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나라면?
여성 대부분은 성폭력의 피해자 위치에 쉽게 설 수 있다. 크고 작은 성폭력을 이미 경험한 사람도 많다. 하지만 위치를 바꿔보면 어떨까? 어떤 조직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성폭력 피해자를 돌보고 가해자에게 마땅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면? 내가 피해자의 지인이라면 어떻게 하는 게 가장 도움이 될까? 반대로 가해자의 지인이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
반면교사는 많다. 2018년 3월6일, 3.8 세계 여성의 날 ‘페미퍼레이드’ 공동주최 기획단에 문제제기가 들어왔다. 퍼레이드 참가가 예정돼 있던 성소수자 인권단체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이하 행성인)’에 대한 고발이었다. 행성인 회원이 성폭력 가해를 저질렀고, 피해자와 연대자들이 이를 거듭 고발해도 행성인은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는데, 과연 이런 단체가 ‘페미퍼레이드’ 참가 자격이 있냐는 지적이었다.
3월17일, 행성인은 공식적으로 단체에서 있었던 복수의 성폭력 가해와 이에 대한 미흡한 조치, 방조, 묵인을 사과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행성인 활동가는 SNS에서 “당시 가해자가 이미 나가버린 상황이어서 제명과 탈퇴 이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처벌을 해도 구속력이 없다.” “인력도 불충분한 비영리 단체라서 어쩔 수 없었다.”등 행성인을 옹호하는 글을 남겨 비판을 받았다.
흔한 반면교사, 드문 롤모델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모든 성폭력이 뿌리 뽑히는 그날을 위해서도 이런 1차원적인 변명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리가 없다. 그러나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느슨한 연대 단체, 규모가 작은 비영리 단체, 돈이나 이익이 아닌 ‘좋은 일’을 위해 모인 사람들일수록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비슷한 변명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우리 단체에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할 수록 위험하다. 반면교사는 많은데, 롤모델은 많지 않다.
BIYN(Basic Income Youth Network,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의 회원인 한주연씨와 김신아씨는 더 이상 무방비한 상태를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안심하고 활동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들기 위해 대책을 꾸리기 시작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단체 내 성폭력·성평등 대책 및 규약을 만들겠다고 나선 계기가 있나?
주연 00 계 내 성폭력 운동도 그렇고, 운동권 단체나 소수 단위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사건을 보며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언제 내가 속한 단체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최소한의 장치를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다른 느슨한 작은 조직과 이를 공유하고 싶었다.
신아 2017년 4월부터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하고 있다. 주연씨가 함께 준비하자고 제안해줬고, 필요성에 공감해서 합류했다.
어떤 방식으로 만들었나?
신아 2017년 10월28일 BIYN 총회에서 워크샵을 열었다. <우리 단체에서 생긴 일>이라는 제목으로 조직 내에서 또는 조직 회원이 외부 활동 중에 성폭력 가해, 피해 당사자가 됐다는 시뮬레이션을 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 공개된 자료를 활용해 실제 발생했던 성폭력 사건 사례들을 각색했다. 가해자의 주변인, 피해자의 주변인, 가해에 대응하고 피해를 돌봐야 하는 실무적인 입장 등 역할을 상상하고 토론했다. 조직 내 성폭력 사건을 막연한 이야기가 아닌 ‘몸에 와 닿는 감각’으로 바꾸는 게 관건이었다.
주연 처음에는 ‘규약 몇 개 만들지 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상상하기 시작하니까 장난이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럽고, 잘 모르겠고. 워크숍 참여자 대다수가 ‘실무적’으로 뭘 해야 하는지, 어떤 규정이 필요한지, 어떤 판단이 옳은지, 어떤 절차로 조사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아무래도 잘못된 성폭력 대응 사례를 많이 보다 보니, 이성적이고 정확한 사건 처리를 바라게 되더라.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라는 의견이 아주 많았다. 심지어 ‘차라리 경찰에게 맡겨야 하나?’하는 고민도 했다. 2차 가해를 숨 쉬듯이 하는 경찰에게. 그만큼 적절한 해결 사례를 본 적이 없다 보니 자신이 없는 거다.
성폭력 피해자가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신아 워크숍에서 성폭력 사건을 대응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을 함께 세울 수 있었다. ‘피해자가 사건 이후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조직이 성폭력 사건에 대응하는 목표다. 최대한 많은 조직 구성원이 이런 원칙을 함께 만들고, 합의하고, 이를 관철하기 위한 절차를 만들고, 우리가 가진 인력이나 자본 등 자원을 확인했다. 세부적인 절차는 조직의 형태나 특징, 동원할 수 있는 자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중요한 건 이렇게 정해진 절차가 글자로만 끝나거나 기계적으로 이행되지 않고 ‘성실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점이다. 훌륭한 규정과 나무랄 데 없는 절차가 존재한다 해도, 정작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가 소외되기 쉽다.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신입 회원이 들어올 때마다 다시 고민을 환기하고, 연습하고, 전달하기로 했다.
주연 성폭력은 일상적이다.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피해자가 그게 폭력임을 인지하지 못할 때도 있고, 말할 수 있는 창구가 없어 묻힐 때도 있지만, 끊임없이 발생한다. 어떤 조직도 성역이 될 수 없다. 조직 구성원이 다 함께 이에 대응할 준비를 하는 게 우리 워크숍의 목적이었다.
구체적으로 마련된 장치는 무엇인가?
주연 성평등·성폭력에 관한 약속문과 규정을 만들었다. 약속문은 일종의 선언이고, 사전 예방 장치다. 규정은 사후 처리에 관련된 내용이 대다수다. 사건 조사와 대응 이외에도 성평등·성폭력 관련 정기적인 교육(분기별 1회)과 워크숍도 하기로 했다. 조직의 일원이 조직의 이름을 걸고 오픈 세미나, 강연 등 외부활동을 할 때 점검하는 체크리스트도 만들었다.
신아 워크숍을 하면서 성평등·성폭력에 대응할 상시 전담 조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성평등팀을 만들기로 했다. 성평등팀은 규약을 갱신하고, 교육을 진행하고, 성폭력 사건 발생 시 TF를 구성할 수 있도록 외부 자문 인력과 연락망을 유지한다. 사후 대응을 위해서는 실무적인 이해를 넓혀야 하기 때문에, 외부 전문가와 조직이 협약을 맺고 교육을 받는 것도 고려 중이다. 2008년에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성폭력 대응 가이드라인 책자를 발간한 적이 있는데, 핵심적인 부분이 잘 나와 있다.
미리 괴로운 상상을 하자
주연 다른 작은 조직에서도 이런 고민을 나누면 좋겠다. 함께 괴로운 상상을 '미리' 해 보는 것이다. 질문을 하지 않고, 역량을 키우지 않고, 손 놓고 있다가 터지고 나서 무력함을 느끼는 것보다 낫다. 우리 조직 안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이 발생할 수 있을지, 온라인에서는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가해자 처벌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만약 가해자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활동을 그만둬버리면 조직으로서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지… 기업이나 학교라면 가해자를 쉽게 처벌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운동 단체와 같은 자발성에 기댄 느슨한 조직은 좀 더 고민해야 한다. 워크숍에서는 가해자를 ‘설득’하는 과정도 필요하겠다는 얘기가 나왔었다. 가해자가 사과를 하고 책임을 지도록 설득하는 것도 조직(또는 가해자 주변인)의 책임이라는 의견이었다.
다른 조직도 비슷한 걸 만들고 싶다면 어떻게 하면 되나?
신아 먼저 조직 내에서 “같이 성폭력 대응 절차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두번째는 워크숍을 통해 대응 원칙을 세운다. 세번째는 상상력을 동원해 그 원칙을 하나하나 대입해가며 자세한 절차를 만든다. 이 규정 한 줄이 나중에 어떻게 실행될지, 나중에 이를 적용할 입장에서 최대한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내용인가? 이 조항이 유효할까? 우리 조직은 그런 환경인가? 우리도 녹색당이나 연세대학교 성폭력상담실, 다른 진보운동 단체 내규를 많이 참조했지만 결국 우리 조직에 맞게 많이 수정했다.
주연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 결과를 만드는 과정을 공유하는 게 더 중요하다. 그 어떤 교육과정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을 스스로, 또한 함께 찾아가야 한다. 진보운동 조직 뿐 아니라 취미생활, 온라인 공동체 등 어떤 종류의 활동 단체일지라도 이런 과정을 꼭 한 번은 거쳤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 많은 여성이 더 마음껏 활동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주연씨와 김신아씨는 구체적인 성평등·성폭력 약속문과 규정을 2018년 4월8일 오후4시부터 7시까지 서울 마포구 망원동 카페 나하에서 열릴 예정인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제13회 총회 BIYN 리-런칭 파티’에서 <작은 조직에서 성평등 실천하기>라는 제목으로 공유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