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아모 쿠바 3. 이중 화폐

알다여행

떼아모 쿠바 3. 이중 화폐

나오미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이중 화폐? 넌 또 누구야?

오늘 이야기 할 주제는 쿠바의 화폐다. 쿠바는 모든 면에서 평범함을 거부하는 ‘관심 종자’다. 쿠바의 통용 화폐는 종류가 두 가지다. 아주 간략히 설명하자면 쿡(CUC)은 환전용 화폐로 외국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화폐고, 쿱(CUP)은 내국인이 주로 사용하는 화폐이다. 쿱은 페소 쿠바노(Peso Cubano) 또는 모네다 나시오날(Moneda Nacional)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1쿡은 24쿱의 가치를 지닌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려 올 것이다. 하지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지폐는 생김새만 약간 다를 뿐 색깔이 비슷하고, 현지인들은 쿡과 쿱 이라고 말하기보단 두 가지 화폐를 통틀어 페소(PESO)라고 말하기를 선호한다. 아, 어쩌란 말이냐!

ㄱ= 24×ㅂ

쿠바와의 러브스토리를 쓰겠다고 시작했는데 어째 내 글의 8할은 사기 당한 스토리인 것 같다. 지금은 눈을 감고도 쿡과 쿱을 구분할 수 있고, 쿱을 내야하는데 돈이 모자랄 경우 암산으로 계산하여 쿡으로 대체해서 내는 능력까지 겸비했다. 하지만 쿠바라는 나라가 무슨 언어를 쓰는지조차 몰랐던 2010년의 나오미가 이중화폐의 존재를 알 턱이 없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쿠바에 입국하자마자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꺼낼 수 없어 정신줄을 제대로 놨던 1박 2일을 보낸 뒤, 나는 은행에서 현금서비스를 통해 많은 돈을 받았다. 물론 전부 쿡이었다. 주머니가 두둑해지니 드디어 마음에 강 같은 평화가 찾아오며 주변의 환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파가 가득한 장소가 있어 가 보았더니 오비스포(Obispo)라는 명칭의 여행자거리였다. 거리는 활력이 가득했다. 차량 운행이 불가한 보행자 전용 거리였고 좌우로는 기념품 매장이나 레스토랑이 즐비했다. 오픈형 레스토랑에서는 밴드의 신명나는 라이브 음악이 들려왔다. 

여기저기 구경을 하다 보니 목이 말랐다. 때마침 눈앞에 오렌지주스 노점을 발견했다. 한 잔에 얼마인지 가격을 물었다. 청년은 아무 말 없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손가락 두 개를 펼쳐보였다. 외국인이 많이 방문하는 여행자거리답게 바디랭귀지를 사용하나보다 생각했다. 일행과 함께 한 잔의 주스를 시켰고 갈증이 난 우리는 단숨에 음료를 나누어 들이켰다. 그리고 청년에게 2쿡의 돈을 지불했다. 

조금 시장기가 돌아 사람들이 앉아있는 바 형태의 로컬 식당으로 갔다. 주로 빵 종류를 팔고 있는 식당이었다. 메뉴판에 적힌 가격을 보니 물가가 장난이 아니었다. 소세지 빵 하나에 10.00이라고 쓰여 있었다. '세상에... 쿠바 물가 실화냐... 소세지빵 하나에 12,000원이라니...' 하루 생활비를 만원 내외에서 사용하는 가난한 배낭여행자였던 나로서는 손이 덜덜 떨릴 가격이었다. 주먹만한 소세지빵 하나를 사서 친구와 반을 갈라먹었다.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지만 하나 더 사먹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까사로 돌아갔다. 거실에서 같은 집에 묵고 있는 한국인 여행자들이 대문짝만한 피자를 사다가 나누어먹고 있었다. 소세지빵 하나도 10쿡인데 이만한 피자는 대체 얼마일까 궁금해서 가격을 물어봤다.

이거 피자 한판에 7쿡이에요. 가격 괜찮죠? 맛도 쿠바 피자치곤 나쁘지 않아요.

네.............? 뭐라고요..........?

그 뒤로는 여러분이 추측한 그대로 앓아누웠다.

아이고 친구야 넥타이 가져온나. 이마에 묶고 누울란다 나는. 삼일은 굶을란다 나는.

오렌지주스는 2쿱, 한국 돈으로 100원 정도였다. 소세지빵은 10쿱, 500원 이었다. 600원이면 먹을 길거리 음식과 로컬 식당의 빵을 자그마치 15,000원을 내고 먹었다. 내가 24배 가치의 돈을 꺼내는 동안 그 누구도 내게 실수를 정정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소세지빵 파는 점원은 내가 돈을 낼 때 ‘10쿱입니다.’라고 까지 말했는데, 내가 낸 10쿡을 그대로 받아 돈바구니로 넣었다. 누군가에겐 운수 좋은 날이 나에겐 너무나 가슴 쓰린 패배의 날이다. 침대에 누워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구슬픈 곡조의 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쿱이라는 글자에 받침 하나 바꾸면 쿡이 되고 마는 장난 같은 인생사~

더 이상의 실수는 없다!쿱 정복 대작전

정신줄을 부여잡고 가장 먼저 한 일은 환전소로 달려가는 일 이었다. 환전소에 쿡을 가져가면 쿱을 준다고 했다. 얼마를 바꿔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무작정 20쿡을 바꿨다. 무표정한 환전소 직원은 내 두 손에 엄청난 지폐 다발을 안겨주었다. 총 480쿱이었다. 평소 주머니에 20쿡을 넣고 다닐 땐 아무렇지 않더니, 480쿱 덕분에 불룩해진 주머니를 보자 밖으로 나서기가 괜스레 두려웠다.   

숙소로 돌아와 돈다발을 펼쳤다. 쿡과 쿱을 나란히 침대에 줄세웠다. 두 지폐는 분명 다르게 생겼다. 쿡은 대체로 멀리서 동상이나 탑 같은 구조물이 새겨져 있고 비교적 깨끗하다. 쿱은 우리나라 지폐처럼 인물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어 그려져 있고, 꼬깃꼬깃 손때가 가득한 편이다. 대체적으로 모서리가 각진 동전은 쿡, 모서리가 둥근 동전은 쿱이다. 멕시코에서 기념품으로 구매한 동전지갑을 꺼내어 두 화폐를 각각 따로 담았다. 지갑의 입구에 “쿡”, “쿱”이라고 써서 붙이고 양쪽 주머니에 나눠 담았다. 더 이상은 1쿱도 손해보고 싶지 않았다. 

다시 오비스뽀 거리로 향했다. 주스 노점으로 가서 오렌지주스를 한 잔 주문하고 가격을 물었다. 역시나 손가락으로 ‘2’라고 알려주는 사기꾼에게 당당히 동전으로 2쿱을 내밀었다. 민망한 얼굴로 내 시선을 피할 것이라는 예상은 쿠바 여행 초짜의 허망한 바램이었다. 그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내 돈을 받아 넣었다. 괜스레 약이 오른 나는 그 공원에서 반나절을 앉아 주스 노점만 쳐다봤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간혹 외국인이 와서 쿡을 내밀면 득달 같이 달려가서 쿱을 보여주며 쿡을 주머니에 도로 넣어주었다. 주스 장사꾼의 얼굴에 극도의 짜증이 서리자 드디어 내 맘이 조금 풀렸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거리에서 700원짜리 양파 피자를 하나 사서 먹었다. 이 달콤함은 정녕 승리의 맛이었다.

당신은 쿱스타일? 쿡스타일?

2010년의 나오미는 쿱을 선호했다. 똑같이 생긴 피자일지라도 로컬에서 먹으면 12쿱(700원)이고, 레스토랑에 앉아 포크와 칼을 이용해 썰어먹으면 5쿡(6000원)이었다. 밥도 마찬가지였다. 이가 조금 나간 그릇이지만 양도 충실하고 맛도 좋은 로컬 식당의 음식이 24쿱(1200원)이라면, 큰 그릇에 예쁘게 모양내어 나오는 레스토랑 음식은 10쿡(12000원)이었다. 길거리에서 파는 대부분의 간식은 쿱으로 계산했다. 치즈피자 10쿱, 츄러스 5쿱, 아이스크림 2쿱, 박하사탕 1쿱, 에스프레소 커피한잔에 1쿱이었다. 하루 종일 주워 먹고 다녀도 하루 120쿱(≒5쿡≒6000원)을 다 쓰기가 힘들었다. 가난한 배낭여행자였던 나오미는 쿱이라는 신세계를 알게 된 순간부터 배부른 매일을 맞이할 수 있었다.

2013년의 나오미는 쿱과 쿡 사이에 양다리를 살짝 걸치고 지냈다. 직장생활을 정리한 지 2년차가 되어 주머니는 가벼웠지만, 세계일주할 때처럼 나 자신에게 야박하고 싶지는 않던 시절이었다. 하루의 최대 식비 기준을 정해놓고 한 끼는 로컬식당에 가고, 한 끼는 레스토랑에 갔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로컬식당에서 도시락에 밥을 포장하여 말레꼰으로 향했다. 파도소리를 벗삼아 말레꼰에 앉아 먹는 도시락의 맛은 양파농사 짓다 얻어먹는 새참만큼 꿀맛이었다. 점심식사를 저렴하게 했다면 저녁식사는 눈여겨 보았던 예쁜 레스토랑에 갔다. 식비 지출이 조금 적었던 날에는 한 파인트에 1.5쿡이라는 거금을 내고 마켓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사치도 누렸다.

2018년의 나는 로컬 식당을 거의 이용하지 못했다. 개인적인 시간보다는 인솔하는 시간이 더 많았기에 고객들과 거의 레스토랑 위주로 다녔다. 한 푼, 두 푼 아끼는 재미는 없었지만 솔직히 편하고 풍족하긴 했다. 더 이상 20대가 아닌 나이기에, 매일 쿱으로만 연명하는 여행은 이제 내 타입이 아니다.

조금 불편하지만 저렴한 여행과 편안하고 풍족하지만 비싼 여행. 이 둘 중 한 가지만 선택하면 쿠바에서 당신이 원하는 만큼 예산을 조절할 수 있다. 아는 만큼 다양한 선택권을 제시하지만, 무작정 달려드는 하룻강아지에게는 가차없이 채찍을 가하는 곳. 나의 사랑 쿠바는 오늘도 앙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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