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나의 복수 연대기'는 총 3부작으로 나뉘어 연재됩니다.
오디션을 빙자해 직접 키스씬 상대역으로 나섰던 감독.
얼빠지게 당한 부끄러운 경험담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것이 나의 가장 강렬한 첫 기억이다.
그렇다. 부끄럽다. 그 자리에서 싸대기를 날리지 못했던 내 자신이. 이상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 머뭇거렸던 자신이. 화낼 줄 몰라서, 화가 나면 눈물이 나서, 연기에서 화내는 것조차 어색하던 과거의 내가. 고백하기 쪽팔린다. 긴 잡담이 될 것 같다. 그래도 되짚어본다. 내 전투의, 상처의, 복수의 역사는 어디서부터였을까.
그건 단편영화의 오디션이었다.
정확한 년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졸업하고 연기하겠다고 사방팔방 돌아다니기 시작한 스물 넷 언저리였으리라. 인터넷에 올라온 출처불명 단편영화의 시놉시스는 상당수가 내 눈으로 보기에도 허접했고, 특히나 여자 캐릭터의 상투성은 가관이었다. ‘몸매가 좋고 섹시한 이미지’, ‘된장녀 캐릭터’, ‘귀엽고 청순하고 웃는 게 이쁜 캐릭터입니다’. 그것들은 인물 설명이라기엔 너무도 게으른 뇌내망상 수준이었으나, 이 정도라도 써 주면 양반이었다. 시놉시스고 뭐고 밑도 끝도 없이 ‘열정 있는 20대 초반 여배우 구합니다. 예쁜 이미지. 페이는 교통비와 식대 지급’ 이 따위로 덩그러니 올라오는 게시글이 지금도 심심치 않다. 무슨 경험이라도 쌓고 싶은 지원자들이 부지기수기에, 그런 글에도 프로필은 수백 통씩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게 전해진 수많은 여자 배우들의 사진과 개인정보가 어떻게 쓰이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작은 건물의 대기실에는 온통 내 또래 여자들뿐이었다. 흔한 ‘미스테리 섹시녀’였던 오디션 배역은 보아하니 남자 캐릭터를 유혹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오디션장에 들어서자 감독으로 보이는 40대 남자 하나와 조감독처럼 보이는 20대 남자 하나, 그리고 카메라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딘가 또각또각 걷다가 뒤돌아서, 다가온 남자와 키스하는 장면을 연기해야 했다. ‘섹시하게’ 걷고 ‘유혹적인’ 눈빛을 쏘면 될 줄 알았더니 웬걸, 감독이 직접 상대역을 한단다. 진짜 키스하기 직전까지 상대역의 대사와 동작을 감독이 한다는 거다. 누가 들어도 웃기는 짓이었으나 ‘왜요 굳이?’라는 말을 못했다.
사실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내 얼굴 5센티 앞으로 들이민 감독의 면상을 마주했을 때, ‘오케이 컷’하고 외치기 전까지의 몇 초간이 생생하다. 중년남자의 그 상기된 얼굴과 인상적인 구취. 나는 나름의 ‘진정성 있는 유혹 연기’를 시전 중이었지만, 머릿속은 불쾌함과 딴 생각으로 가득했다. ‘내 연기 안 보고 자기 역에 몰입했냐? 왜 네 표정이 그렇게 떨려? 아, 입냄새 미친!’
오디션이 끝난 배우들도 다 남아 결과를 기다리라는 명령을 포함하여, 지금이야 그 모든 것이 지나가던 시바견도 코웃음 칠 절차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때의 내가 알 수 있는 건 그저 ‘기분이 나쁘다’는 느낌뿐이었다. 최종적으로 나와 나보다 한 살 어렸던 다른 여자 배우가 뽑혔다는 통보를 받았고, 나머지 배우들은 돌아갔다. 감독은 계약서를 쓰러 사무실로 가겠다며 어리바리한 남자 조감독이 운전하는 차에 우리 둘을 태우더니, 대뜸 호프집으로 갔다.
경험은 없지만 바보가 아니었으니 이상했다.
오디션도 이상했고 바로 계약도 이상했고 호프집도 이상했다. 하지만 생각했다. ‘아직은 아냐.’ 혹시 모를 일말의 가능성을 바로 내칠 수 있을 만한 여유가 내겐 없었다. 적은 돈이고 이상한 배역이고 간에 포트폴리오가 시급했다.
조금만 더 참아보기로 마음먹은 뒤 생맥주를 시켰다. 감독은 자신이 내 학교 선배라는 이야기, 자신이 밟아온 사업의 역사를 스크랩북 형식으로 꺼내들더니 자랑했다. 적당히 맞장구치며 언제 계약 이야기를 할지 기다렸다. 이야기해보고 친해지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부류일 수 있지, 합리화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계약 이야기는 실종 상태.
감독은 맥주를 한잔 더 시키며 자기가 구상한 형편없는 장편 시나리오 썰을 풀기 시작하더니, 그 중 섹스 로봇과의 섹스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나보다 한 살 어렸던 옆자리의 친구가 어색해 하며 대답을 이어갔고, 감독은 싱글거리며 턱을 괴고 그 이야기를 음미했으며, 그때로서는 유일한 방어막처럼 느껴졌던 젊은 조감독은 어수룩하게 맞장구치고 있을 뿐이었다. 더 이상 참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면 여기라고 생각했다. 지금보다 훨씬 화를 못 내던 그때도,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던 그때도, 차가운 화가 터져 나왔다.
지금 저희 여기 앉혀놓고 뭐하시는 거예요? 계약서 쓰러 가신다면서요.
흐뭇하게 ‘여배우가 들려주는 섹스씬’ 이야기를 듣던 감독의 표정은 순식간에 고깝고 냉랭하게 변했다. “그런 식으로 할 거면 하지 마, 나 아쉽지 않아. 그래가지고 어디 가서 아무 것도 못해, 너.” 뭐 그런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그 반응을 본 순간 맥이 탁 풀려 나 또한 한 톨도 아쉽지 않았다. “이런 거 아무 것도 못해도 상관없을 거 같은데요. 잘 맞는 사람 찾아 잘 해보세요.” 머릿속으로는 드라마에서처럼 차갑고 멋지게 자리를 박차고 나와야지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가방과 외투를 챙기느라 의자를 끌고 버벅거렸다. 하루를 낭비하고 호프집을 나와 저녁공기를 맞는 기분은 상쾌하고 흥분될 법도 했으나 사실 비참했다.
몇 걸음 걸었을 때 뒤에서 “언니!”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같이 앉아있던 한 살 아래의 친구였다. “고마워요 언니, 저도 이상했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고마워요 언니.” 아, 데리고 나올 걸. 난 자리를 박차는 그 순간에조차, 나만 유별난 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드라마였다면 눈물이 글썽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친구와 나는 지하철역까지 함께 걸으며 허탈함에 웃었다.
그 새끼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가끔 생각한다. 그 새끼는 혹시 다른 사람들한테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차피 다시 안 볼 사인데, 뺨이라도 치고 올 걸. 사진이라도 찍어 뿌릴걸. 아냐, 그런 짓을 하면 상해죄나 명예훼손에 걸릴 수도 있지. 혹시 경찰서에 간다 쳐도 ‘진짜 영화 만들려고 했다’ 하면 그만이잖아. 그런 생각을 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구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겠구나. 이 허탈한 저녁 공기는 무수히 많은 순간 많은 배우들에게, 있어왔을 것이다.
아니, 그런 일만 골라서 겪었어요? 멍청하네.
그럴 수도 있다. 나 같은 일은 전혀 겪지 않고 좋은 사람만 만나 작업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최근에 씨네21에 올라온 ‘영화 현장에서의 성폭력’ 기사를 봤는데, 그 댓글에 역시 그런 말들이 있었다. ‘내가 겪은 현장에선 저런 일 없었는데 뭐임? 다른 세상임?’ 그러나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다른 세상도 소설도 아니다. 그 오디션장에는 어림잡아 스물이 넘는 여자 배우들이 존재했고, 호프집에는 내 뒤를 따라서야 나올 수 있었던 나보다도 어린 친구가 있었다. 수백 명의 무명 배우들, 심지어 약간 인지도 있는 배우들, 조그만 기획사들까지 우르르 제작도 감독도 불확실한 ‘독립 장편’, ‘상업 장편’ 오디션에 줄을 서는 걸 몇 번이나 보았다. 종종 어떤 회사들은 그 오디션 과정을 이용해 투자를 받고 도망치거나 혹은 크랭크인에 실패하고 잠적해버린다.
거기서 휘둘린 누구도 백치는 아니다. 다만 누구에게도 ‘확실히 알 수 있는 정보’가 없을 뿐이다. ‘이거 딱 봐도 사짜 아냐?’ 했다가도 그 이상한 영화가 제작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투자사와 스타급 주연 배우가 확정된 상업영화는 거의 대부분의 배역을 오디션으로 뽑지 않는다. 그래서 인지도 없는 배우들은 학생 단편과 ‘진짜 큰’ 상업영화 사이 요만큼의 틈바구니 안에서 연기할 만한 배역을 찾아내고자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내 경험상 그 사이에 들어가는 영화 공고글의 과반수는 제작되지 않거나 성인영화다.
이쯤 되면 이런 질문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능력이 안 되는데 빨리 뜨고 스타 되고 싶어서 눈이 머는 거 아냐? 배우가 연기력을 차분히 다지고 바닥부터 올라와야지, 아니면 진정성 있게 연극을 하든가. 순서대로 대답해본다면 첫째, 일단 그 사짜들과 뒹구는 거기가 바로 바닥이다. 둘째, 연극계는 어떤 면에선 더 치사하고 교묘한 성폭력이 이루어지기에 참 쉬운 구조다.
*편집자주: '나의 복수 연대기'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