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글몽글 푸딩 같은
초록색 계곡 마을
두 번째로 함께 여행할 할 도시는 비냘레스(Viñales)이다. 비냘레스는 수도인 라 아바나의 서쪽에 위치한 삐나르 델 리오(Pinar del rio)라는 지역에 속한 작은 시골 마을이다. TV 프로그램 <트래블러>에서 배우 류준열이 방문했던 도시이기도 하다.
비냘레스는 삐나르 델 리오 주의 주도는 아니지만, 방문하는 여행객도 많고 라 아바나와의 접근성이 좋아 다양한 교통편을 이용할 수 있다. 라 아바나에서 출발한 올드카 택시는 약 3시간 30분을 달려 비냘레스로 향한다. 에어컨이 나온다면 감사하지만, 애초에 모든 것을 내려놓는 편이 수월하다.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본다. 낡은 차에서 뿜어내는 매캐한 배기가스가 가끔 코를 괴롭히지만 어쩔 수 없다. 뭉게구름을 잔뜩 품은 높고 푸른 하늘, 부르릉부르릉 전력을 다하는 올드카의 엔진소리, 줄 지워진 야자수 외엔 뻥 뚫린 삐나르 델 리오 주의 대지. 그 삼박자가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는 나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비냘레스 마을은 작아도 정말 작다. 걸어서 시가지를 돌아다니면 한 시간이면 한바퀴를 다 돌아볼 수 있다. 그 작고 몇 안되는 길목 중 성당이 있는 중심가에 여행사, 전화국, 슈퍼마켓, 각종 레스토랑, 클럽, 펍, 모든 것이 몰려있다. 중심가의 위, 아래 골목으로는 까사들이 줄지어 있다. 거의 90퍼센트는 숙박이 가능한 까사 빠르띠꿀라르라고 보면 되겠다.
내가 비냘레스에 도착하면 늘 찾는 까사가 있다. 작은 마을 비냘레스 내에서도 가장 구석에 위치한 작은 까사이다. 이 곳은 특이하게 숙박가격을 방 기준이 아닌 1인 기준으로 책정한다. 혼자 묵어도, 친구와 셰어해도 1인 당 조식 석식 포함 단돈 15쿡이다. 여행자로 붐비는 비냘레스 시가지의 레스토랑에서 밥 한끼를 사먹어 본다면 이 까사 금액이 얼마나 저렴한 건지 몸소 깨달을 수 있다.
이 까사의 엄청난 매력은 비단 가격 뿐만이 아니다. 일단 체크인 후 숙소에 짐을 풀면 웰컴 선물로 작은 바나나와 직접 만든 주스를 가져오는 주인들의 센스에 한번 반한다. 여행객에게 한없이 친절한 주인들 덕분에 내 집처럼 편안히 널부러져 있을 수 있고, 솜씨 좋은 여주인의 음식에 아침저녁으로 입이 행복하다. 자전거 대여, 말 투어 예약, 택시 대절 등 각종 필요한 서비스도 바로 바로 연계해준다.
오전 동안 비냘레스 사방에 위치한 관광지를 둘러보는 일정이라면 오후 타임은 느긋하게 까사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다. 나는 사실 관광보다 까사에서 멍하니 있는 것을 훨씬 좋아한다. 까사 중 옥상 테라스가 있거나 높은 층에 위치한 까사에서 묵는다면 꼭 맥주 한 병을 들고 풍경을 감상하길 바란다. 마을의 사방에 병풍처럼 감겨있는 모고떼(Mogote : 침식되지 않은 단단한 지반이 봉긋이 유지되어 산의 형태를 띄고 있는 것)의 풍경엔 맥주 한 병이 제격이기 때문이다. 동글동글 푸딩을 엎어놓은 듯한 모고떼. 멀리서 볼 땐 너무나 앙증맞지만 마을 내에서 바라볼 땐 한없이 광활하기도 하다.
한 번은 내가 묵는 동안 비냘레스 마을 전체에 정전이 났다. 작은 시골 마을에 불빛이 모두 꺼지니 남는 건 쏟아질 듯 가득한 별들, 그리고 이름 모를 풀벌레의 작은 연주회 뿐이었다. 흔들의자에 흔들흔들 몸을 맡기고 별을 보고 있을 때, "나오미, 이것 좀 봐!"하는 일행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길을 잃었던걸까. 작고 귀여운 청개구리 한 마리가 일행의 무릎에 살포시 앉아있었다.
시골의 밤이라고 가만히 앉아 풀벌레 소리만 들어야 하는 건 아니다. 까사에서 도보 5분거리의 비냘레스의 중심가에 위치한 광장으로 가본다. 성당 옆 코너에 위치한 장소는 매일 밤 뽈로 몬따녜스(polo montañes)라는 클럽으로 변신한다. 현지인들에게는 간편히 까사데라무시까(casa de la musica)라고 불리운다. 저렴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비냘레스의 춤꾼들이 모두 몰려있다. 라이브 밴드의 연주에 맞춰 마음에 드는 상대와 함께 살사 스텝을 밟아야 이 밤이 완성된다.
동굴, 모고떼 그리고 시가
비냘레스의 관광지는 시내 중심가에 밀집된 것이 아니라 시내를 기준으로 동서남북으로 퍼져 있기 때문에 차량으로만 이동이 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로 아바나에 본거지를 두고 당일투어로 방문하는 사람들도 많다.
까사에서 대절한 택시를 타고 반나절 동안 비냘레스의 관광지를 둘러보기로 일정을 짰다. 첫번째로 들러본 곳은 로스 하스미네스(Los Jasmines) 전망대이다. 이 전망대는 로스 하스미네스 호텔 옆에 딸려있는 곳이라 이름이 이렇다. 비냘레스에는 경치를 감상할 만한 전망대가 세 곳 정도 있는데, 로스 하스미네스는 그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유명한 곳이다.
로스 하스미네스 전망대에서 바라본 비냘레스의 풍경은 그야말로 경이롭다. 넓게 펼쳐진 비냘레스 계곡 전체를 한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냘레스 계곡 광활한 초록의 대지에는 나오미의 막내 조카가 껌뻑 죽는 공룡들이 서식할 것만 같다. 야자수 밑에 스테고사우르스가 나뭇잎을 먹고 있고 안개 낀 모고떼 봉우리사이로 프테라노돈이 날아다닐 것만 같은 상상이 든다. 동글동글한 모고떼 봉우리는 손으로 누르면 쏘옥 하고 들어갈 것만 같이 부드럽게 생겼다.
비냘레스 계곡의 몽환적인 풍경에 넋을 놓고 있노라면 전망대 한쪽에서 밴드의 라이브 연주와 즉석 살사 댄스 공연이 펼쳐진다. 신나는 살사 리듬과 비싸지만 어쩐지 사 먹고 싶어지는 한 잔의 칵테일을 곁들이면 경치 감상이 배로 만족스러워진다.
두 번째로 둘러볼 곳은 인디오 동굴(cueva del indio)이다. 비냘레스는 전형적인 카르스트 지형으로, 지하수에 침식된 석회질의 지형이 여러 곳의 동굴을 만들었다. 이 동굴은 1920년 발견됐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이전에 살았던 인디오들의 생활 흔적이 발굴되었다.
동굴의 입구로 들어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면 동굴의 천연 에코를 벗삼아 노래를 부르고 계시는 노신사를 만날 수 있다. 의외의 장소에서 만난 실력 있는 어르신 덕분에 귀호강하며 동굴에 입장한다. 좁은 입구를 따라 동굴 안으로 들어가면 중학교 때 배웠던 종유석, 석순, 석주가 눈앞에 절경으로 펼쳐진다.
인디오 동굴 탐험의 하이라이트는 동굴 아래로 흐르는 강물을 따라 동굴 내부에서 밖으로 보트를 타고 나오는 것이다. 배 속에서 사공 겸 가이드가 얼굴 모양, 물고기 모양, 담뱃잎 모양 등의 종유석을 찾으라고 보여주는데 솔직히 나는 하나도 모르겠다. 옆에 앉은 다른 여행객들이 "오!!! 진짜네! 저기 있다, 저기!!!" 하면 와~하고 호응 정도는 했다. 동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콧잔등에 떨어지면 행운이 온다는 말이 있어 열심히 고개를 들고 천정을 바라보았으나 아쉽게도 나에게는 떨어지지 않았다.
보트 유람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면 사탕수수 주스 파는 상인이 열심히 사탕수수를 기계에 넣어 착즙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럼을 넣어 칵테일도 만들어주니 맛이 궁금한 사람은 도전해보면 좋겠다.
세 번째로 방문 할 장소는 선사시대벽화(mural de la prehistoria)이다. 이 곳은 엄청 큰 모고떼의 한쪽 벽면에 높이 120미터, 너비 160미터의 거대한 그래피티가 그려진 곳이다. 선사시대 벽화라고 해서 선사시대에 그려진 벽화로 착각하고 찾아왔다가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빨강, 노랑, 파랑 원색적인 색채의 그림이 아무리봐도 선사시대의 작품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1961년 피델카스트로의 명령으로 화가와 농부들이 직접 그린 작품이다. 혁명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선사시대의 생명체부터 인간까지 진화하는 장면을 묘사해놓았기 때문에 '선사시대 벽화'라고 부른다. 가까이서 보면 2%부족해 보이는 실력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모고떼 봉우리와 주변 경관에 은근히 잘 어울린다.
이렇게 관광지를 둘러보다보면 주변에 열심히 경작을 하고 있는 현지인 농부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잎이 넓은 이 쌍떡잎식물은 깻잎도 아니고 콩잎도 아니다. 바로 담뱃잎이다. 전세계에서 제일 최상품으로 쳐주는 쿠바의 시가, 그것의 원재료가 바로 비냘레스에서 경작된다.
곳곳에 위치한 담뱃잎 건조장은 여행객이 슬쩍 들어가 두리번거려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현지인들은 일하느라 정신없이 바빠도 호기심에 다가오는 수많은 여행객에게 화 한 번 내지 않는다. 오히려 넓은 담뱃잎을 뜯어주며 모자로 쓰라고 호탕한 미소를 보여주신다. 그래, 이 맛에 쿠바 여행 하지. 쿠바여행의 진짜 묘미는 쿠바인들과 순간의 소통이니까.
오늘 내가 사는 이 곳엔 비가 내린다. 저 멀리 안개 낀 모고떼를 바라보며 시원한 맥주 한 모금 들이켜고 싶은 그런 날씨다. 나의 소중한 독자님들께서 언젠가 쿠바에 여행을 간다면, 그리고 시간이 허락되어 비냘레스에 방문한다면, 1박 정도는 숙박을 하시라고 권하고 싶다. 초록의 계곡 품에 안겨 모고떼가 뿜는 기운을 맘껏 만끽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