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갈한 격자의 도시,
씨엔푸에고스
이번 주 떼아모 쿠바와 함께 여행할 도시는 씨엔푸에고스(Cienfuegos)주의 주도 씨엔푸에고스이다. 이 도시의 이름만 들으면 쿠바의혁명 영웅 까밀로 씨엔푸에고스의 이름을 본 따서 만들었다 생각하는 이가 많다. 당초 이 도시의 이름은 ‘페르난디나 데 하구아’라 불리웠다. 그러나 1825년에 폭풍으로 도시가 파괴된 후, 성의 재건을 주도한 스페인의 장군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지명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시엔푸에고스 도시에 첫 발을 내딛으면 뭔가 쿠바의 다른 도시들과 느낌이 다르다. 아바나는 도시 자체가 좀 어지러운 편이었다. 하지만 이 도시는 도로 구획 자체가 완벽한 격자 모양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리 이름도 숫자로만 되어 있기 때문에 길 찾기가 아주 수월하다. 도시를 이루고 있는 건물이나 풍경도 어쩐지 남다르다. 씨엔푸에고스는 19세기 초 스페인의 식민지로 건설되었고, 그 뒤로 프랑스 이주민들이 대거 정착한 도시다. 그 덕분에 신 고전주의 건축양식이 많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나에게 있어 씨엔푸에고스의 첫인상은 '친절'이었다. 뜨리니다드에서 씨엔푸에고스로 가기 위해 비아술 버스를 이용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옆에 계신 한 아주머니께서 내게 말을 걸었다. 본인을 M이라고 소개한 여사는 씨엔푸에고스에 사는데 볼일을 보러 잠시 뜨리니다드에 들렀다고 했다. M은 씨엔푸에고스가 처음이라는 나를 위해 G라는 친한 어르신이 운영하신다는 까사를 소개해 주었다. 세상 어느 곳이나 조건 없는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있다. 다만, 여행자인 나는 그 조건 없는 친절을 무조건적으로 감사히 수용할 수 만은 없기에 약간의 경계태세를 갖추고 아주머니를 따라나섰다.
그가 내게 소개한 까사는 중심가와 매우 가까웠고 깨끗했으며 꽤나 넓었다. 이 큰 집을 연로한 G여사 혼자 운영하고 계셨는데, 근처에 산다는 M여사는 시도때도 없이 까사를 드나들며 G를 도운다고 했다. 일단 이 까사에 2일을 묵기로 하고 짐을 내려놓는데 M여사가 이제 가봐야 한다며 다급히 나를 찾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당연히 친절의 대가를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 올 것이 왔구나... 역시 쿠바에서 공짜로 친절을 바라는 건 헛된 바램인가.'하고 생각했을 때, M여사가 작은 메모지 한 장을 내밀며 내게 말했다.
이건 내 연락처야. 내가 씨엔푸에고스에 없으면 아바나에 가 있을 수도 있으니 여기 집 전화번호, 아바나 전화번호, 내 휴대폰 번호 세 개를 적었어. 너 쿠바 가이드북을 쓴다고 했지? 거기에 내 연락처도 적어놔. 혹시 씨엔푸에고스에 여행 온 한국인들이 문제가 생기면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헛된 바람이 아니었다. M여사는 내게 조건없는 친절을 베푼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쿠바 인연 중 하나였던 것이다. 바쁘게 달려나가면서도 씨엔푸에고스의 주요 관광지와 저녁을 먹을 만한 레스토랑까지 추천하고 떠난 M여사. 그 뒤로 다시 만날 수는 없었지만, 그와의 첫 인연이 아름다웠던 덕분인지 씨엔푸에고스에서 만난 인연들은 내게 모두 좋은 기억만 안겨주었다.
반나절 속성 관광만으로는
아쉬운 도시
씨엔푸에고스의 관광 포인트는 광장이 포함된 중심가, 그리고 말레꼰 건너의 뿐따고르다 지역 두 군데로 상당히 집약적이다. 그래서 일정이 촉박한 여행자들은 산타클라라와 마찬가지로 반나절 동안 들러 가는 식의 여행을 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느긋한 여행의 추구자, 쿠바 베짱이 나오미 아니던가. 어느 도시건 무조건 1박 이상은 하고자 노력하는 나는 도착과 동시에 숙소부터 물색한다. 딱히 볼 것 없는 듯하고 유명하지 않은 도시일지라도 낮과 밤의 분위기가 다르고 체류하는 시간에 따라 느낌이 다르기 때문이다.
씨엔푸에고스에는 차도 사이에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거리와 벤치를 만들어 놓은 프라도 거리(Paseo del Prado)가 있다. 이 프라도 거리와 보행자거리가 만나는 지점에 아주 유명한 가수가 늘 서 있다. 바로 베니모레(Benny Moré)동상이다. 베니모레는 씨엔푸에고스주에서 태어난 보컬리스트로, 기타 연주는 물론 볼레로, 쏜, 맘보, 과라차 등 장르를 넘나드는 천재성으로 쿠바 국민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음악 천재이다.
베니의 안내를 따라 왼쪽으로 커브를 돌면 보행자거리 불레바르(boulevard)가 나온다. 다양한 상점, 식당, 바 등의 상권과 호텔, 은행 등의 편의시설이 밀집한 곳이다. 보통 여행자들이 자주 찾는 곳은 물값이 두 배로 뛰기 마련인데 이 곳 슈퍼마켓은 보행자거리 정가운데 있지만 물이 항상 정가이다. 그래서 씨엔푸에고스에 오면 멀리 나가 헤매지 않아도 손쉽게 식수를 살 수 있어 기분이 좋다.
보행자 거리의 끝엔 이 도시의 중심인 아르마스(Armas) 광장이 있다. 호세마르띠 공원(Parque Jose Marti)이라고도 한다. 공원 내에는 주민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의자가 공원 안쪽을 향해 4면으로 줄줄이 준비되어 있다. 씨엔푸에고스는 쿠바의 프랑스라고 불리우는데 그 명성에 걸맞게 공원 내부에 개선문(Arco de truiumfo)이 세워져있다. 이 개선문은 쿠바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희생된 목숨을 기리기 위해 쿠바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1902년에 완공한 건축물이다.
공원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는 정부청사, 성당, 학교, 극장, 박물관 등이 밀집되어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은 페레르성(Palacio de Ferrer)이다. 이 건물은 1918년 페레르가의 가옥으로 세워진 성으로서 대리석 바닥, 볼록한 돔 등 절제된 신고전주의 양식이 특징이다. 페레르성의 내부는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고 옥상 루프탑도 올라갈 수 있다. 돔으로 올라가는 뱅뱅이 계단은 고소공포증이 심한 나에게 큰 시련이었으나, 다 올라가자 씨엔푸에고스의 아름다운 전경을 선물해 주었다. 이 곳에서 바라보는 석양이 참 아름다울 것 같았는데 오후에는 통제를 한다고 하니 나처럼 헛걸음 하는 사람은 없길 바란다.
두 번째로 눈에 띄는 건물은 정부청사이다. 아름다운 빨간색 돔이 저 멀리 보행자거리부터 눈에 띈다. 내부 방문은 허용되지 않으므로 건물 외형만 감상해야 한다. 세 번째로 눈에 들어오는 곳은 토마스 테리 극장(Teatro Tomas Terry)이다. 1000석 가까이 되는 목조좌석과 테라스석, 화려한 천장 누드화까지 보존 상태가 대단한 곳이다. 이 아름다운 건물 우측에는 카페 테리(Café Terry)라는 카페테리아가 있다. 이 곳은 밤이 되면 야외 라이브클럽으로 변신하는데 수준 높은 뮤지션들의 라이브 음악 감상이 가능하다. 광장에 구경할 만한 것들이 밀집되어 있기에 성당과 박물관까지 구경하다 보면 꽤나 시간이 흐른다.
정부청사 옆으로 이어진 길에는 기념품 노점이 줄지어 서있다. 기념품을 감상하며 노점상의 끝까지 따라가다보면 씨엔푸에고스 바닷가와 맞닿는다. 운좋게 석양이 지는 시간에 맞춰 도착하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와!'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가이드 인솔 중이 아니라면 바로 옆 노점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멍 때리기 딱 좋은 곳이었다. 하늘과 건물이 바닷물에 투영되어 데깔꼬마니를 이루고 있었다.
밤이 되어 밤마실 할 곳을 고민했다. 디스꼬떼까 엘 베니는 흔한 나이트클럽인데 그닥 땡기지 않았고, 밤 공연이 훌륭했던 테리 카페는 문을 열지 않는 날이었다. 까사 주인 A의 추천을 받고 트로피 수르(Tropi Sur)라는 곳을 방문했다. 넓은 야외 무대와 좌석이 있어 일단 착석했다. 춤추는 플로워는 딱히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이 곳은 카바레였다. 약 한시간 반 동안 여러 명의 가수들이 나와 춤과 노래 공연을 펼쳤다. 화려한 조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에는 무수한 별이 반짝거렸다. 3월의 선선한 밤공기와 한 잔의 칵테일, 그리고 화려한 공연으로 씨엔푸에고스의 밤을 알차게 보냈다.
다음날은 중심가에서 2km 남짓 떨어진 뿐따 고르다(Punta Gorda)지구를 방문했다. 뿐따 고르다 지구에는 바예궁전(Palacio de Valle)이라는 곳이 볼 만하다. 이 성은 1913년 바예라는 대부호가 스페인계 무슬림 장인을 섭외하여 4년의 시간에 걸쳐 완공한 곳이다. 무어양식을 기초로 비잔틴, 바로크, 고딕건축 양식이 접목된 이 성은 절충주의 건축양식으로 대표된다고 한다. 현재 건물 내부는 레스토랑으로, 루프탑은 전망대로 이용되고 있다.
바예궁전에서 뿐따 고르다의 최남단까지 약 700m를 직진하면 현지인들이 사랑하는 라 뿐따 공원이 나온다. 어쩐지 입장료가 있을 것 같지만 주차장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무료다. 바닷가 옆에 탁자와 의자가 마련되어 있고 한쪽 바에서는 시원한 음료와 닭 바베큐를 판매하고 있어 현지인들의 주말 나들이 장소로 사랑받는다. 관광객을 상대로 판매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닭바베큐 한 상자에 3쿡 정도로 가격도 저렴하다. 씨엔푸에고스의 바다는 해수욕을 할만큼 깨끗하진 않지만, 바다와 하늘이 빚어내는 전망이 일품이다. 잔잔한 파도와 물결에 투영되어 부서지는 햇살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마음이 평온해진다.
씨엔푸에고스는 한 주의 주도임에도 불구하고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주민들은 대체로 친절한 편이지만 아바나처럼 먼저 와서 집요하게 말을 거는 사람이 없어 평온한 마음으로 여행할 수 있는 도시라 생각한다. 쿠바노의 과한 관심에서 벗어나 평화롭게 본인 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여행자나, 석양을 바라보며 멍하니 한 잔 하고픈 여행자에게 씨엔푸에고스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