큼큼, 혹시 '프로불편러'세요?
천년의 사랑이 식는 시간은 어쩌면 단 1초일 것이다.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나, 불로불사의 호텔 주인이 아닌지라 진짜 그런진 확언할 수 없다만, 짧은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다. 사랑이란 건, 더 넓게는 감정이란 건, 삽시간에 차게 식을 수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이럴 때 말이다. “너 그렇게 굴면 나중에 시집에서 흉본다”란 말을 들었을 때, “그런 화장을 하고 그런 향수를 쓰면 ‘술집 여자’ 같으니 하지 마”란 말을 들었을 때. “여자 몸이 그래서야 쓰겠냐”란 말과 함께 내 신체를 재단하는 시선을 느꼈을 때.
갑자기 감정이 싸해지는 한 마디는 노래, 책, 드라마, 영화, 공연에서도 예외 없이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또 이럴 때. 아이돌 노래에서 “여자가 쉽게 맘을 주면 안 돼”라는 가사를 들었을 때,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라는 문장을 만났을 때, 멜로드라마에서 “여자 짓 하는 거야?”라는 대사를 들었을 때. 말 그대로 분위기는 “와장창”, 감정은 차디차게 식어버린다. 천년의 사랑도 식게 하는 이 느낌의 이름은 바로 ‘불편함’이다.
그러나 내가 불편함을 느꼈대도 노래는 계속되고, 드라마는 전개되며, 쇼는 머스트 고 온 된다. 나 같은 혹자는 불편한 한 마디에 걸려 그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하지만, 또 다른 혹자는 아주 가볍게 점프한다. 아니, 애초부터 그에게 그 한 마디는 걸림돌이 못 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다음으로 넘어간 이들은 종종 이런 말을 건네 오기도 한다. “야, 넌 참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그런다.” “고작 그거 가지고 예민하게 굴면 사회생활 못해.”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화룡점정의 한 마디. “큼큼, 혹시 ‘프로불편러’세요?”
네, 그게 ‘불편러’라면요.
네이버 시사상식사전에 의하면, ‘별것도 아닌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은 프로불편러, ‘사회의 부조리와 불의’에 정의롭게 맞서는 사람은 화이트불편러라고 한다. 무엇이 별것인지 별것 아닌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것과 (어떤?) ‘여론을 형성하는’ 것 또한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다. 도무지 이 라벨링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는 거다.
저 두 문장 속의 가치판단을 모두 제거했을 때, ‘불편러’는 비로소 이렇게 정의된다. 특정한 무언가에 자주 불편함을 느끼고, 그 불편함을 여론 형성으로 이끌어가는 사람들. 그래, 그게 ‘불편러’라면 나는 ‘불편러’가 맞다.
불편러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 글에서 소개할 네 여자 역시 ‘불편러’다. ‘달랑 한 줄’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 연극 <달랑 한 줄>의 네 여자, 명희, 연실, 은주, 현주다. 연극 <달랑 한 줄>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18년 ‘봄 작가, 겨울 무대’ 프로젝트를 통해 첫선을 보인 작품으로, 제2회 페미니즘 연극제에선 ‘극장 공연’ 파트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연극의 배경은 명희의 집, 등장인물은 이 집에 기거 중인 네 여자다.
명희와 그의 친구 연실, 연실의 두 딸인 은주, 현주는 명희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 이 네 여자는 나이도, 학력도, 직업도 각기 다르다. 그래서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 때문에 자주 부딪치곤 한다. 이런 서로 다른 네 사람을 묶는 건, ‘불편함’이란 느낌. 그것도 ‘달랑’ 한 줄에 느끼는 불편함이다.
명희는 책 속의 한 문장에 불편함을 느낀다. 연실은 남편의 미운 말 한 마디에 불편함을 느낀다. 은주는 직장 상사의 희롱하는 한 마디에 불편함을 느끼며, 현주는 학교 교칙의 한 문장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러니까 이건, 이 불편한 ‘달랑’ 한 줄들을 바꾸려는 네 여자의 이야기다.
제목의 ‘달랑’이란 부사는 역설적으로 사용되었다. 누군가는 이들에게 “별거 아닌” “고작” “달랑” 한 줄 가지고 왜 그러냐고 손가락질한다. 하지만 연극은 보여준다. 이 ‘달랑’ 한 줄이 어떻게 삶의 근간을 흔들었고, 얼마만큼의 고통과 상처를 안겼는지를. 더 나아가 이 ‘달랑’ 한 줄을 바꾸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이다.
크게는 사람들의 인식에서부터 미디어 속의 한 줄, 책 속의 한 문장, 내 가족의 한 마디에 이르기까지. ‘달랑’은 견고한 뿌리를 가지고 재생산되고, 이걸 바꾸는 일은 기약 없는 투쟁을 요한다. 여성들은 이 한 줄을 바꾸려다가 계약 파기를 당하고, 이혼을 요구받으며, 직장에서 잘릴까 전전긍긍한다. 누구 말마따나 ‘달랑’ 한 줄인데, ‘고작’ 한 줄인데, 그걸 바꾸는 일은 ‘달랑’, ‘고작’이 아닌 거다.
한국 여성의 이야기
우린 불편함을 인지하고 발화하는 사람들이죠.
연극은 이 문제의식에서부터 출발하여, 2019년 한국 여성의 삶에 주목한다. 가벼운 말장난과 코미디적인 장치가 작품에 한국적 현실성을 부여하는 한편, 메시지는 직구로 던져진다.
먼저 작품은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을 두루 훑는다. 시작은 ‘금지’에서부터다. "드세다", "여자가 그럼 안 돼"라는 제한적 표현에서부터, 교복 블라우스 밑에 바로 브라를 입으면 안 된다는 교칙, 여자가 밤에 함부로 돌아다니니까 범죄의 표적이 된 거라는 비난들, 비혼 여성은 결혼을 ‘못한’ 것이라는 인식 등이 전개 속에 열거된다. 이때 연실은 이 ‘제한’을 내재화한 인물이다. 1막을 끌고 가는 건, 가부장제의 논리를 복화술 하는 연실과 그 논리 자체에 불편함을 느끼는 나머지 세 여성 사이의 갈등이다.
그리고 연극은 이 ‘금지’를 ‘피해’로 확장하며, 한국 여성의 실존적 삶을 면밀히 톺아본다. 불법 촬영, 직장 내 성폭력, 가정 내 가스라이팅 등은 네 여성 각각이 겪었고, 겪고 있는 실제 상황이다. 연실은 이 공통된 피해 경험을 깨달은 후에야, 제 친구와 제 딸, 그리고 자기 자신이 가부장제의 피해자라는 걸 인지한다.
그때서부터 2막은 불편함을 바꾸기 위한 움직임으로 나아간다. <달랑 한줄>의 1막에서 그리는 게 ‘불편함을 인지하는 것’이라면, 2막에서 그리는 건 ‘불편함을 발화하는 것’이다. 이는 명희가 수정하고 싶어 하던 한 문장으로 대표된다. 유약하고, 순종적이며, 섹슈얼한 여성상을 강조하는 남성 작가의 문장. 출판사는 이 문장을 묵인했고, 변역가인 명희의 수정 요청엔 계약 파기로 답했다.
이에 명희, 연실, 현주는 출판사 앞에서 항의 시위를 펼치고, 은주만이 “그래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며 입장을 달리한다. 1막에선 불편함을 ‘인지’하지 못한 연실을 통해, 2막에선 ‘발화’가 무용하다고 말하는 은주를 통해, 이 시대 한국 여성들의 복잡성을 그려내는 것이다.
불편함을 인지하고, 불편하다고 발화하는 것. 그건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행하기 어려운 일이 된다. 연실과 은주를 통해 보았듯, 깨닫기도 어려운데 말하긴 더더욱 어렵다. 왜? 그것들은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레토릭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불편함을 인지한다 해도 ‘달랑’에 문제를 제기하려면, 있는 것마저 잃을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여자는 ‘달랑’ 한 줄을 바꾸기 위해 확성기를 들고, 대자보를 만들며, 목소리를 높인다. 겁나지만, 무섭지만, 불편한 걸 불편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낸다.
이때 티셔츠·대자보 속 한 줄 표어는 ‘달랑’ 한 줄을 되받아친다. “여자애가 그럼 안 된다”는 말엔 “왜 안 되는지 1도 모르겠다”로, 직장·가정 내 폭력에는 “건들면 뒤진다”로, “여자는 자고로 이래야 한다”는 말엔 “Not because she is a woman, But because she is a human”으로. 그리고 그깟 “‘달랑’ 한줄 가지고 왜 그러냐”는 말엔 이렇게 답한다. “우리는 한 줄을 바꿀 수 있고 한 줄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렇게 ‘달랑’ 한 줄에 불편함을 느꼈던 여성들은 함께 소리 높여 외친다. 그건 불편하다고. 바뀌어야 한다고. 누구를 위해? 나를 위해, 너를 위해, 우리를 위해.
달랑 한 줄, 바뀌었을까
우리는 ‘달랑’ 한 줄을 바꿀 수 있을까요?
자, 그렇다면 한 줄이 바뀌었을까? 은주는 상사의 ‘한 마디’ 불쾌한 농담을 비꼬며(쇼펜하우어의 문장을 꼭 들먹일 것!) 시원하게 퇴사했을까? 현주는 교복 블라우스 안에 무얼 입든 ‘한 마디’의 터치도 받지 않았을까? 연실은 ‘한 마디’ 미운 말을 해대는 남편과 이혼했을까? 명희는 ‘한 줄’의 불편한 문장을 바꿀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결국, 그 ‘달랑’ 한 줄이 바뀌었을까.
글쎄.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만, 우린 이미 잘 알고 있다. 그 ‘달랑’이 가진 권력을. 어쩌면 네 여성은 가진 걸 잃지 않기 위해 끝내 불편함을 감내했을 수도 있다. 혹은 포기하지 않았대도 ‘달랑’ 한 줄은 바뀌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연극은 승리의 기억을 자축하기보단 연대의 기억을 공유하길 택한다. 나이, 결혼 여부, 배운 것, 잃을 것이 모두 다른 네 여성은 오로지 하나, 나와 내 옆의 여성의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해 목소리를 낸다. ‘달랑’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달랑 한 줄>은 그때 서로가 서로 옆에 서 있었던 기억, 불편함을 공유하고 공감했던 기억. 함께 발화했던 기억, 그래서 ‘달랑’ 한 줄을 바꾸려 투쟁했던 기억을 무대에 아로새긴다. 자기가 계란인 줄 알면서도 기꺼이 바위에 부딪쳤던 이 사람들은 함께였다.
타격은 미미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불편한 나와 불편한 당신, 그 ‘달랑’을 바꾸려는 목소리들이 쌓이고 쌓이다가, 언젠간 100도의 물로 끓어오를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끓어오른 뒤엔, 지난날의 불편함은 ‘달랑’, ‘고작’에서 벗어날 것이다. 어쩌면 이는 ‘사회의 부조리와 불의’였다고 재평가될 지도 모른다.
<미안하다, 사랑한다>(2004)의 명대사 “밥 먹을래, 나랑 뽀뽀할래”에 대해서, “당시엔 폭력성보다 ‘나 이렇게 너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통했지만” “지금은 불편하다”고 말한 2018년의 임수정처럼(씨네21). 바람피운 남자친구에게 “난 여전히 너의 여자야”라고 말하던 노래 ‘루비’(1998)를 들으며 “참 수동적이야, 애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2019년의 핑클처럼 말이다. 제2회 페미니즘 연극제의 ‘한 줄’ 문구가 다시금 떠오르는 순간이다.
“우리의 지금을 있게 한 연대, 앞으로 잊지 말아야 할 연대, 연대를 상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