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한 내륙 도시
산타 클라라
<떼아모 쿠바>가 세 번째로 방문할 곳, 체 게바라의 도시로 알려진 산타 클라라(Santa Clara)이다. 산타 클라라는 쿠바의 중부 내륙에 위치한 비야 클라라 주의 주도이다. 아바나에서 택시를 타고 동쪽으로 4시간여 달리면 작은 마을 산타 클라라에 도착한다.
산타 클라라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내가 느낀 점은 도시 자체가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도시 곳곳에 쓰레기가 즐비했던 아바나의 구 시가지와는 천지차이다. 정갈한 도로 구획 곳곳에 위치한 휴지통과 깔끔한 길목이 눈에 띄었다.
당시 나는 산타 클라라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다. 한국인 여행자들에게 산타 클라라는 짧게 경유 하며 필수 관광지만 방문하는 도시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테라스가 딸린 가격 대비 크고 깔끔한 집에 여장을 풀고 공원이 있는 중심가로 걸어가 보았다.
산타 클라라의 정 가운데에는 큰 광장 겸 공원인 비달공원(Parque leoncio Vidal)이 있다. 조경이 잘 된 공원 내부에서 현지인들이 여유로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유년시절의 상징인 구슬치기 놀이를 하는 아이들,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며 아이를 바라보는 가족들, 와이파이 삼매경인 젊은 청년들이 보였다.
비달공원의 이름은 1896년 독립 전쟁에 앞장서다 전사한 장군의 이름을 땄다. 공원 안에는 비달 장군의 작은 흉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눈에 띄는 또 한 가지 동상은 부츠와 소년(el niño de la bota)이라는 동상이다. 1925년 전쟁 당시, 부상 당한 이들을 위해 부츠에 물을 담아 운반했던 어린 소년을 형상화했다.
공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공원 북쪽 방향에 위치한 인데뻰덴시아 거리(Calle Independencia)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원에서 한 블록 거리에 있는 보행자 거리로 상점이나 레스토랑이 밀집된 곳이다. 물을 사기 위해 여행자 거리에 위치한 큰 상점을 찾았다. 쿠바로서는 흔치 않게 바닥부터 천장까지 물이 가득 쌓여있었다. 심지어 정가였다. 상점마다, 거리마다 물 가격이 천차만별이라 물 한 병 살 때마다 홍역을 치렀던 아바나와는 달랐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상점에는 다른 도시에서 볼 수 없었던 수입 사탕과 젤리, 아시아 누들, 심지어 코카콜라와 스프라이트까지 진열되어 있었다. 엘 도라도를 발견한 것 처럼 눈이 휘둥그레진 나는 이것저것 바구니에 쓸어 담기 시작했다. 옆에서 '워워' 하고 말리는 일행이 없었다면 각종 주전부리와 마실 것들 때문에 캐리어가 닫히지도 못할 뻔 했다. 계산대로 가자 시크한 점원이 영수증을 뽑아 주고 내가 산 물건들을 세 군데에 나누어 담아주었다.
대박!!! 여기 봉지값도 안 받아! 너무 마음에 드네!!
쿠바의 대형마켓은 대부분 출입문 앞에서 영수증을 검사하는 직원이 있다. 손에 가득한 봉지 어딘가에서 영수증을 찾기 위해 허둥지둥 하는 내 모습을 보자 "괜찮으니까 천천히 해. 서두르지마."하고 미소를 보내주었다. 여기 쿠바 맞는 걸까? 빨리 보여 주고 비키라고 눈치줘야 할 것 같은데... 쿠바에도 이런 여유로운 사람들이 있구나.
여행자거리에 있는 레스토랑은 바가지가 심할 것 같았지만 배가 너무 고파서 눈에 보이는 작은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별 기대 없이 찾아 들어간 식당에는 메뉴가 다양했고, 플레이팅도 꽤나 신경을 썼으며 맛 또한 나쁘지 않았다. 그 와중에 가격까지 매우 착했다. 이럴수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무 기대 없이 찾은 산타 클라라의 재발견이었다.
맛있게 먹고 있는데 옆에 서양인 두 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메뉴판을 한참 훑어 보다 '너무 비싸네' 하며 나갔다. 그들이 받은 건 내가 받은 메뉴판보다 두 배나 비싼 메뉴판이었다. 그럼 그렇지. 이 곳도 쿠바 맞구나.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 번은 일행들과 하루 동안 마차를 대절하여 산타 클라라의 관광지를 돌아보기로 했다. 아바나에서는 관광용으로만 운영되는 마차가 이 곳 산타 클라라에서는 실질적 교통수단으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차에 올라탄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의 어깨는 타들어 갈 것 같았다. 유난히 태양이 작열하는 중부 내륙지방의 날씨 탓이었다.
하지만 타들어가는 어깨보다 더 불편한 게 있었으니, 바로 엉덩이였다. 마부의 지시에 따라 전력질주하는 말에게 너무 미안해서 엉덩이가 들썩들썩했기 때문이다. 오르막길을 오를 때마다 말에게 "미안해 우리 때문에 고생 시켜서 정말 미안해.."하고 의미없는 말을 내뱉는 것으로 속죄할 따름이었다. 약속했던 시간보다 3시간이나 일찍 집에 가겠다는 뻔뻔한 마부와의 말다툼을 하게 됐지만, 나는 끝까지 내 의견을 고집할 수 없었다. 말이 너무 피곤해 보였기 때문이다.
저녁이 되어 다시 찾은 비달광장. 안 쪽에서 음악소리가 들렸다. 음악대학교 학생들의 즉석 클래식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늘 EDM에 가까운 쿠바 클럽 음악에 노출되었던 나의 귀가 잠시나마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공원 북쪽의 인데뻰덴시아 거리 초입에 위치한 작은 오픈바에서는 살사음악 라이브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중절모를 쓴 노신사께서 파트너도 없이 홀로 신명나게 춤을 추고 계셨다. 크게 특징적이지 않지만 사람 살기 편한 도시, 산타 클라라에서의 짧은 첫날밤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
산타 클라라에 오면 무조건 방문해야 할 세 장소가 있다. 바로 혁명 영웅 체 게바라와 관련된 곳들이다. 이 장소들은 비달광장을 기준으로 서쪽과 동쪽으로 각각 떨어져있다. 검소한 여행자라면 도보로 이동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거리다. 하지만 타들어가는 산타 클라라의 날씨 속에 걸어다니는 무리수보다는 교통편을 이용하는 것을 추천한다.
첫 번째는 <사령관 에르네스또 체 게바라 기념관>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곳. 체 게바라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장소이다. 체 게바라의 사망 20주년을 맞아 1987년 건립된 기념관이다. 기념관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체 게바라 동상이다. 기념관의 정 가운데에서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체 게바라가 먼 곳을 응시하며 서 있다. 오른쪽에는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로 떠나기 전 피델 카스트로에게 보냈다던 굳은 결의의 편지가, 왼쪽에는 혁명 영웅들의 전투장면이 양각 부조로 전시되어 있다. 산타 클라라에 갈 때마다 날씨 복이 좋았던 나는 강렬한 빛깔의 푸른 하늘 아래 늠름한 자태의 체 게바라를 피사체로 맘껏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어깨가 이글이글 타 들어가는 것은 덤이지만 말이다.
동상을 기준으로 뒤로 돌아가 보면 추모공간과 전시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입구는 경건한 표정의 군인이 늘 지키고 있다. 소지품은 아무것도 들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무료 짐 보관소에 따로 맡긴 후 입장이 가능하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먼저 추모관에 입장하게 된다. 이곳에는 체 게바라를 포함하여 그의 혁명 동지들의 유해가 모두 안치되어 있고, 각각의 얼굴이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잠깐의 묵념 뒤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혁명 정신을 기리기 위한 영원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복도를 따라 전시공간으로 이동하면 체게바라의 유년시절부터 혁명 시기의 사진들, 그가 썼던 편지들, 사용했던 무기와 전투복 등의 다양한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다.
기념관 관람을 마쳤다면 산타 클라라 관광의 두 번째 장소로 이동한다. 두 번째 장소는 <장갑열차 기념비>이다. 앞서 설명했듯 산타 클라라는 쿠바의 중부지역을 관통하는 도로와 철로의 거점인 평원지대이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을 이용하여 체 게바라는 묘안을 떠올렸다. 불도저를 이용하여 정부군의 물자수송열차가 지나가는 선로를 30m 가량 뜯어내어 열차를 전복시킨 것이다. 정부군은 모두 항복했고, 열차 내에 있던 물자를 모두 혁명군에게 넘겨 주었다.
이 장갑열차 기념비는 1958년 교전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놓은 일종의 박물관이다. 입구 우측에는 철로를 끊을 때 이용했던 불도저가 전시되어 있고, 내부에는 전복된 열차 속에 당시 사용되었던 물건들을 전시해 놓았다. 열차 내부까지 관람하려면 입장료를 내야하지만, 외부를 둘러보는 건 무료다.
세 번째 장소는 장갑열차 기념비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바로 <아이를 안은 체 게바라> 동상이다. 작은 정부청사 앞에 세워 진 내 키만한 이 동상을 지나치지 않고 찾는데는 이유가 있다. 이것은 단순한 체 게바라의 동상이 아니다. 체의 몸 곳곳에 아주 작게 여러가지 상징을 묘사해 놓았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체의 머리카락 안쪽에는 작은 해먹이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의사의 꿈을 접고 혁명가가 된 체 게바라가 불편한 잠자리에서 잠을 자고 순탄하지 않은 미래를 살게 된다는 것을 상징한다. 허리 버클엔 함께 볼리비아에서 혁명을 이끌었던 동지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고, 옷의 주름에는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게릴라로 활동할때 엎드려 절벽을 타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잘 찾아보면 젊은 시절 체 게바라가 타고 다니며 라틴 아메리카 여행을 했던 오토바이도 있다.
체 게바라가 산타 클라라에서 기념비적 업적을 남겼고, 죽은 뒤에도 그 곳에 안치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산타 클라라라는 도시 자체가 충분히 매력적인데도 불구하고, 체 게바라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는 것이 조금 아쉽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쿠바 여행자라면 산타 클라라에서도 하룻밤 묵어가보길 바란다. 여유로운 도시의 평온함과 체 게바라의 의지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