가면서, 상대방이 사실을 말해도 그걸 부정하면서 작동한다. 이런 요소가 별로 없는데 연애 중에 스스로가 별로 안 좋은 사람이라고 느꼈다는 것 자체로 전부 가스라이팅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남의 연애>처럼 가스라이팅에 대해 포괄적으로 접근하다가 진짜 가스라이팅의 심각성이 희석될까 우려된다.
진짜 피해가 희석된다
<남의 연애>는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에 관련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많은 여성들의 음성과 이를 파편적으로 따라하며 재연하는 한 배우의 연기로 구성되어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 ‘가스라이팅에 관한 경험’이라는 것이 단어의 뜻과 맞지 않게 지나치게 포괄적이다. 그러다보니 극 초반에는 심지어 “그런데, 가스라이팅이 없는 연애가 있을까?”라는 대사가 나올 정도다.
객석에서 나는 기절초풍할 뻔 했다. 지금까지 열심히 설명했듯이 가스라이팅은 악의적인 현실 조작과 부정, 거짓말, 눈속임을 통해 정신 지배를 목적으로 하는 끔찍한 그루밍 수법이다. 이런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 연애가 과연 있는지 궁금하다고?
연애로 인해 자존감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로 가스라이팅의 피해자라 주장할 수는 없다. 상대가 나와 연애하다 자존감이 흔들렸다고 해서 내가 은연 중에 가스라이팅을 했다고 곧바로 주장할 수도 없다. 원인과 결과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연애로 인해 자신에 대한 확신이나 믿음이 흔들리게 된 데에는 다양한 원인이 존재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정말로 파트너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런 케이스를 복수 이상 알고 있다. 가해자들은 방금 스스로 한 말도 ‘그런 적 없다’며 부정하고, 피해자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주장하고, 하지도 않은 행동을 했다고 주장하며, 피해자의 가족이나 친구에게 거짓말로 편지나 문자를 남기고, 피해자에게 자살협박을 하기도 했다.
내가 아는 피해자들은 “그거야말로 가스라이팅이야.”라는 말에 명료함과 힘을 얻어 심리 치료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고, 데이트폭력에 개입해주는 사람들과 상담하며 가해 상황을 벗어났다. 그런데 만약 피해자들에게 누군가 “그렇지만 가스라이팅이 없는 연애가 있을까?”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남의 연애>가 하는 방식으로 가스라이팅이라는 언어가 오용, 남용되면서 희석될까봐 경계하는 이유다.
연극적으로도 <남의 연애>에는 큰 의문이 남았다. 여러 여성들의 목소리를 실제로 녹음해서 무대에 올리는 구성은 처음에는 흥미로웠다. 그런데 극이 계속, 주구장창, 그렇게만 진행되자 의문스러웠다. 왜 이걸 꼭 연극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려야 했을까? 영상물이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은 영상물인 게 더 나을 뻔 했던 구성이었다. 좀 더 세련되게, 리듬감 있게, 자막을 통해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편집이 가능했을테니까. 물론 가스라이팅에 대해 이렇게 크게 오해를 하고 있으며 이를 널리 퍼트릴 가능성이 있다면 영상물로도 만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