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극은 극작가 지나 지온프리도Gina Gionfriddo가 2013년에 발표한 동명의 희곡인 <환희, 물집, 화상(Rapture Blister Burn)>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검증된 원작에 기댄 연극들은 원작의 아우라가 너무 커서 관객의 편견에 찬 기대를 채우지 못할 때를 제외하곤, 대체로 절반의 흥행을 보증 받는다. 이 연극도 마찬가지였다. 원작은 2013년 퓰리처상 드라마 부문 최종후보에 오르며, “중년에 이른 두 여성이 자신들이 했던 선택을 후회하듯 문제시할 때 그들의 영혼을 탐색하는 혹독한 코미디”라고 소개된 바 있다.
원작의 유명세가 근거 없는 건 아니었던지, 이 연극은 일단 유쾌하고 재미있다. 영세한 극단의 소극장 공연에서 흔히 느끼게 되는 그런 안쓰러움과 민망함이 없다. 게다가 알아두면 쓸 데 있을 페미니즘 역사 속 논쟁이라든지 프라이버시, 리얼리티 TV, 포르노그래피, 슬래셔 영화(slasher films)와 같은 흡입력 있는 주제들을 환기시키고 있으니 지적으로도 기분 좋은 자극을 준다. ‘페미니즘 연극’임을 표방했음에도, ‘페미니즘’이란 단어 하나 등장하지 않는 퓰리처상의 소개 문구를 그대로 적용해도 무방할 만큼, 이 연극은 원작의 내용과 분위기에 매우 충실하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원작에선 가벼운 대화로 처리되고 있는 내용들을 새롭게 조명하는 연출도 있다. 예를 들면 베르히만의 영화 <제7의 봉인>에서 기사가 죽음과 체스를 두는 장면을 영상으로 구현한 뒤, 이 영상을 무대 위 두 남녀의 체스를 두는 장면과 겹쳐 놓으면서 이 두 장면 간의 유비를 통해 원작에도 없는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켰다. 하지만 이 연극은 그 재현 방식 때문이 아닌 원작의 내용적 특징에 기대어 페미니즘에 대한 사유를 환기시키는 극이므로, ‘페미니즘의 쟁점’을 재현한다는 의미에서 ‘페미니즘 연극’으로 규정될 수 있겠다.
소질 없는 페미니스트들의 '마티니 공동체'를 위하여
연극은 극중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시종일관 유쾌한 톤을 유지하면서 인생의 과도기에 선 두 여성, 캐서린과 그웬의 위기를 진단한다. 캐서린은 전문적인 학자로서, 그웬은 전업주부로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인생의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형체 모를 공허와 마주치기는 둘 다 마찬가지다. 결국 그들은 쌓아왔던 행복들의 정체에 대해 재고하기 시작한다.
특히 이 극은 심정적으로 페미니즘을 연구하는 교수이자 유명작가인 캐서린의 편에 서서, 그녀가 겪는 삶의 ‘환희, 물집, 상처’를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극화하고 있다. 연극을 보다 보면 캐서린을 매개로, 고학력의 전문 직업을 갖고 성공한, 그러나 어머니와 단 둘이 외롭게 미혼으로 사는 조건의 여성에 어느새 감정 이입되어, 그런 여성이 행복을 추구하려면 일 외에 사랑과 결혼에 대해선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 하는 문제에 대해 고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 극이 캐서린 대 이 주인공을 빛낼 다수의 조연 여성들 간의 대위법적 구성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순 없다. 오히려 이 극은 여성성이 하나의 보편적 본질로 환원될 수 없음을 보이면서 서로 다른 세대의 (같은 세대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다수의 이질적인 여성들과 그 생각들을 무대에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서로 세대도 다르고 환경도 다른, 그 때문에 선택한 삶의 노선도 삶에 대한 가치설정도 서로 다른, 그러나 여성으로서의 삶에 똑같이 부침을 겪는 여성들이 각자의 문제들을 각자의 언어로써 표현하고 소통함으로써 공감에 이를 수는 없는지 살핀다.
그런 소통이 앨리스와 캐서린의 거실에서 오후 5시가 되면 앨리스로 상징되는 선구적 세대가 마련한 마티니를 건배하는 일로 비유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보다 엄밀히 보자면 마지막 무대에서 앨리스, 에이버리가 캐서린과 함께 그녀의 ‘환희, 물집, 화상’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남성으로부터 선택받지 못한 대가로서의 ‘자유’를 외치며 마티니를 건배하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이 연극은 여성의 행복에서 일과 결혼의 양립 가능성의 문제가 이론적 차원과는 다르게 여전히 현실적으로 부조리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확인시킨다. 동시에 ‘소질 없는 페미니스트들’은 이 문제에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 것인지 사유하도록 초대한다.
20대부터 70대까지, 서로 다른 욕망과 선택
10여 년 만에 캐서린은 어머니 앨리스가 심장 발작을 겪었단 소식을 듣고서 고향마을로 돌아온다. 돌아온 즉시 대학원 시절의 옛 동료들인 던과 그웬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과 과거에 나눴던 난해함이 아직 남아 있어 어색하다. 대학원 시절 던은 캐서린의 학문적 경쟁자이자 연인이었는데, 현재는 캐서린의 전 룸메이트였던 그웬과 결혼하여 줄리안, 대번이란 아들 둘을 낳아 가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서로 ‘진정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들이라 그런 관계의 불편함도 잠시일 뿐이다. 캐서린은 그 근처 대학에서 징계처장으로 일하는 던의 소개로 ‘페미니즘과 미디어’란 주제의 여름 학기 수업을 맡게 된다.
특이하게도 이 수업은 앨리스와 캐서린의 거실에서 캐주얼하게 이뤄지고 수강생은 예상치도 못했던 그웬과 그녀의 베이비시터인 에이버리, 단 두 명으로 단출하다. 이후 캐서린의 권유로 앨리스가 2세대 페미니즘 운동을 겪은 증언자 자격으로 그 생생한 경험을 들려주기 위해 매주 수업에 동참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이 수업에선 페미니즘을 둘러싸고 20대 에이버리부터 40대의 캐서린과 그웬, 70대의 앨리스 등 3세대의 서로 다른 여성들의 경험이 반영된 독특한 담론이 형성된다. 페미니즘의 역사와 이를 둘러싼 사회, 문화에 대한 논의가 회를 거듭하면 할수록, 각 인물들은 수업에서 서로가 나눴던 견해에 비추어 그들이 살아온 길을 반성하고 나아가야할 미래에 대해 현실적인 고민을 하게 된다.
먼저 캐서린을 보면, 그녀는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과 같은 페미니스트의 입장에 서서, 여성의 행복은 일이든 가정이든 여성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율적 선택권에 의존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운동의 대척점에 있던 반-페미니스트인 필리스 슐라플리Phyllis Schlafly의 논의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여, 남녀관계의 현실에서는 이론과 달리 무슨 일에서든 둘 다 50대 50으로 동등할 수는 없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야 하는 법인데, 대체로 그 희생이 여성에게 강요되는 실정임을 인정한다.
결과적으로 캐서린은 여성이 남성의 도움 없이는 현실적으로 일과 결혼 두 가지를 성공적으로 이루긴 어렵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개인적인 연애를 포기하면서까지 일을 선택하여 사회적인 인정을 받는 현실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심장발작은 곧 자신이 세상에 홀로 남겨질 수 있다는 공포를 자극한다. 캐서린은 어머니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할 만큼 철저한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여성의 독립이 사회에서의 고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길 바란다. 여기에 던과 그웬이 함께 있는 모습은 이제껏 일에 올인해서 살아온 인생에 대한 허무함과 고독감을 배가시킨다. 그 때문에 던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생각지도 못한 밀회의 주인공이 되면서, 아직 생기지도 않은 어머니의 빈자리를 오래 묵혀둔 이성애로 채우려는 생각을 해 본다.
두 번째, 그웬 또한 베티 프리단의 논의를 전용해서, 자신이 결혼을 선택한 것은 자율적인 결정이었으며 캐서린과 달리 학구적인 것에 대해 열의가 없었고 결혼도 그 자체로 삶의 만족감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남성에 경제적으로 의존할 필요성 때문에 결혼을 하느라 여성이 자신의 커리어를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낭만적 생각에 반대해 왔다.
그러나 ‘페미니즘과 포르노그래피’란 주제를 다루는 강의가 계기가 되어, 포르노 탐닉주의자에다 마약중독자이고 가난과 게으름을 명예처럼 달고 다니는 남편과 섹스도 없이 사는 결혼생활을 반추해보니 생각이 흔들린다. 자신의 결혼이 삶에 열의를 저버리고 경제적 필요 때문에 불가피하게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지 회의가 든다. 게다가 남편과 과거 연인관계였던 캐서린이 결혼을 포기하면서까지 하고자 하던 학업을 이루어 성공해서 돌아온 것을 보니, 그녀처럼 하고 싶은 일을 멋지게 하며 살고 싶단 생각이 일렁인다. 경제적으로 여유롭기만 하다면 베스트 프렌드인 큰 아들 줄리안을 데리고 뉴욕 같은 대도시에 가서 아들이 원하는 뮤지컬 배우의 꿈도 이루게 해 주고 자신도 못 다한 학업을 마치고 싶은 것이다.
세 번째, 캐서린의 어머니 앨리스는 여성의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이고 딸인 캐서린의 행복이 곧 자신의 행복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2세대 여성운동을 경험한 자로서 필리스 슐라플리처럼 여성의 평등에 반대하면서 이것이 결혼의 종말을 부르고 나아가 곧 문명의 종말을 불러올 것이라고 극단적으로 생각하진 않는다. 단지 필리스 슐라플리를 거쳐 루소로까지 거슬러가는 논의에서, 여성이 실제로 남성보다 더 약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보호를 자극하여 남성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약한 척 해야 한다는 주장엔 수긍이 간다.
그래서 페미니스트인 딸에게 닥터 필(Dr. Phil or Phil McGraw)의 『똑똑하게 사랑하라(Love Smart)』와 같은 책을 선물하며 남녀관계는 환상이라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니, 남성에게 애교 부리는 기술을 습득할 것을 권하는 식이다. 그러나 앨리스에겐 딸의 행복이 늘 우선이어서, 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역설적으로 자신의 신념쯤은 바로 위반해 버린다. 캐서린이 던과 외출할 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유부남임을 빤히 알면서도 캐서린에게 ‘원하면 던을 가져라’하는 충고를 한다. 딸에게 행복해지기 위해 남의 가정을 파괴하라는 것과 다름없다.
마지막으로 에이버리는 21살의 자유분방한 영혼으로서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에 자신을 가두진 않지만, 여성주의 운동 뿐 아니라 첨예화된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아 남녀평등적 사고와 현실적인 여성관 및 자유로운 성 관념을 이미 갖추고 있다. 에이버리는 교육받은 여성이 직업을 포기하고 결혼하는 것은 사회 시스템에 엿을 먹이는 반항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 여성이 고등 교육을 받는 데에 소요되는 비용은 엄청난데, 결혼은 그 투자비용에 상응하는 경제적 가치를 사회적으로 창출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에게도 제일 중요한 것은 직업을 갖는 일이고 이것만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다고 본다. 반면 사랑이나 가정은 자본의 힘만 있다면 언제든 아웃소싱 가능한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남자친구라고는 표현할 수는 없는, 함께 리얼리티 쇼 찍는 일을 하고 ‘독점적으로 자는 사이’인 루카스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자 그런 믿음도 흔들린다. 루카스가 여름 동안 인턴생활을 위해 LA로 갔다가 몰몬교를 믿는 새 여친을 사귄 것이다. 몰몬교라면 결혼하기 전엔 섹스를 해 선 안 된다는 교리를 지닌 종교가 아니던가! 자신과의 관계에서처럼 ‘쉬운’ 섹스가 가능하지 않아서 루카스가 그녀에게 끌리는 것은 아닌가 싶어 조바심이 든다. ‘우유를 공짜로 먹을 수 있는데 소를 왜 사겠느냐’라고 하면서 남자에게 선택받기 위해선 원하는 모든 것을 주면 안 된다던 앨리스의 말이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으로 실감된다.
두려움 없이 세상에 홀로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
이처럼 이 연극은 여성의 조건을 둘러싼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베티 프리단이나 필리스 슐라플리 같은 사상의 이론에 비추어 재고함은 물론, 여성 네 명의 삶에 침투시켜 현실 체험적으로 통찰하는 입체적 시도를 한다. 즉 이론과 현실의 상호 개입을 의도하면서 그 문제해결을 도모한다.
이 연극이 주요하게 다루는 문제는 ‘여성의 행복에서 일이 먼저냐, 가정이 먼저냐’하는 선택과 관련한 쟁점이다. 페미니즘의 역사로 보자면 베티 프리단을 필두로 하여 미국에서 발흥한 2세대 페미니즘의 이론적 쟁점이다. 그러나 우리 일상의 안팎에서 어제도 보았고 오늘도 보고 있으며 내일도 보게 될 것인, 그렇기 때문에 추상의 단어로 생각하기엔 머리 아픈 너무나 현실적인 여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가 제기하는 부조리나 갈등은 한 차례의 영혼 없는 잡담을 하다보면 가볍게 해소되어버릴 수도 있다. 소위 말하는 ‘아줌마 토크’를 통해, 여성들은 경험치를 최대한 살린 여성 문제들을 예리하게 떠들지만, 이상하게도 떠들면 떠들수록 그 끝에는 들인 시간과 노력이 무색하게 문제의 심각성의 희석되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잡담 전용 공간인 거실에서 페미니즘 전문가에 의해 페미니즘 강의를 한다는 이 연극의 설정은 매우 여러 가지 효과를 동시에 노린 재치 있는 설정이다. 이런 설정을 통해 여성이 체험한 현실적인 날선 문제들이 개인적인 차원의 방언으로 해소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동시에 페미니즘 이론이 개별적 여성들의 현실과 접점도 없이 강의무대에서 화석화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또 페미니즘 연극이 거두어야 할 효과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이러한 설정은 관객에게 여성의 현실적 문제를 사유하도록 제기하면서 그러한 사유의 초석이 되는 페미니즘 담론을 함께 소개한다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묘안이 된다. 이런 장치는 여성이 사적 차원에서 겪는 어려운 문제들이 사적 방식으로 해소되지 않고 공적인 담론을 거칠 때 보다 힘 있는 해결책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시도로 비춰진다.
페미니즘 강의를 액자 형식으로 설정한 것 외에 이 연극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캐서린과 그웬이 서로의 실현해보지 못한 욕망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각자의 삶의 자리를 서로 바꿔 본다는 설정이다. 즉 그웬은 뉴욕에 있는 캐서린에 집에 가서 첫째 아들 줄리안과 지내면서 학업을 마치기로, 캐서린은 던의 빼다 박은 둘째 아들 대번을 돌보면서 던과 함께 못 다한 사랑을 즐겨보기로 한다. 이것은 마치 망쳐 버린 시험 때문에 인생의 좌절을 다 긁어모으고 있을 때 선생님으로부터 시험 답안을 다시 쓸 ‘인생 찬스’를 받는 것과 같다. 나아가 이러한 선택의 교환, 자리의 교환이라는 주제는 여성에게 필연적으로 규정된 자리나 적합한 선택이란 있을 수 없음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Maybe this time I’ll be lucky..." 캐서린의 염원 같은 (원작에 없던) 노래가 던과의 밀회 순간부터 이미 깔리면서, 자리바꿈에 대한 캐서린의 열망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가 암시적으로 연출된다. 그러나 실험은 실패로 끝난다. 두 여성이 걸어왔던 삶의 자리가 두 여성의 정체성을 이미 굳혀버린 탓인지, 혹은 삶의 자리란 게 어떤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충분하지 않았던 탓인지, 그 이유는 모호하다. 분명한 건 캐서린과 그웬의 삶의 자리는 바뀌었지만 그 둘의 정체성은 쉽게 바뀔 수 없었다.
캐서린은 던과 한 달을 보내면서 함께 포르노도 보고, 섹스도 하고 ,밤새도록 술 마시며 영화 페스티벌도 열며 도덕적, 문법적, 영향학적으로 모든 기준을 완화한 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캐서린에게는 이 자리바꿈의 시도는 스스로의 자율적 결정에 의한 선택이었고, 충분히 후회 없이 성공 시킬 자신이 있었던 선택이었다. 그러나 캐서린의 자유로운 선택은 다른 선택들의 제약을 받는다. 오히려 이 실험의 성패는 다시 제자리로 편안히 돌아가고 싶은 던과 그웬에 의해 좌우된다.
던은 캐서린이 어떤 절제도 없이 자신의 쓰레기 같은 일상을 함께 하며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너무 낮추는 것도, 반대로 기대치를 너무 높여 외국 학회에 같이 가자는 둥 책을 집필해 보라는 둥 권유를 하는 것도 불편하기만 하다. 자신은 C학점을 받기만 해도 충분한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웬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그웬은 급진적 실험의 감행으로 인생의 용단을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경계에 대한 믿음만 강화시켰다. 뉴욕에서 싱글로 살면서 소개팅 어플을 깔아 원할 때마다 데이트 상대를 구하는 일도, 가장 나이 많은 학생으로 주목받으면서까지 학업을 이어나가는 것도, 무엇보다 게이인줄 알았던 아들에게 생긴 여자 친구의 존재를 인정하는 일도, 그녀가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녀는 큰 미끄럼틀에서 놀 유형이 아니라는 진단을 스스로 내린다.
그웬에게 자리바꿈 실험은 자신의 자리를 더욱 공고히 정체화하기 위해 필요했던 한순간의 일탈이었을 뿐으로, ’환희, 물집, 화상‘이란 굴곡의 경험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반면에 캐서린에게 이 실험은 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체할 던을 발견하는 ’환희‘의 순간이었고, 맞지 않는 새 신발을 신고자 노력할 때처럼 ’물집‘이 이는 시간이었다. 궁극에 가서는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선택을 받지 못한 채 사랑에 덴 흔적만 남기는 ’화상‘의 시간이었다. 캐서린이 경험한 이 ’환희, 물질, 화상‘의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운 좋게‘ 그 대가로서 자유를, 비로소 두려움 없이 세상에 홀로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의 순간을 열어준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