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단어, 철면피
뻔뻔한 행동을 대놓고 하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철면피' 혹은 '낯짝이 두껍다'라고 표현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쿠바에도 비슷한 단어가 있다는 것이다. 막간 나오미의 쿠바식 스페인어 교실을 다시 열어보자.
철면피라는 뜻을 전달하고 싶을 때, 쿠바식으로 표현하자면 두 가지의 단어가 사용이 가능하다. 첫번째 단어는 데스까라도(Descarado)다. 쿠바노들이 다방면으로 참 많이 쓰는 단어다. 두번째는 까라두라(Caradura)다. '까라'는 얼굴, '두라'는 두껍다는 뜻이다. 낯짝이 두껍다는 한국말과 일맥상통한다.
두 단어를 뜻하는 제스처도 존재한다. 주먹으로 한쪽 볼을 두번 톡톡 두들기는 것이다. 말로 표현하기는 애매하나 의사를 주고 받고싶을 때 주로 사용한다. 이 두 단어의 다양한 쓰임새에 대해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1. 사기꾼을 지칭하는 대명사
"여기 쿠바는 더운 나라인데도 아이스크림이 비싸네요."
"지금 드시고 계시는 그 아이스크림이요? 얼마에 사셨어요?"
"2쿡이요..."
"아이고! 데스까라도! 사기쳤네! 그거 2쿱이에요."
2. 이기주의자를 향한 비난의 시선
비아술 버스 내에서 심하게 의자를 젖힌 외국인을 향해, 눈마주친 사람들끼리 서로 주먹으로 얼굴을 치며 어이없다는 사인을 보낸다.
3. 누구나 아는 정가를 심하게 올린 경우
"엘레나! 여행자거리에 있는 치킨 집 알죠? 거기 물 한 병에 얼마게요?
"글쎄... 한 1.5쿡(물 한 병의 정가는 0.75~1쿡)?"
"3쿡! 대박이죠?"
"뭐?? 세상에 그런 데스까라도를 봤나!"
이런 식으로 활용이 가능하다. 지금부터는 내가 실제로 겪었던 쿠바의 다양한 철면피 사례를 소개해보겠다.
내 직업은 간호사야
시간을 거슬러, 나오미가 가장 처음 쿠바에 도착한 순간으로 돌아가보자. 늦은 밤 까사를 찾느라 호된 신고식을 치뤘던 그 때로 말이다. 사실 그 때 나는 그냥 헤맨 것이 아니다. 나를 두 번 지치게 만들었던 복병이 있었으니 바로 데스까라도, 쿠바 철면피와의 만남이었다.
그들은 2인 1조였다. 늦은 밤, 두리번거리며 까사를 찾는 내게 다가와 영어로 말을 걸었다.
데스까라도 "무엇을 찾고 있니?"
나오미 "J 까사를 찾고 있어."
데스까라도 "아! 거기 알아. 우리가 데려다줄게. 내 직업은 간호사야. 이 사람은 내 남편이고. 자 사진을 봐. 내 아들이야. 귀엽지?"
나오미 "오! 신기하다. 나도 간호사인데? 난 중환자실에서 일해. 너는 어느 파트니?"
데스까라도 "음... 자, 여기 다 왔어. J 까사야. 기다려 봐. 방이 있나 알아볼게."
2인 1조 사기꾼의 타겟은 쿠바에 처음 도착하여 멘붕의 조짐이 보이는 여행자이다. 이들은 전문직에 종사한다며 자신들의 신상을 밝히고, 아이 사진까지 보여주며 의심하지 않도록 만든다. J 까사를 알고 있는 척, 다른 까사로 데리고 가서 까사 주인으로부터 커미션을 챙기는 수법이 그들의 전형적인 사기스타일이다.
그들은 최대한 먼 곳에 있는 까사로 타겟을 안내하며 걷는 동안 모히또 축제, 살사 축제, 시가 축제가 있다고 소개해준다고 한다. 물론 특별한 축제는 없다. 쿠바에서는 언제나 도처에서 라이브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고, 시가를 피우니까. 그들에게 낚여서 이 장소들 중 한 군데로 따라가게 되면 어마어마한 금액을 치르게 된다. 먼저 그들의 커미션이 포함된 술 한 잔 값을 내야 하고, 분명 그들은 그대로 자리를 뜨지 않을 테니, '축제'가 끝날 때까지 한참 동안 먹고 마신 그들의 술값마저 고스란히 내야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우연히도 나의 전 직업은 간호사였다. 그 여성이 반가워하는 나에게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던 순간, 나는 어떤 조짐을 눈치채 버렸다. 거기다 나는 돈이 정말 단 한 푼도 없어 그 어떤 축제에도 따라갈 수 없었다. J까사는 빈 침실이 없으므로 다른 까사를 찾아준다는 말에 그들을 따라다녔지만, 그 동안에도 마음 속 의심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모든 까사가 빈방이 없다는 그들의 말만 믿고 그렇게 길 위에서 세 시간여를 헤맨 끝에, 겨우겨우 한 까사에 짐을 풀었다. 문 밖의 '간호사'는 내게 수고비를 요구했다. 하지만 진실로 줄 돈이 없었다. 계속 돈이 없다고 말하자 굳은 표정의 그는 내게 말했다.
"돈 줄 생각이 없다면 입고 있는 바지라도 벗어주는게 어때?"
그 날 이후, 쿠바 여행을 하는 내내 중앙공원 벤치에서 사기 칠 대상을 찾으며 앉아있는 그 여성을 보았다. 살다살다 그렇게 비번 많은 간호사는 처음 봤다. 하하하.
되로 받고 말로 주기
이번 데스까라도는 방금 공원에서 겪은 아주 따끈따끈한 사건이다. 쿠바 여행 가이드를 하고 있는 나의 고객 중 한 분께서 '하루 동안 쿱으로만 생활하기'를 하신단다. 로컬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추천하고, 쿱으로 먹을 수 있는 간식을 가르쳐 드린 후, 그 외에도 쿠바에서 쿱으로 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제시했다. 버스 타고 꼬히마르 가기, 콜렉티보 타고 코펠리아 다녀 오기 등이다. 고객님의 선택은, 그저 정처없이 아바나 골목을 돌아다니는 것. 우리는 그렇게 땡볕에서 5시간을 보냈다.
중간 중간 우리가 열사병에 쓰러지지 않게 잡아 준 고마운 존재가 있었으니, 아바나 구 시가지 곳곳에 있는 공원이었다. 세르반떼스 공원의 그늘에서 잠시 땀을 식힐 때였다. 레스토랑을 소개하고 커미션을 받는 쿠바 남자들이 뒤에서 계속 말을 걸었다. 더위에 너무 지친데다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아 스페인어를 못 알아듣는 척했다. 그들은 대화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표정을 읽었으나, 그럼에도 우리가 뒤를 돌아볼 때까지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집단 데스까라도였다.
"여기 좋은 레스토랑이 있어."
"코히바? 시가?"
"모히또? 살사 페스티발!"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하던 중, 가장 어린 남자아이가 내 기폭장치를 건드리고 말았다.
"뚱뚱하고 못된 중국년."
굳은 얼굴로 슬며시 뒤돌아봤다. 못된 년도 좋고 중국년도 상관없지만 뚱뚱하고 못된 중국년은 봐줄 수가 없었다. 난 더위에 지쳐 있었다. 그들이 아니어도 이미 불쾌지수는 하늘을 찌르던 중이었다.
"야. 시끄러워! 그만 좀 떠들어라. 못생겨가지고. 야! 너 진짜 못생겼어. 전세계에서 내가 본 남자 중에 네가 제일 못생겼어. 몸은 바짝 말랐고, 머리만 엄청 커서 숟가락 같이 생겼거든? 알고 있니? 그런 얼굴로 네가 어떻게 나를 평가하니? 거울 없어?"
한국산 분노와 어눌한 발음이지만 속사포로 튀어나가는 스페인어가 결합되어 완성된 '이 악물고 모욕주기'. 순간 정적이 흘렀지만, 집단 데스까라도답게 다시 철면피를 깔고 내게 말했다.
"하하하! 스페인어 할 줄 알잖아? 나는 영어도 스페인어도 못하는 줄 알았네!"
"장난인 거 알지? 너 안 뚱뚱해. 너 예뻐."
"쿠바 남자친구 필요하니? 나 어때?"
그제라도 정중히 사과를 했으면 마음이나 풀렸을까? 저 뻔뻔한 태도에 더 화가 난 나는 2차 폭격을 가했다.
"네 말이 맞아. 나 뚱뚱하고 나쁜 중국년이야. 너는 농담이라 했지만 나는 심각해. 너 운동 좀 해. 머리통은 깎을 수가 없으니 몸을 키워야지. 진심으로 너 숟가락이 걸어다니는 것처럼 보인다니까? 그리고 너 너무 못생겼어. 하루에 몇 명이나 너랑 같이 가니? 나 같으면 더 잘생긴 사람 따라갈 것 같은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대화를 듣고 질겁을 하고 놀랐다. 공원 한복판, 많은 사람들 앞에서 평생 들을 치욕을 다 경험한 그는 표정이 제대로 굳었다. 집단 데스까라도는 슬며시 일어나 장소를 옮겼고, 나와 일행 역시 조금 더 땀을 식힌 뒤 장소를 옮겼다.
나의 저기압에 희생된 그에게는 조금 미안하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목전에서 남의 외모를 비하하는 몰상식한 행동은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길 바란다. 앞으로도 살 날이 많은 젊은 청년이여! 부디 얼굴에 쓴 그 두꺼운 가죽을 벗어던지시오!
지금 대화하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을 것 같아!
세 번째 사례 역시 최근에 경험한 일이다.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아바나로 오는 비아술 버스에서 역대급 철면피를 만났다.
16시간의 긴 이동 노선 중, 그 날따라 옆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아 넓은 좌석에서 편안히 올라갔다. 보기 드문 행운이 깃든 날이었다. '올긴'이라는 동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 한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럼과 설탕, 그리고 사탕수수의 공정을 전반적으로 취급하는 큰 회사의 중역이라 본인을 소개했다. 아바나에 7일 간 큰 회의가 있어 가는 길인데 좌석이 없어서 화장실 바로 옆에 앉아 가고 있다고 하셨다.
이 때 아무 생각없이 베푼 호의가 화살이 되어 나를 저격할 줄이야. 비어있던 나의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는 할 말이 매우 많은 분이셨다. 한국과 쿠바, 각 나라의 인구 수부터 정치 관련 이슈, 북한 이야기 등등 많은 것들을 물어보셨다. 매우 빠르지만 깨끗하지 않은 그의 발음 때문에 대화 내용을 약 30프로 정도 밖에 못 알아 들었지만, 성의껏 답변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답변하는 동안에도 자신의 할 말이 너무 급해 내 말을 툭툭 잘랐다.
한 시간여 그의 속사포랩을 들어주다 너무 피곤해진 나는 은근슬쩍 눈을 감았다. 보통 눈을 감으면 그대로 대화가 끊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강력한 데스까라도! 정말 대단했다. 옆에서 내 어깨를 두 번 툭툭 치더니, 내가 눈을 뜨자 "....내가 하는 일은 말야? 사탕수수 밭을 관리 감독하고...." 하고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이 쯤 되면 상대방이 알아듣게 말하고 싶은 건지 아닌 건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아저씨의 말이 점점 더 빨라졌다.
"저... 너무 어려운 단어가 많아 이해가 잘 안되네요. 미안합니다. 제가 아직 언어가 서툴러서..."
"응? 아냐. 너의 스페인어는 완벽해! 그래서 그 사탕수수들을 말이지..."
아냐! 아냐! 완벽하지 않다고!!
주변에 앉은 아주머니들이 내게 불쌍한 희생양을 바라 보는 듯한 눈초리를 보냈다. 저기 앞자리에 앉은 누군가는 본인의 얼굴을 주먹으로 두 번 툭툭 치며 (데스까라도를 뜻하는 제스처) 본인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자는 시늉을 시뮬레이션으로 보여줬다. 이것은 야간 버스, 아저씨의 미친 랩 때문에 주변 사람들도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나는 재빨리 이어폰을 찾아 귀에 꽂고 눈을 감았다. 해방이다! 해방이야!
해방인가...? 아니었다.
옆에서 누가 손가락으로 나를 콕콕 찔렀다. 어쩌면 운전기사일 수도 있어 무심결에 눈을 떴다. 이런 제길! 아저씨였다.
"...나의 딸은 아바나에서 의학을 전공 중이야!"
아니 이보세요 아저씨! 안 궁금하다니까요!
내 이어폰까지 뽑아낼 정도로 말을 하고 싶어 안달 난 아저씨를 보자 온 사방이 경악했다. 모두의 평화를 위해 여기서 칼자루를 휘두르지 않으면 도저히 안될 것 같았다.
"아저씨. 제가 멀미가 나서 토할 것 같아요.잠을 좀 자야 하니까 깨우지 말아 주세요. 제발."
말이 끝남과 동시에 덮고 있던 비치타올을 미라처럼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음악은 듣고 있지 않았지만 예방적 차원으로 이어폰도 꽂았다. 그렇게 모두의 평화가 시작되었는가 싶었는데..
두어시간 후, 누가 내가 덮은 타올을 휙 내리는 기분이 들어 실눈을 떴다. 반쯤 뜬 눈 앞에는 치아를 가지런히 드러내고 웃고 있는 아저씨가 보였다.
"여기 휴게소에서 파는 구아바 파이가 일품인데 사다 줄 테니 하나 먹어 볼래?"
아... 잠결인 척 발로 확 차 버릴까......
옆좌석에 앉은 진드기 철면피 때문에 12시간 동안 화장실 한 번 못 가고 눈을 감고 있었어야 했던 슬픈 이야기는 이 쯤에서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
온 세상 어디에나 철면피는 존재한다.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인도를 여행하며 내가 느낀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인구의 절반이 철면피 같았달까. 위에 예로 든 일화 외에도 쿠바에는 다양한 종류의 '데스까라도'가 있다. 사기꾼 유형의 데스까라도만 잘 피하면 대부분은 좀 성가실 정도이지, 나의 여행에 악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다.
영어로 다가와 말을 거는 이는 일단 경계하자. 아바나 여행자거리에서 단순한 호의를 베풀고자 하는 사람도 미안하지만 경계하자. 그들만 잘 경계해도 쿠바 여행에서 겪을 수 있는 데스까라도의 50프로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나머지 철면피는? 피할 수 없으면 즐길 수밖에. 여행의 추억이 될 에피소드로 간직하자. 화 내면 늙는 건 낯짝 두꺼운 데스까라도가 아닌 나 자신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