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쎄 팔따(hace falta)
쿠바노들과 대화하다 보면 그들이 매우 자주 사용하는 숙어가 있다. 바로 아쎄 팔따(hace falta)라는 것인데 '~이 필요하다, 부족하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A: vamos hacer espaguetis. dime! Qué hace falta?(우리 스파게티 만들자. 말해봐! 뭐가 부족해?)
B: a ver...hace falta puré, queso y fideo!(보자...퓨레, 치즈 그리고 면이 없네!)
농담처럼 보이지만 실제 상황이다. 쿠바노들이 이 표현을 입에 달고 사는 이유가 있다. 첫째, 쿠바노의 대부분은 가난하다. 공식 발표된 쿠바의 1인당 GDP는 연간 1만2500달러에 달한다지만, 이것은 사회주의 정부가 제공하는 각종 무상서비스를 돈으로 환산했을 때 이야기이다. 내 주변 쿠바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관광관련업에 종사하지 않는 이상 일반인은 월 3만원 벌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실제론 1인당 연간 GDP가 500달러 미만인 셈.
한 달에 배급 받을 수 있는 쌀, 콩, 소금, 설탕은 한 가족이 일주일 먹을 분량이 될까말까다. 그나마 고기, 생선, 달걀은 배급이 안 나오는 때가 허다하다. 배급하지 않는 나머지는 모두 사비로 구매해야 한다. 4인 가족 기준으로 한 끼 먹을 반찬 값만 해도 최소 5천원 돈인데, 제 아무리 아껴쓴다 해도 쿠바 평균 월급으로 한 달을 살기엔 항상 적자다.
둘째, 미국의 엠바고(embargo)로 인해 쿠바는 베네수엘라, 브라질 등 중남미를 중점으로 몇 안되는 국가와 제한적인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좁은 통로는 이들의 삶의 질을 크게 좌지우지 하고 있다. 쿠바는 식료품부터 생필품까지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해당 국가의 내부 사정에 문제가 생기면 쿠바 역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쿠바 사람들은 항상 아껴 써도 무언가 부족하거나 당장 돈이 있어도 물품이 없어 살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우리 쿠바노는 절대 버리지 않아
쿠바노가 자주 사용하는 또 다른 단어가 있다. 아오라르(ahorrar)라는 동사로, '절약하다' 라는 뜻이다. 쿠바노는 아끼는 데에 있어 제대로 도가 튼 사람들이다. 양말, 속옷이 구멍 나면 기워서 입는 건 당연한 일이고, 심지어 슬리퍼나 구두까지 기워 신는다. 지갑이나 벨트는 한 번 사면 중간이 잘려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까지 사용하고, 요리용 칼은 하도 갈아서 날이 송곳 모양이 될 때까지 사용한다. 이면지도 그냥 버리지 않으며 볼펜 한 자루도 절대 소홀히 관리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쿠바노가 가장 아끼는 옷과 신발은 특별 관리 대상이다. 세탁기가 있어도 손빨래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세탁기에 자주 돌리면 옷이 금방 망가진다는 깊은 뜻이 있다. 신발은 외출에서 돌아오면 늘 깨끗하게 오물을 닦아내어 새 것처럼 보관한다. 실제로 O군은 2013년 나를 처음 만나던 날 입고 왔던 셔츠를 아직도 입는다. 비록 A급 외출복에서 B급 일상복으로 강등되었지만 말이다.
우리 엄마는 이가 나간 그릇에 식사를 하면 복이 나간다고 생각한다. 접시며 컵이며 모퉁이가 살짝 깨지면 가차없이 처분한다. 쿠바노들이 보았다면 기함을 할 노릇이다. 정가운데가 와장창 깨지지 않는 이상, 그 접시는 음식을 담는데 전혀 문제가 없으니 말이다. 그 옆에 유리겔러가 십 년은 갖고 놀았을 법한 찌그러진 숟가락도 세트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쿠바를 드나들며 나 또한 꽤나 현지화가 되었다. 5년 전, 서울에서 셰어하우스에 살며 고양이를 키운 적이 있다. 이 요망하고 아름다운 생명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섬유를 잘근잘근 씹는 일이었다. 잘 숨긴다고 숨겨도 건조대를 습격하거나 잠시 침대 위에 던져놓은 옷을 포착해 열심히 작품을 만들곤 했다. 쿠바에 가기 전이었다면 쓰레기통으로 직행했을 옷들은 그대로 나와 함께 한 계절을 보냈다. 입고 다니기 난감할 정도로 가슴이나 옆구리를 크게 씹어놓지 않은 이상, 손목 솔기에 난 작은 구멍 따위는 무시했다. 그가 씹을 준비를 하다 들켜 이빨 자국 두 개가 뽕뽕 뚫린 보라색 후드티는 아직도 간절기마다 즐겨 입고 있다.
쿠바를 여행할 때마다 작은 용기나 봉투가 늘 아쉬웠기 때문에, 포장지나 다 쓴 플라스틱 통을 버리지 않고 쌓아 두는 습관도 생겼다. 작년 여행 때 요긴하게 썼던 용기들을 아직도 버리지 않았다. 엄마는 가끔 내 방에 들어와 "이게 사람이 사는 방인지 거지가 사는 소굴인지 분간이나 가겠니? 좀 버려!" 하고 잔소리를 늘어 놓는다. 그럴때면 난 대답한다.
"엄마! 쓰레기 같아도 이게 다~ 필요한 물건이야. 쿠바에선 절대 아무것도 버리지 않아."
참을 인자 세 개면 뽀요를 얻는다
2019년 3월, 벌써 쿠바에 온 지 40여일이 되었다. 쿠바에 처음 도착했을 때 들은 뉴스. 바로 달걀이 없다는 소식이었다.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영양가 있어 쿠바노들의 단골 점심 반찬이었던 달걀이 언제부턴가 씨가 말랐단다. 30개들이 한판에 60쿱(2500원)이던 달걀이 5쿡(6000원)을 줘도 구할까 말까한 귀한 존재가 되었다. 엊그제는 집 근처 마켓에 5톤 트럭 한가득 쌓인 계란이 한번 유통되었는데 정말 눈깜짝 할 사이에 모두가 달려들어 순식간에 품절되고 말았다. 이제 곧 저 달걀은 골목 어딘가에서 꼭 필요한 누군가에게 5~10쿡의 가격으로 낙찰될 것이다.
처음 쿠바에 도착했을 때는 식용유가 동이 났었다. 내게 가이드를 맡긴 고객님들을 인솔해 다니며, 까사를 운영하는 친구 R을 위해 도시마다 큰 마트부터 작은 구멍가게까지 식용유를 찾아 다녔다. 하지만 전국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 오는 지인이나 고객들께서 혹시 뭐 챙겨다 줄 것 없느냐 물어보시면 사양하지 않고 식용유를 부탁했다.
그렇게 2월 한 달을 식용유 없이 보내고 3월이 되었다. 어느 날부터 마트에 식용유가 쫙 깔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고기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지인들이 한국에서 가져다 준 식용유가 한 가득 짐인데, 마트엔 기름만 넘쳐나고 그걸로 튀겨 먹을 고기가 없는 것이다. 쿠바야, 널 알고 지낸지 9년인데 대체 언제까지 내게 튕길 셈인 거니?!
나흘 전 동네에서 운좋게 돼지고기를 구매했다. 그나마도 가격이 비싸서 많이 사지도 못했다. 이틀은 훈제 돼지고기로 연명하고, 또 이틀은 돼지 살코기로 연명했다. 닭고기가 너무나 먹고 싶었지만, 레스토랑이 아니면 닭을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친구들에게 닭고기 구매처를 물으면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잠자리에 들며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기필코 닭고기를 구하리라 다짐을 했다.
비장한 마음으로 세수를 하고 말레꼰 근처 닭고기 판매 가능성이 높은 마트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보다 더 비장한 쿠바 세뇨라들께서 한 발 먼저 움직이신 탓에 내게 돌아오는 대답은 '품절'이었다. 총 2시간 동안 5군데의 슈퍼마켓을 들렀지만 수확이 없었다. 결국 신시가지에서 구시가지까지 도보로 이동하여 아바나 시내에서 가장 큰 대형마트까지 갔다.
그 곳에서 나는 기가 막힌 광경을 목격했다. BTS 콘서트 줄을 방불케 하는 긴 줄의 끝에 까르니세리아(carnicería, 정육점)가 있었다. 일단 줄에 합류한 뒤 고민해보자. "último(울띠모)!"를 외쳤다. 예상보다 훨씬 뒤에 계신 할아버지께서 대답을 하셨다. 기나긴 행렬 속 외국인은 나 하나.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주눅들지 말자... 기다리자... 오늘 하루 걸어 온 먼 길을 생각하자... 닭고기가 저 문안에 있다."
닭고기를 향한 여정은 은행업무보다 훨씬 더 더뎠다. 내 앞의 앞의 앞, 내 뒤의 뒤의 뒤 사람까지 3중으로 인상착의를 익혀 놓아야 했다. 내 앞의 두 어르신이 저 멀리 벤치에 가서 앉아 계셨기에 쉴 새 없이 울띠모를 찾는 뒷사람들에게 대신 대답해 주어야 했다. 그렇게 매장 밖에서 2시간 동안 줄을 섰다.
드디어 매장에 입장한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많은 인파을 상대해야 할 계산대는 단 3개였다는 것을. 게다가 저마다 내일이 없는 듯 고기를 쓸어담아 한 명한 명 계산이 매우 더뎠다. 2시간의 기다림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는 듯, 나 역시 정신을 놓고 물건을 주워담았다. 한 팩에 9조각이 들은 닭다리 3팩, 뼈 없는 닭고기 한 팩, 핫도그용 후랑크 4팩, 고다치즈 1키로, 햄버거 패티 2장, 요거트 6개... 어떻게 들고 갈 지는 지금 당장 필요한 고민이 아니었다.
매장 내에서도 계산을 위해 1시간 30분 동안 기다렸다. 마트에 도착한 지 3시간 30분이 되어서야 그 곳을 탈출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물건을 쭉 나열하고 보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오늘 나의 전리품을 손에 넣기까지 총 5시간 30분이 소요되었고 도보로 4키로를 걸었다. 이 모든 것을 구매하는데 든 비용은 단돈 25쿡, 근사한 레스토랑의 닭 요리 한 끼 비용 정도다.
나중은 없다. 있을 때 구할 것!
한 달 전, 일행과 마트에 갔을 때 작년에 즐겨 먹던 그릭요거트를 발견했다. 일행은 요거트를 살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빈손으로 나왔다. 이유를 물으니 들고 다니기 귀찮을 것 같아 다음에 사려고 했단다. 그리고 그 분은 여행기간이 끝나 출국할 때까지 그 요거트를 맛보지 못했다.
이번에는 달걀이다. 일행이 길에서 대화 나누다 친해진 C여사님께서 달걀 한 판에 3쿡에 구해줄 수 있다는 제안을 하셨다. 물론 정가보다는 비싸지만, 현재 계란 한 판 싯가가 5쿡 이상이기에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길에서 방금 알게 된 누군가와 거래를 하는 것이 꺼려져 우물쭈물했다. 결국 일행만 달걀 한 판을 주문했다. 다음 날 아침 알이 굵고 실한 달걀을 손에 쥔 일행을 보자 후회가 밀려왔다. 달걀을 구할 기회는 이미 물 건너 갔다.
아주 간단한 쿠바 여행의 팁을 한 가지. 외출 시 가방 안에 비닐봉지나 장바구니를 꼭 챙겨서 나갈 것! 길을 걷다 맘에 드는 물건(과일, 과자, 돼지코변압기, 순간접착제 등)을 마주친다면, 주저하지 말고 구매하라. 쿠바에도 내일의 태양은 뜨지만,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물건은 내일 이 자리에 없을 확률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