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당갈>은 인도 여성 프로레슬러의 탄생 비화다. 예상하다시피, 그들은 ‘스포츠’ 머리를 하고, 인도에선 남성들의 전유물인 바지를 입은 채, 내내 뛰거나 구른다. 레슬러라는 특수한 직업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여성’이라는 굴레를 벗고 보편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생각하고 행동한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다.
레슬링을 방해하는 것을 없애다
주인공 '기타'는 어렸을 때부터 승부욕이 강하긴 했어도 레슬링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어린 기타와 그의 동생 바비타는 힘든 레슬링 훈련을 그만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여러 가지 이유를 댄다.
"학교에서 애들이 (바지를 입고 다니는) 언니를 남자라고 놀려요. 슬프죠?"
"모래에서 뒹구니까 (긴) 머리카락이 엉망이 돼요."
아버지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나 레슬링을 방해하는 '머리털'은 문제라며, 둘의 머리를 짧게 자른다.
기타는 머리카락을 자를 때 서럽게 운다. 마치 <빨간 머리 앤>의 앤처럼, 세상이 무너지듯이. 기타는 자신의 머리를 그 꼴로 만든 아버지에게 대항하는 의미로, 트레이닝을 째고 친구의 결혼식에 치장을 하고 놀러간다. 그런데 기타에게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부는 의외의 조언을 한다.
팔려가지 않기 위해
레슬링
(나를 봐,) 우리의 현실은 이래. 딸은 집안일을 하다가 14살이 되면 결혼하는 거야. 짐을 치우듯이, 본 적도 없는 남자에게 넘겨지지. (...) 하지만 너희 아빠는 너희를 자식으로 여기시잖아. 그래야 너희에게 미래와 인생이 생기니까.
탈코르셋 운동은 4B(비혼, 비출산, 비연애, 비섹스)와 함께한다. 남성을 포함한 타인에게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다는 인식을 전제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기타는 친구의 말을 통해 깨닫는다. 내가 왜 '여성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지? 나는 연애엔 관심 없고, 결혼은 절대 싫은데.
기타는 결혼시장에 팔리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아버지가 권유하는 레슬러의 길을 가기로 한다. 생각해 보니, 긴 머리카락은 살아남는 데에 별로 필요 없는 것이었다.
기타의 친구의 말처럼, ‘딸’이 아니라 ‘자식’으로 여겨진다는 것은 곧 여성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뜻한다. 보편적인 인간의 몸은 움직이고 기능한다. 기능하는 몸은 스스로 느낄 수 있다. 가령, 달리기를 하면서 근육의 수축감을 느끼는 것처럼. 그런데 탈코르셋 이전의 나를 생각하면, 내 몸은 내게 감각보다는 이미지로 다가왔다. (유일한 감각은 고통이었다.) 내 몸은 양감을 잃어버리고 마치 인스타그램에 올라간 사진 한 장처럼 ‘이미지’가 되었다.
그 ‘이미지’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이 영화에서 기타는 세 번 거울을 본다. 첫 번째는 앞서 말한 친구의 결혼식에 갈 때이고, 두 번째는 성인이 되어 독립한 후 이성애를 기반으로 한 또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결혼시장에 팔려가지 않기로 다짐했건만, 이번엔 더 교묘한 이성애의 함정에 빠진다.
영화는 이것이 청춘의 한 면인 것처럼 포장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기타가 꾸미기 이전에는 기타를 쳐다보지 않는 남성들이, 꾸민 이후에는 기타를 흘끗 보며 지나치는 것이, 똑같은 구도로 반복된다. 결국 기타의 ‘꾸밈’으로 달라진 것은 타인, 특히나 남성의 시선뿐이다.
거울은 유해하다
내가 탈코르셋을 시작했던 계기가 떠오른다. “거울 없이 살아보았다”라는 제목의 짧은 프로젝트 영상을 봤다. 프로젝트를 진행한 미국의 미디어 버즈피드는 참가자에게 일주일 동안 거울을 가리거나 의식적으로 보지 않고 지내게 했다. 그들은 단 일주일 만에 자신의 몸을 눈에 띄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걸 보고 나도 재미 삼아 내 방의 거울을 가려보았다. 2년이 지난 지금도 내 방에 거울은 없다.
터키의 소설가 엘리프 샤팍의 말에 따르면, 터키의 여자들은 평소에 거울을 천으로 가려놓거나 거울의 뒷면이 보이게끔 뒤집에서 벽에 걸어둔다고 한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너무 오래 보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앎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의 저자 러네이 엥겔른은 어린 아이들에게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제한하는 것처럼, 거울을 보는 시간을 제한하는 교육 방식을 제시한다.
당신의 몸은
관음의 대상이 아니다
기타가 자신의 몸을 꾸미는 동안, 코치는 기타를 성장시키는 데에 관심이 없었다. 기타는 국제 대회 출전권을 계속해서 놓치면서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다. 기타는 몸 바깥을 꾸미는 데 기울였던 시간을 몸 안의 기능을 되살리는 데에 쓴다. 그리고 그 선언으로서, 거울 앞에서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른다.
“자신의 몸을 전체로서 통합된, 세상을 탐험하는 도구로서 생각하세요. 허벅지 두께에 대해 그만 걱정하고, 당신의 허벅지가 가진 힘에 대해 생각하세요. 당신 팔뚝이 병적인 것처럼 마르기를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의 팔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가까이하는 용도예요. 당신의 몸은 관음되어지는 게 아니라, 생산하는 용도예요.” - 러네이 엥겔른
<당갈>을 보고 나면 왜 ‘스포츠 머리’가 ‘남자 머리’인지 의문이 든다. 여성은 남성과 똑같이 인간이고, 누군가에 의해 팔릴 수 없는 존엄을 가지고 있으며, 운동을 할 수 있는 근육을 가지고 있고, 스포츠 머리도 할 수 있다. 너무 당연한 소리인가? 다음 화에서는 당연하게 그걸 누리고 있는 여자가 나오는 영화 <거꾸로 가는 남자>를 다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