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여 잘 있거라
내가 중학생 때 가수 박상민씨가 '무기여 잘 있거라' 라는 곡을 발표했다. 한 여성이 남성 다섯명과 사랑에 실패한 후 비구니가 되기까지 사연을 담았다. 박상민씨 특유의 허스키하고 구구절절한 목소리를 통해 남자한테 확 질려버린 여자의 지독한 심정이 잘 표현된다. 물론 연애 다섯 번 실패했다고 비구니가 되는 컨셉은 상당히 어이상실이지만 말이다.
쿠바를 드나든 지 햇수로 10년이 되었다. 이곳에서 나는 사랑을 했었다. 현재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소소하게 스쳐 지나간 사람들까지 다 카운트하면 나는 이미 주지스님이 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비혼여성으로서 당당히 속세의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오늘은 내가 쿠바에서 겪은 최악의 연애 TOP 3 이야기를 풀어보겠다.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제비
첫번째 남자는 2010년에 만난 살사선생 A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잊혀지지 않는다. 일본인 친구가 살사 레슨을 받으러 간다기에 함께 가 봤다. 교습소 입구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그를 본 순간, 나의 머릿속 작은 풍경이 바람에 나부끼며 '딸랑 딸랑' 소리를 냈다. 키가 190cm 정도, 크고 마른 체형이었다. 문턱에 기대 선 길쭉한 그의 마른 몸과 미남형의 이목구비에 스며든 햇살이 나의 심장을 콩닥이게 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느낌이 바로 왔다. 그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이글이글 끓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습소 주인의 도착이 늦어져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짧은 스페인어, 영어, 프랑스어 그리고 바디 랭귀지 모두가 동원되었다. 그는 아바나 대학교 법학과 학생으로 취미는 프랑스어 공부라고 했다. 살사 강의는 생계를 위해 한다고 했다. 선해 보이는 얼굴과 수수한 차림새가 나의 경계를 풀게 만들었다. A는 여행자거리에서 추파를 던지던 살사 강사들과 질적으로 달라보였다.
교습소 문이 열리고 나를 가르치기 위한 강사가 도착했다. 키가 나보다 작은 남성이었다. A가 150cm남짓으로 아담한 일본인 친구에게 파트너를 바꾸는 것을 제안했다(나는 키가 170cm 정도 된다). 일본인 친구가 흔쾌히 승낙을 해주어 A와 파트너로 살사를 배울 수 있었다.
A와 첫 레슨을 하면서 정말이지 심장이 목구멍을 뚫고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밀착이 많은 동작을 하면 내 심장소리가 전달될까 걱정이었다. 살사를 출 때는 발을 보는 것이 아니라 리드하는 파트너와 눈을 맞추며 그의 손에 몸을 맡기고 호흡해야 한다. 키가 큰 그는 나와 눈을 맞추기 위해 상체를 내쪽으로 숙인 채 리드를 했다. 뒤로 백스텝을 할 때는 이글이글한 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데 이대로 벽 어디론가로 밀쳐져 딥키스를 나누고픈 충동이 일었다.
A와 이틀 간의 살사 레슨을 끝으로 나의 쿠바일정이 끝났다. 내일 출국한다는 나의 말에 당황한 그의 동공은 심하게 흔들렸다. 그와 헤어지고 숙소로 걸어오는 내내 눈물이 펑펑 났다. 두 번 볼 사이도 아닌데 사랑 고백 한 번 못한 나를 자책했다. 세계일주 일정 내내 상사병에 시달렸고, 한국으로 돌아와도 나의 마음은 사그라들지 못했다.
이틀에 걸쳐 A4용지 두 장 가득 구구절절한 내 사랑을 스페인어로 적어 내려 갔다. 당시만 해도 쿠바에서 인터넷 접속은 어불성설이었다. 메일을 보내고 3개월이 지난 뒤, 장문의 답장을 받았다. 그 또한 나를 많이 사랑하고 그리움에 잠 못 이루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메일의 마지막에 연락처를 적어주고 'de tu marido(너의남편으로부터)'라는 말로 글을 마무리지었다.
전화로 대화를 나누기엔 나의 스페인어는 턱없이 부족했고 쿠바의 국제전화비는 지독하게 비쌌다. 연락처가 있어도 연락은 거의 주고받을 수가 없었다. 눈만 감아도 그가 생각나고 헤어지던 순간을 생각하면 눈물이 났다. 당장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암이 발견되어 치료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첫눈에 반한다는 건 위험한 것이었다.
드디어 2013년 2월, 나는 쿠바로 돌아갔다. 쿠바에서 쿠바사람처럼 매일을 살며, 내가 사랑하는 쿠바노를 매일 보고싶었다. 쿠바에 다시 간다는 나의 말에 그는 뛸 듯이 기뻐했다. 쿠바에 도착하자마자 전화를 했을 때, 그는 내게 말했다.
내 사랑, 비행기 타고 오느라 고생 많았지? 내가 내일 아침 9시에 정말 중요한 시험이 있거든. 공부하고 시험 보고 마치자마자 네가 있는 숙소로 달려갈게.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 줘.
당장 내게 달려오지 않는 그에게 조금 섭섭했지만 법학과 학생이니까 공부할 게 많겠지, 생각했다. 빨리 아침이 밝기를 바라며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샜다. 다음날 그는 오지 않았다. 오후에 추가시험이 생겨 어쩔 수 없었다며, 다음날 아침 일찍 들른다고 했다. 그는 또 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집안 페인트칠을 해야한다고 놔주지 않았단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는 오지 않았다.
내가 싫으면 싫다고 해! 쿠바 와서 일주일 동안 집에서 너만 기다리고 있잖아!
분노하여 전화를 붙잡고 소리치는 내게 그는 시종일관 말했다.
내 마음을 의심하지 말아줘. 정말 널 사랑하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물론 그는 그저 날 사랑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에게 여의치 않는 사정은 없었다. 나도 이틀째 약속을 미뤘을때 이미 깨달았으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A는 내가 믿고 거르는 구시가지의 수많은 제비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차림새가 다르다하여 속내까지 다른 건 아니었다.
쿠바를 사랑하고 아바나를 결코 떠나지 않을 거라던 A는 어느 일본 여자와 결혼하고 일본에서 거주하고 있다. 몇년 전, 쉴 새 없이 울리는 페이스북 알람에 핸드폰을 보니 A가 나의 사진첩 속 쿠바 일상 사진 90개에 '좋아요'를 눌러놓았다. 나는 조용히 그를 차단했다. A처럼 비겁한 제비놈은 내 일상을 바라볼 자격이 없으므로.
충동적인 시작
충동적인 파국
두번째 남자는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 P다. 그 날, 쿠바에서 나는 하루종일 굶고 배가 고파 피자나 사 먹으러 갈까, 하는 마음에 길을 나섰다. 한 남성이 내게 달려왔다.
저 쪽에 있는 내 친구가 너한테 반했대. 인사 한 번만 해 줘.
그가 가리키는 쪽에 P가 있었다. 나는 길에서 만난 아무하고 막 사귀는 스타일이 아니다. 특히 제비가 많은 아바나 구시가지에서는 말이다. P는 거리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이었다. 상추와 배추가 가득 실린 리어카 뒤에 숨어 나를 빼꼼 바라봤다.
나랑 저녁 먹으러 갈래? 내가 살게. 네가 나랑 같이 가 준다고 하면 나 오늘 장사 접을게. 근처에 집이 있어. 잠시만 기다려주면 샤워하고 얼른 나올게.
쿠바판 '나 오늘 장사 안 해'에 넘어간 나는 저녁식사를 허락했다. 쿠바노가 사는 밥은 어떤 맛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후다닥 샤워를 하고 말끔한 차림새로 나온 P는 나를 근처 로컬식당으로 데려갔다.
나는 외국인을 잘 몰라. 널 초대했지만 비싼 레스토랑에 데려갈 형편은 안되거든. 이런 데서 식사해도 괜찮겠어?
하루종일 일해서 허기가 진다던 그는 와구와구 입으로 음식을 쓸어담았다. 첫눈에 반한다거나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느낌은 없었으나 그의 성실한 모습이 마음에 들어 교제를 시작했다. 그렇게 내 인생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그는 충동적인 사람이었다. 충동적으로 장사를 접고 데이트 신청을 하더니, 교제 내내 충동적이었다. 연애 초반엔 그의 충동심이 재밌고 짜릿했던 것 같다. 평생 매사에 계획을 세우고 살아 온 나와는 너무 달랐으니 말이다. 나를 정말로 애지중지 했던 그는 데이트를 하다가도 곧잘 사라졌다. 충동적으로 내게 꽃을 사주고 싶으면 꽃을 사러 갔고, 쿠바에서 귀하다는 사과를 사서 품에 안겨주기도 했다. 어느 날 그는 내게 말했다.
우리 눈 감고 손으로 지도를 쿡 찍어서 나오는 데로 놀러갔다오자!
그렇게 나는 준비가 하나도 안 된 상태에서 쿠바 동쪽지방에 있는 바야모라는 도시에 가게 되었다. 버스 예약이 안 되어있으니 무작정 터미널에 가서 빈 좌석이 나올 때 까지 진을 쳐야 했고, 결국 웃돈을 얹어주고 불법으로 현지인 버스를 타야만 했다. 이 정도는 재미있었다.
사귄 지 5일쯤 되던 날, 그는 약속시간을 훌쩍 어기고 나타났다. 왜 이리 늦었냐는 나의 책망에 그는 갑자기 웃옷을 벗었다. 그리고 나는 경악했다. 그의 오른쪽 복부에 수박만한 여성 얼굴이 타투로 박혀있었다. 나였다. 그의 목덜미에는 내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심지어 스펠링도 틀렸다. 기가 차고 코가 찼다. 대체 왜 이랬냐고 물으니 날 너무 사랑해서 평생의 사랑을 맹세하고 싶었단다.
평생 날 사랑하겠다던 P를 결국 나는 버렸다. 인생을 충동적으로만 살아온 그는 충동적으로 해서는 안될 일을 했다. 언제부턴가 숨쉴 때마다 그의 폐에서 껑껑 소리가 났고, 그의 인중에서 시큼한 냄새가 났다. 단 한 번도 내게 고함을 친 적 없던 그가 감정기복이 심해지고 눈동자가 멍했다. 매일 장사를 한다고 물건을 가득 싣고 나가서는 물건도 돈도 없는 빈손으로 들어왔다.
마약이었다. 충동적으로 시작했으니 그만 둘 수 있다며, 한 번만 봐 달라고 펑펑 우는 그를 결국 버렸다. 충동으로 시작한 관계는 그의 충동에 의해 마무리 되었고, 생각지 못한 트라우마를 벗어던지느라 나는 2년을 허비했다.
두 얼굴의 싸이버러버
세번째 남자는 P 때문에 인생의 중심을 잃고 시들대던 때 잠시 만났던 F다. P가 저지른 경악할 행동을 가족이나 한국 친구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던 나는 마음이 곪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내게 손을 내민 이가 친구로 지내던 F였다.
그와는 SNS 메신저를 통해 대화를 주고받았다. P에게 느낀 배신감, 일상생활에 집중할 수조차 없게 만든 상처, 인생에 대한 회의감 등을 그에게 고백했다. F는 낮이고 밤이고 경청해주었다. 아침이면 잠을 잘 잤는지, 저녁이면 오늘 기분은 어떤지 물어주었고, 늘 나를 격려했다.
그건 그의 실수이지 너의 실수가 아니야. 자책하지마. 넌 더 훌륭한 사람을 만날 수 있어. 넌 그만한 가치가 있어.
그의 위로는 내게 큰 힘이 되었다. 매일 잠자는 시간 빼고 거의 모든 시간을 그와의 대화로 채워나갔다. 채팅 속 그는 이해심이 정말 많았다. 스페인어가 서툴러 미안하다는 나의 말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한국어를 한 마디라도 했다면 네가 이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을 거야. 미안한 건 나야.
매일 대화를 나누다보니 대답이 없으면 기다려지고 허전했다. 매일 먼저 연락했던 그가 어느 날 말을 걸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나 궁금해졌다. 그는 3일 동안 잠적을 하더니, 나에게 이성으로서 감정이 느껴진다고 정중히 고백했다. 나는 그의 마음을 받아주었다.
채팅으로 애인을 만드는 건 세이클럽 졸업한 뒤 끝난 줄 알았는데, 시대에 역행하는 사랑을 꿈꿨었나보다. 반 년을 넘게 채팅으로만 사랑하다 그의 생일에 맞춰 쿠바에 갔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반전은 시작되었다.
두 팔 벌리고 달려와 나를 안아줄 것을 상상했으나, 공항에서 만난 우리는 어색한 포옹을 나눴다. 부끄러워서겠지 싶었으나, 그렇다고 하기엔 뭔가 이상했다. F는 내 손을 잡고 걷지도 않았고, 대화를 할 때 눈도 마주치지 않았으며 시종일관 휴대폰만 바라봤다. 내가 반갑지 않냐는 질문에 어이없다는 듯이 픽하고 비웃음을 선사했다.
대화도 잘 안되었다. 글로 쓸 땐 사전을 찾으면 되지만 실제 대화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는 어려운 문법을 쓰고 발음을 뭉갰으며 말하는 속도가 빨랐다. 채팅 때 느꼈던 배려의 아이콘은 온데간데 없고, 두 번 정도 못 알아들으면 날카로운 혀로 나를 베려 들었다.
또 못 알아들었어? 또? 아휴~
한 번은 날 위해 요리를 해준다고 했다. 저런 놈과 함께 요리를 하며 애정을 과시하는 상상을 했던 나는 그 때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나보다. 아침 일찍 전화해서 밥 먹지 말고 기다리라던 F는 밤 8시가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화장을 곱게 하고 10시간 이상 기다린 나는 분노가 폭발했다.
신경질적으로 화장을 다 지우려는 찰나 그에게 아랫층으로 내려오라는 전화가 왔다.엄청나게 큰 쟁반과 그릇을 어깨에 맨 장정 세 명이 서있었다. 그들과 함께 우리는 한 장소를 찾았다. 그의 음식은 난해했다. 출장 부페도 아니고 왜 이렇게까지 차려야 했나 하는 의문만 들었다.
엄청난 양의 생선을 배를 갈라 내장과 생선 가시를 제거하고 속에 햄과 치즈를 넣은 뒤 실로 절개부위를 다시 꿰맸다. 그걸 각각 한 마리씩 기름에 튀겼고, 그 튀긴 생선에 각종 채소와 퓨레 및 향신료를 넣고 볶듯이 졸였다. 샐러드는 토마토, 아보카도, 깍지콩, 양파 등 많은 것들이 버무려져 있었다. 밥과 국까지 다 놓고보니 못해도 7인분은 되었다.
조리법을 자세히 아는 이유는 그가 음식을 차려놓고 일장연설을 했기 때문이다. 그를 본 순간 깨달았다. 그는 먹는 이를 위한 음식을 만든 게 아니라, 요리하는 본인의 모습에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어 음식을 만든 것이다. 실제로 하루종일 굶은 마당에도 이 과유불급의 음식은 무슨 맛인지 알 수 없을만큼 온갖 맛이 난무했다. 한 마디로 맛없었다. 어떻게 남자가 이렇게 요리를 잘하냐는 영혼없는 칭찬에 그는 우쭐했다. 이 요리가 나를 위한 게 아님은 다시 한 번 확실해졌다.
출국을 하는 날까지 그는 내게 무심했다. 무정과 무뚝뚝은 질적으로 다른데, 그는 무정했다. 회사 가는 친구 마중하듯 그렇게 나를 보냈다. 너무 쿨해서 얼음이 어는 줄 알았다. 어이가 터지는 일은 여기서 또 발생했다. 탑승장에 있는데, 그에게 문자가 왔다.
네가 벌써 보고 싶다. 정말 사랑하고 내 평생을 너와 함께 하고 싶어.
킬미힐미 같은 자식. 보기 드문 미친놈이었다. 답장 없이 한국으로 돌아와 채팅으로 이별을 고했다. 싸이버러버에게 가장 걸맞는 이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준 교훈
쿠바에서 겪은 파란만장한 사랑은 쿠바노들에 대한 판단력을 높여주었다. A 덕분에 살사 선생은 남자로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P 덕분에 길거리 놈팽이들에게 마음이 동하지 않게 되었으며, F 덕분에 말만 번지르르한 두 얼굴들을 구분하는 혜안이 생겨버렸다. 안 겪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이 세 명의 남자 덕분에 O군과 6년째 장거리 사랑이 아직도 돈독한 편이니 새옹지마라고 생각하련다.
굳이 이 세 명 중 최악을 꼽자면 단연 P다. 쿠바에서 길을 가다 복부에 수박만한 동양인 여자 얼굴을 문신한 남자를 목격한다면, 눈도 마주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