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를 향한 수많은 오해들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다. 쿠바를 향해 상상된 이미지는 극과 극이다. 쿠바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북한 같은 나라'라고 이야기한다. 나의 부모님도 처음엔 그러셨다. 거기 김정은 같은 사람이 통치하는데 왜 가냐고, 쥐도새도 모르게 총 맞아 죽으면 어쩌냐고. 물론 이 이야기는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일단, 통치자의 외모부터 다르다. 쿠바의 전 국가평의원장인 피델 카스트로는 아주 출중한 외모를 지녔다. 실제로 1900년대 후반, 미국에서 보낸 꽃미모의 암살자가 작전을 하다 그의 미모에 반해서 연인이 될 정도였다. 또한 쿠바에서 일반 외국인이 총에 맞을 일은 없다. 엠바고(embargo)로 거의 모든 무역 통로가 차단된 쿠바가 그나마 끼니를 연명할 수 있는 것은 우리 같은 관광객 덕분이다. 쿠바의 거리 곳곳에서 경찰들이 상시 근무를 하는 중이다. 쥐도새도모르게 우리에게 총을 들이대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든 여행자의 신변 보호가 가능하도록 그 곳에 서 있는 것. 여행자가 금지된 어떤 구린 행동을 하지 않는 이상, 국가가 여행자를 위협할 일은 없다는 이야기이다. 오히려 사방팔방 상주 중인 경찰 덕분에 늦은 오후에 거리를 거닐어도 타 중남미 국가보다 크게 위험하지 않다. (물론 늦은 밤 고가의 물건을 들고 어두운 골목을 거니는 것은 그 어느 나라에서도 위험하다. 이런 행동은 자제하도록 하자.)
쿠바에 들어와 조금 지내 본 사람들은 분위기가 인도나 중국 같이 정신없다고들 말한다. 비씨택시(bici-taxi , 자전거 택시), 코코택시(coco-taxi, 코코넛 껍질 모양의 오토바이 택시), 마차, 그리고 온갖 종류의 차가 한데 섞여 달리며 경적 소리를 거세게 내는 차도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거기에 목소리 큰 쿠바노들이 빠른 속도의 스페인어로 여기저기서 싸우는 듯 대화를 나눈다(사실 아주 평범한 대화인데 싸우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신호등이 생긴 지 얼마 안 돼서인지, 무단횡단이나 신호 위반을 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이것만 보고 쿠바노의 질서나 시민의식에 관해 섣불리 판단하지 않길 바란다. 적어도 환전소 한 번만 다녀와도 그 편견은 쉬이 깨질테니 말이다.
외쳐보아요, "울띠모(último)!"
2011년, 쿠바에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 일이다. 첫 방문 때는 은행창구에서 현금서비스를 받았었기에 까데까(CADECA, casa del cambio, 환전소) 방문은 처음이었다. 이른 아침에 갔는데도 이미 대기 줄이 어마어마했다. 줄의 가장 마지막에 가서 섰다. 4월의 뙤약볕은 아침부터 거셌고 오랜 기다림에 이미 내몸은 땀으로 샤워를 했다.
지루하고 긴 기다림 끝에, 한 시간이 거의 되어서야 내 차례가 코 앞에 다가왔다. 까데까는 입구에서 안전요원이 문을 열어 한 사람씩 들여 보내는 시스템이다. 그 문이 내 앞에서 열리기만을 고대했다. 그런데 문이 열린 순간, 한 아주머니가 뭐라고 뭐라고 떠들며 당당하게 걸어들어 갔다.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던 시기라 전혀 알아 듣지 못했던 나오미였다.
화가 나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미 들어갔으니 따질 방도가 없었다. 잠시 후 다시 문이 열리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이번엔 한 아저씨가 씩 웃으며 또 새치기를 했다.
뭐 이런 거지 같은 경우가 다 있어!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내 뒤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아무렇지도 않고 평온한 게 더 맘에 안 들었다. 마치 이런 식으로 새치기를 하는 게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 혹시 안전요원에게 뇌물을 줬나? 굳이 까데까에 일찍 가려고 뇌물을? 묘한 기분에 휩싸여 있는 동안 다시 문이 열렸다. 내가 들어가려는 찰나, 한 남자가 또 새치기를 하려고 앞으로 전진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터뜨리려던 그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 뒤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로 단체로 그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게 아닌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단어는 치나(china, 중국 여자) 한 마디였다. 뒷사람들이 마구 퍼부어대자 아저씨는 깨갱하고 눈치를 보며, 날더러 들어가라고 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으나 일단 돈을 바꿨다.
그리고 근처 햇볕을 피할 만한 장소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의 공통점을 찾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새로 도착하는 사람마다 같은 질문을 했다.
울띠모(último)!
그러면 대부분 줄의 맨 끝 사람이 "요(yo)!" 하고 대답했는데 간혹 내 옆에 있는 할머니나 저 멀리 있는 사람이 대답하곤 했다. 대관절 이 스웩 넘치는 풍경은 뭐란 말인가.
나오미의 스페인어 교실. 울띠모(último)란 '마지막의, 최종의, 최근의'라는 의미를 지닌 형용사이다. 하지만 정관사와 함께 쓰이면 마지막 사람이라는 의미를 뜻하는 명사로도 쓰인다. 여기서 쿠바인들은 앞뒤 다 자르고 울띠모만 외치는 것이다. 간혹 라 울띠마 뻬르소나(la última persona, 마지막 사람) 이라고 통째로 외치는 이들도 많다. 요(yo)는 나를 뜻하는 1인칭 주격 인칭 대명사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환전소에 도착하여 맨 마지막 사람 누군가요? 하고 외친 후 본인의 앞 사람을 확인하는 시스템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얼마나 간단하면서도 다른 시스템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줄서기란 눈에 보이는 시각적인 일렬종대의 줄이라면, 이들의 줄은 어찌 보면 더 넓은 차원의 추상적인 줄인 것이다. 한국처럼 번호표가 도입이 된 것도 아니고, 햇볕을 피할 공간은 필요하니, 생각해 보면 꽤나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 볼 핵심은 쿠바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줄의 가운데를 절대 끊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사람이 잠시 자리를 비우더라도, 내 앞사람이 누군지 기억하고 있다가 그가 나타나면 순서를 내어준다.
이제서야 사태 파악이 명료히 되었다. 좀 전 상황에서 내 앞에 왔던 두 명의 쿠바인들은 나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었다. 햇볕을 피해 어딘가에 있다가, 본인 순서가 되어 내 앞으로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 남성은? 말그대로 새치기다.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규칙을 잘 모를 것이라 생각해서 슬쩍 내 앞에 껴들었다가, 온 동네 사람들에게 핀잔을 들은 것이다. 내 귀에 들렸던 단 하나의 단어만으로 추측해보건대, 그 수많은 스페인어들은 대충 이런 의미였을 것이다.
중국 여자 차례인데 왜 당신이 그 앞을 껴드는 거야? 순서에 맞게 뒤로 가서 서! 중국 여자야, 네 차례니 들어가렴.
이런 아름다운 응징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쿠바의 재미있고 철저한 줄서기 문화를 파악하고 나니 더더욱 쿠바에서의 생활이 즐거워졌다. 초콜릿을 파는 상점에서도, 버스 정거장에서도, 쌀이나 달걀을 살 때도 쿠바노들은 엄격하게 질서를 지켰다. 어느 날은 감자 파는 줄 앞에서 당당하게 울띠모! 하고 외치니, 상점 주인이 이 중국 여자 쿠바를 좀 아는구먼, 하면서 바가지없이 정가에 감자를 주셨다. 쿠바에서 한국인을 만나거나 지인이 쿠바에 간다고 할 경우에도 나는 꼭 이 줄서기 문화에 대한 강의를 펼쳤다. 내 글을 읽은 여러분들도 쿠바에 가게 된다면 어깨 펴고 당당히 외쳐보길 바란다. 울띠모!
앞의 앞, 뒤의 뒤
줄서기 강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환전소의 기초단계를 끝냈다면, 심화단계인 은행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쿠바에서 은행업무를 보다보면 참을 인 자를 세 번 정도는 마음에 새겨야한다. 전산 시스템도 매우 낙후했고, 한 사람 한 사람 돈에 관한 일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사설이 길다. 나는 비자 연장에 필요한 세요(sello)라는 인지를 사기 위해 은행을 찾았었다. 울띠모 스킬을 완벽히 마스터했다 생각했기에, 자신감 있고 임팩트있게 울띠모를 외쳤다.
그런데 이번엔 상대방의 대답이 달랐다. 아니 더 길어졌다.
마지막 줄은 나야. 내 앞은 저기 빨간 옷 입은 여자야.
설명하자면 이렇다. 은행의 업무가 너무 지리멸렬하게 오래 걸리다 보니, 기다리다 지쳐 자리를 뜨거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자리를 비우게 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은행의 줄서기 스킬에서는 한 단계 더 나가야 한다. 바로 나의 앞, 그 앞사람, 그리고 뒤, 그 뒷사람까지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간혹 "나는 더 못 기다려서 돌아가니 너의 차례는 빨간 옷 입은 여성 다음이다." 라고 친절히 가르쳐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열심히 순서를 파악해두어야 한다. 앞의 앞, 그리고 뒤의 뒤까지 명확히 판단했다면 누군가 울띠모를 외쳤을 때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뒤에 파란 셔츠를 입은 남성이 있었어. 그 사람이 오지 않는다면 내 뒤는 너야.
혼돈 속에도 규칙은 존재한다
그렇다. 이 곳 쿠바의 겉모습은 복잡스럽다. 하지만 겉모습만으로 사람의 인성을 판단할 수 없듯이, 눈에 보이는 찰나의 장면으로 쿠바를 속단할 수 없다.
차도 위를 질주하는 다양한 종류의 탈것들을 보면 머리가 복잡하지만, 그들 사이의 약속이 이미 존재하기에 사고 없이 무탈히 주행이 가능한 것이다. 도로에서 큰 목소리로 대화하고 음악을 크게 튼다고 하여 예의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이것 또한 이들에겐 익숙한 문화이기 때문이다.
쿠바에는 늘 무언가 부족하다. 부족한 만큼 그들의 삶은 치열하다. 때로는 돈이 있어도 물자가 부족하여 구매를 할 수 없다. 하지만 쿠바인들은 물자가 부족하다고 해서 타인을 짓밟으면서까지 이익을 취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순서를 지키는 것을 당연한 예의로 배웠기 때문이다. 쿠바를 여행하는 동안 '다름과 틀림'을 명확히 파악한다면 우리 또한 그들의 질서 안에서 더 평온한 매일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딘가 산만하고 혼란스러울지라도, 규칙은 늘 존재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