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푸른 하늘이라 행복해요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라는 노래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색은 푸른색이다. 아니 푸른색이었다. 요즘 같으면 '회색'을 '하늘색'으로 정정해야 할 듯하다. 유난히 호흡기가 취약하게 태어난 나는 올 가을, 겨울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로 정말 고생했다. 집 안에만 갇혀 지낼 수 없으니 마스크를 착용하고 외출 했지만, 귀가 후엔 어김없이 비염이 도졌다. 곱게 화장이 잘 먹은 날도 마무리는 마스크였다.
초미세먼지로 뒤덮인 한국의 하늘이 쿠바를 그리워하는 이유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매일 돼지고기를 굽고 등푸른 생선을 바싹 튀겨도 파랗기만 한 쿠바의 하늘이 너무 그리웠다. 한국에서의 나는 관리되지 않은 어항 속 물고기가 된 심정이었다. 뿌옇게 오염된 물에서 수면 밖에 입을 내놓고 뻐끔거리는 가녀린 존재 말이다.
그래서일까. 쿠바에 도착했을 때. 하늘을 바라보며 강렬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올해는 경유지로 베이징을 선택했던 터라, 실내에서조차 마스크를 빼지 않았었기에 더더욱 짜릿했다. 마스크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두 콧구멍으로 깊은 숨을 한모금 빨아들였다. 그리고 외쳤다.
"쿠바 하늘 만세!!! 나오미 어항 탈출!!!"
올해 쿠바 여행 사진첩을 보니 유난히 하늘 사진이 많다. 나는 요즘 눈과 코가 정화되는 매일을 살고 있다. 평소보다 하늘을 곱절로 바라보았고 푸른 하늘이 보이면 집착적으로 사진을 남기고 있다. 외출 시 내가 챙겨야 할 것이 마스크가 아니라 선글라스와 휴대용 선풍기라는 사실이 행복하다. 변덕을 부려 우중충했다가도 잠시 거센 비를 뿌린 뒤 다시 새파랗게 고개를 내미는 하늘이 감사하다.
올 해 쿠바, 왜이리 추운 거죠?
숨통 트여주는 것까진 좋았는데 또 튕긴다. 쿠바, 이 잔망스러운 것이 1년 만에 차가워졌다.
작년 3월 말 예쁜 꽃이 만개했던 공원의 꽃나무는 푸른 잎만 무성하고 꽃봉오리도 보이지 않는다. 낮에도 요리할 때 외에는 집에서 선풍기를 켠 적이 없고, 밤마실을 나갈 땐 꼭 긴팔 옷을 준비한다.
차가운 도시 컨셉이 유행인 것일까? 말레꼰(el malecón) 또한 차가워졌다. 통상적으로는 12월-2월 정도만 심기가 불편한 편인데, 4월초인 지금까지 파도가 솟구치며 으르렁 드르렁한다.
금요일 밤, 인파로 가득해야 할 말레꼰이 한적하다. 엊그제 O군과 로맨스를 꿈꾼다며 아무도 없는 말레꼰에 갔었다. 거리 악사의 노래를 안주 삼아 럼을 한잔하며 두어 시간을 행복하게 보낸 뒤, 다음날 둘 다 몸살이 나서 반쯤 죽다 살아났다. '얼어죽을 놈의 로맨스'는 이럴 때 쓰기 딱 좋은 표현인 듯 하다.
쿠바 날씨 정보
올 해 기온이 약간 변덕을 부린 것은 사실이지만, 일기예보로 확인한 결과 그 와중에도 이제 슬슬 여름 시즌이 시작되고 있는 듯하다. 나오미는 하늘에 계신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니므로 백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으나, 9년 간 드나들며 체험한 쿠바의 날씨에 대해 정보를 공유한다.
나오미의 '추위센서'를 기준으로 쿠바의 계절을 크게 나누어 보자면, 여름(4월-9월)과 겨울(10월-3월) 두 가지다. 여기서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우선 여름이다. 4월부터 기온이 조금씩 올라가고, 비 오는 날도 조금씩 늘어난다. 하루종일 오는 비가 아니라 스콜성으로 잠시 쏟아지는 비라 관광에는 크게 무리가 없다. 5월부터는 비 오는 날이 점점 잦아진다. 6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는 낮 기온 38도를 웃돌며 본격적인 더위가 찾아온다. 이 때는 낮이고 밤이고 다 덥다. 쿠바인들의 본격적 피에스타 시기이기도 하다. 9월은 4월과 비슷한 수준이다. 한여름 더위는 소강 상태지만, 아직은 좀 덥고 비가 자주 온다. 때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리기도 할 것이다.
10월부터는 확실히 9월보다 날씨가 선선해진다. 나처럼 더위에 취약한 사람에게 이 계절이 딱 좋다. 바닷물은 아직 따뜻하기 때문에 해수욕도 가능하고, 여름보다는 덜 더우니 한낮 땡볕만 잘 피하면 된다. 11월은 대략 한국의 봄, 가을 날씨 같다. 저녁과 이른 아침, 비 오는 날에는 기온이 떨어지므로 추위를 많이 타는 분들은 얇은 긴팔이나 가디건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12월부터 1월까지 두 달은 쿠바의 본격적인 겨울이다. 아이러니하게 쿠바의 초성수기이기도 하다. 이 계절에 오면 비싼 호텔 물가, 예약하기 힘든 버스 노선, 해수욕하기엔 차가운 바닷물, 비도 안 오는데 우중충한 하늘, 비 오면 더 우중충한 하늘, 쌀쌀한 날씨를 덤으로 만끽할 수 있다. 으르렁대는 말레꼰과 마주하고 싶다면 이 기간을 추천한다. 2월과 3월은 성수기의 끝자락이다. 호텔 비용이 초성수기보다는 줄어들지만 아직은 조금 비싸다. 하지만 하늘이 푸른 날이 점점 늘어나고 기온도 한겨울보다는 따뜻해진다. 한낮은 따뜻하고, 해진 뒤는 쌀쌀하다. 바람 부는 날에는 말레꼰 파도도 센 편이다. 2월까지는 아바나, 바라데로 같은 북쪽 지방에서 해수욕을 하기에는 물이 아직 차가운 시기이니 남쪽의 카리브해나 동쪽 지방을 추천한다.
번외편. 9월부터 11월은 사이클론(ciclón)이 자주 지나가는 시기다. 사이클론은 동쪽 지방을 자주 관통하기 때문에 산티아고데쿠바, 관타나모, 바라코아 등의 도시가 피해를 자주 본다. 인간도 이유 없이 기분 나쁜 시기가 있지 않은가. 지구 또한 때때로 저기압이 찾아오면 예고 없이 심술궂다. 지난 2017년 9월, 아바나를 관통한 사이클론으로 도시 전체가 물에 잠겼다. 2019년 1월에는 아바나 변방에 있는 작은 섬에 토네이도가 지나가 삽시간에 작은 마을이 쑥대밭이 되기도 했다. 천재지변은 예측하고 피할 수 없는 일이니 하늘에 맡기자. 사이클론님, 나의 휴가 일정에는 부디 찾아오지 마시옵소서...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
쿠바를 여행하고자 하는 분들께 받는 질문 중 1위가 날씨 관련 질문이다. 저렇게 날씨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해도 많은 이들이 묻는다.
"그래서 어느 시기가 여행하기 좋은 거죠?"
대답하기가 참 난감하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 달라서 무엇 하나 콕 찝어서 언제가 좋다고 말하기가 난감하기 때문이다. 나는 10월, 11월, 2월, 3월, 4월을 선호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 더위를 많이 타서 한여름은 힘들다. 둘째, "나오미=집순이"이다. 여행 인솔 스케줄이 없는 경우, 베란다에서 럼 한잔을 홀짝거리며 사람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단순한 여행 패턴에는 비가 와도 좋고, 해가 떠도 좋다. 셋째, 가장 중요한 사항인데, 겨울 시즌이 막국수 비수기이므로 막국수집 딸인 나오미가 자리를 비우기가 편하다.
나처럼 더위를 심하게 타는 사람은 겨울 시즌에 쿠바를 여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한여름밖에 시간이 안 난다면? 그 땐 쿠바를 여행하기 안 좋은 시기일까? 한 여름 쿠바와 한국, 둘 중 한 군데를 고르라면 나는 주저없이 쿠바를 고를 것이다. 쿠바에는 한국처럼 전기 누진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해변도 근처에 있으며, 도시마다 카니발도 열리니, 지독하게 더운 여름일지라도 스트레스가 훨씬 덜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잘 때 겨드랑이에 얼음팩을 끼고도 '더워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2010년 12월의 끝자락. 거의 매일 비가 오다시피 했다. 한 켤레 뿐인 슬리퍼의 갈라진 바닥으로 구정물이 솟구쳐 늘 발바닥이 시커매졌다. 바람도 쌩쌩 불고 기온도 떨어져 카리브해의 한가운데 있는 쿠바에서 비키니 한 번 못 걸쳐봤던 시기였다. 하지만 나와 쿠바에서 만난 일행들은 매일이 행복했다.
해가 뜰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제대로 빗나가고, 파도가 죽도록 거세던 어느 날. 일본인 2명과 한국인 3명이 함께 말레꼰으로 향했다. 말레꼰의 파도를 온 몸으로 만끽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신나게 노는 우리를 발견한 캐나다에서 온 포토그래퍼가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물었다. 우리의 강렬한 에너지가 좋다고 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다섯 명이 동시에 포즈를 취한 후 서로 빵 터져서 웃었다. 두어 시간 열심히 논 뒤, 우리는 도심 한복판에서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숙소로 돌아갔다. 불운하게도 한 달 내리 날씨는 구질구질 했지만, 그래도 나는 쿠바가 좋았다. 그래서 2011년 4월에도 쿠바로 돌아갔고, 그 이후 매년 쿠바로 가고 있다.
드라마 <도깨비>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너와 함께 한 시간, 모두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날씨는 하늘에 맡기고 그저 쿠바와 사랑에 빠져 보자. 그러면 파랗고 찬란한 하늘도, 우중충한 하늘도, 나와 그대의 여행에 큰 변수가 되지 않을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