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쏙 드는
까사를 발견하다
오늘, 내게 너무나도 소중한 이들을 소개하려 한다. 바로 나의 쿠바 엄마 '세뇨라(señora, 여사) O'와 그의 가족들이다. 2013년 아바나에서 그들을 처음 만났다. 어떤 필연적인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가족이 운영하는 까사가 마음에 들어, 거기 짐을 풀었을 뿐이다.
아바나 비에하(habana vieja, 올드아바나)에 위치한 그의 까사는 일장일단이 존재하는 까사였다. 일단 최고의 장점은 주인과 함께 살지 않고 독립적인 공간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쿠바에도 독립형 까사가 많이 생겼으나, 그 시절에는 결코 흔치 않았던터라 그야말로 '땡잡았다'고 생각했다. 집안에는 작은 주방과 식기, 냉장고가 있었다. 이 작은 주방 덕분에 쿠바에서도 나만의 한식대첩을 펼칠 수 있었다.
두번째 장점은 위치다. 여행자거리인 오비스뽀 거리에서 고작 두 블록 옆에 위치한 덕분에 환전소, 슈퍼마켓 등 편의시설에 접근하기 매우 용이했다. 세번째 장점은 청결함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간혹 숙소에서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침대벌레의 테러라든지, 사진에서 확인할 수 없었던 퀘퀘한 냄새가 나는 경우 말이다. 하지만 세뇨라 O는 지저분한 건 못 참는 성격이었다. 이 집에서 가장 지저분한 건 단연코 나였다. 세뇨라 O는 매일 아침 조식을 차려주러 왔다가, 내가 식사를 하는 동안 LTE급 속도로 야무지게 청소를 해놓고 사라지곤 했다.
그렇다면 이 숙소의 단점은 무엇일까. 굳이 따지자면 첫째는 여행자거리에 인접하다보니 소음이 잦다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 이 소음에 대한 민감도가 다른데, 나 같은 경우는 베란다에서 쿠바노를 구경하는 것을 즐겼기에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소음은 오히려 즐겼다. 이른 아침 빵수레를 끌고 빵을 파는 아저씨의 목소리, 반갑게 아침인사를 나누고 근황을 묻는 이웃들의 재잘거림 말이다. 하지만 새벽 4시만 되면 등장하는 쓰레기수거 차량이 내는 소리는 소음에 둔한 나조차도 성가시게 느껴졌었다.
두번째 단점은 물이다. 물 문제는 세뇨라O의 까사 뿐만 아니라 올드타운에 위치한 대부분 까사의 단점이기도 하다. 아바나 비에하는 말 그대로 아바나의 구시가지다. 올드타운에 위치한 집들은 백년도 더 된 건물에 각자의 지붕에 물탱크를 이고 산다.
상하수도 시설에 의해 24시간 물이 공급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과하게 물을 낭비하면 안 된다. 간혹 물탱크에 물이 부족한 날은 집주인에게서 손빨래조차 자제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또 하나의 물 문제는 수압이다. 아바나 자체가 수압이 약해서 시원하게 콸콸 나오는 샤워를 만끽할 수 없다. 실수로 변기에 휴지라도 넣는 날은 곧장 재앙을 맛볼 것이다.
각자의 취향은 다르겠지만, 나에게 있어 세뇨라O의 까사는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은 곳이었다. 만일 위에 언급한 장점에 비해 단점이 세 배는 많다고 해도 나는 이 곳에서 묵었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까사의 주인들은 사람 냄새가 났다.
R, 나의 쿠바 절친
나의 쿠바 형제
처음 까사에 도착했을 때, 훤칠하고 잘생긴 젊은 남자가 다가와 2층까지 캐리어를 번쩍 들어 옮겨주었다. 세뇨라 O의 첫째아들이자 정신적 지주인 R이었다. 세뇨라 O의 남편은 오랜 백혈병 투병끝에 세상을 떠났기에, R이 그를 도와 가업인 까사 사업을 함께 유지 중이었다.
R의 첫인상은 친절하고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거기에 쿠바 사람 특유의 여유와 유머러스함이 돋보였다. 개그 코드도 잘 통했다. 그와 나와 나의 하우스메이트들은 곧 ‘절친’이 되었다. 백인에게 남성으로서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나의 취향 탓에, 우리는 단 한 번의 케미도 없이 정말 담백한 '사람 친구' 사이로 남았다. 그것도 세 번 우린 사골처럼 진국인 사이로 말이다.
R에겐 A라는 절친이 있다. 둘은 대학교 동창 사이다. 그들의 전공은 엔지니어링이었지만, A의 현 직업은 살사 강사였다. 첫 살사 강사를 잃고 제대로 된 두번째 강사를 찾고 있던 중, R을 통해 A를 소개 받았다.
집이 매우 가난한 A를 위해 세뇨라O의 가족은 그들의 거실을 살사 강습 장소로 무료 대여해주었다. 레슨을 하기 위해서는 거실의 소파와 테이블을 들어내야 했다. 그래도 R은 매번 귀찮은 내색 한 번 없이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 덕분에 나는 레슨비를 저렴하게 낼 수 있었고, A 또한 본인이 일한 만큼 순수익이 되었으니, 세뇨라 O 가족의 배려로 A와 나 둘 다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나와 나의 친구들은 주 3회 이상 하루 2시간씩 레슨을 받았다. 그런데 각자 레벨이 달라 함께 레슨을 받을 수는 없었다. 결국 1인당 2시간씩 레슨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하루동안 짧게는 2시간, 길게는 8시간까지 R의 집을 점령하고 있었다. 굳이 주인이 함께 살지 않는 까사를 골라 놓고, 그 주인의 생활 공간에 침투해서 하루종일 지낸 것이다.
한 사람이 레슨을 받는 동안 나머지 세 사람은 R의 가족과 노느라 바빴다. 세뇨라 O와 함께 배급 받은 쌀 속의 쭉정이도 골라 내고, R과 함께 럼을 홀짝거리며 시덥잖은 농담을 즐겼다. 때가 되면 세뇨라 O는 1인당 한 접시씩 밥을 주셨다. 밥 한 접시에 팥죽, 고기 한 덩이, 약간의 채소가 곁들여져 있는 전형적인 쿠바 가정식 백반이었다.
쿠바 사람들이 한 끼 식사를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해야하는지 잘 알기에, 음식 받아먹기가 참 미안했다. 하지만 세뇨라 O는 늘 우리에게 부담 갖지 말라며 인심 좋게 접시 한 가득 음식을 주고 또 주었다.
막내아들 D는 식사 시간만 되면 냉장고에서 핫소스를 꺼내왔다. 그의 기준에 '위험한' 소스를 밥에 마구 뿌려 먹는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그에겐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R은 밀가루를 구워서 만든 가예따(galleta, 크래커)를 쉬지 않고 열 개씩 손에 쥐어주었다. 마요네즈도 발라 먹고, 주방에 있는 반찬도 얹어 먹고, 그냥도 씹어 먹고, 계속 먹었다. 멍하니 정신 놓고 씹다보면 어느새 내 손에 가예따 열 개가 리필이 되어 있었다.
살사 레슨 2시간 내리 하드 트레이닝을 받아도, 나머지 시간 동안 세뇨라 O의 부엌살림을 거덜내며 배가 찢어지게 사육 당하다보니 배고플 틈이 없었다. 매번 살림을 거덜내기 미안해서 인원 수대로 닭튀김을 사가거나, 맥주와 예쁜 꽃다발을 사 가기도 했다. 그럴 땐 본의 아니게 파티가 열리곤 했다. 그렇게 나는 주 3회 몸도 마음도 더욱 건강해졌다.
R과 그의 친구들은 나에게 있어 빼놓을 수 없는 피에스타 동반자였다. 엘 미챠(el micha), 차랑가아바네라(charangahabanera) 등 인기가수의 콘서트에 동행할 땐 함께 즐기는 동반자이자 가드 역할을 해주어서 늘 든든했다. 유명인의 콘서트일수록 흥분한 사람이 많은 탓에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길 수 있는데, 그들의 철통방어로 나는 늘 안전했다.
바다에 함께 가면 저렴한 현지인 버전으로 이동하는 대신, 해수욕 하는 내내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대형 어류를 낚아 온 아저씨도 구경하고, 축구하며 멋있는 척하는 내 친구들도 구경했다. 맥주는 내가 쏘고, 안주는 R이 쐈다.
흥이 많은 이들이라 길을 가다 음악이 나오면 살사댄스타임이 시작되었다. 외국인이 섞여 길거리에서 춤을 추는 우리 무리는 늘 세간의 주목을 받기 딱 좋았다. R의 가족 중 ‘생일자’가 나오면 그 날은 비장한 각오를 하고 즐겨야 되는 날이었다. 왜냐면 그들은 다음날까지 날 놓아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뇨라 O
마음으로 나를 움직이는
쿠바 엄마
처음 그를 봤을 땐 무서웠다. 이유는 모르지만 나는 백인 중년여성이 무섭다. 매일 아침 바쁜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활짝 웃으며 '나오미! 부에노스 디아스(나오미! 좋은 아침)' 하고 인사할 때마다 바보같이 진짜 좋은 아침인가 하고 눈치를 살피곤 했다.
하지만 진심은 언제나 통하는 법 아닌가. 늘 아침밥을 맛있게 싹싹 비우는 나를 보며 아줌마는 엄마의 미소를 지어주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나의 안부를 물어주고, 나의 더듬대는 스페인어를 인내심 있게 들어주셨다.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친해지자 그의 고단한 인생이 안쓰러웠다. 그는 남편이 죽은 뒤 아들 셋을 홀로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의 본업은 아바나 대학교 철학과 교수이지만, 상대적으로 수입이 좋은 까사 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교편을 중단했다. 집에서도 살림을 해야 했고, 까사 관리 또한 그의 몫이었기에 두 채의 집을 오가며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세뇨라 O에게 하루라도 자유시간을 주고 싶던 나와 하우스메이트들은 '다른 여행객들 없이 우리가 체류하는 동안 일요일에는 조식을 차려주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제안했다. 그는 절대 안될 일이라며, 조식은 약속이라며 거절했다. '그렇다면 전날 냉장고에 조식재료를 두고 가면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다시 제안해봤다. 처음에는 어색해 했지만, 역시나 사람은 다 같다. 이내 그는 하루의 휴가에 깊은 만족을 느꼈다.
어느 토요일 저녁에 R이 조식재료를 갖다주며 말했다.
우리 엄마, 오늘 피에스타 나갈 거래. 내일 늦잠 자도 되니까 잔뜩 마실 기대에 부풀어 있어! 너희들 덕분이야. 정말 고마워!
까사 사업 초창기였던 2013년, 세뇨라 O의 착한 성품 탓에 까사 운영방식은 대부분 여행자들의 편의에 모든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이를테면 여행자가 조식을 9시에 약속하고 늦잠을 자면, 그가 나올때까지 다음 일정을 진행하지 못하고 거실에서 안절부절했다. 당일 체크아웃 예정인 여행자에게 숙박비를 달라고 말도 못하고, 줄 때까지 소파에 앉아있기도 했다. 여행자가 대부분 한국인 또는 일본인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스페인어는 커녕 일본인 중엔 영어도 서툰 이들이 많았다. 언제부턴가 새로운 여행자가 들어오면 내가 세뇨라 O 대신 많은 설명을 해주었다.
조식이 무료인 대신 약속시간은 꼭 지켜주셔야 해요. 주인이 같이 살지 않아서, 방에서 나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거든요. 그리고 숙박비 정산은 원하시는 때에 해주시면 되지만, 체크아웃 당일은 조식전까지는 내 주셔야해요. 이 두 가지는 설명이 길어서 잘 못 알아들으시더라고요.
물론 여행자들이 궁금한 여행 관련 정보 또한 내가 대신 대답해줄 때가 많았다. 가끔 나조차도 모를 땐 세뇨라 O에게 대신 질문하며 답변을 통역해주기도 했다. 한번은 세뇨라 O가 시험 감독 당번을 맡아 아침 일찍 학교에 가야 한다며 난감해 하기에, 내가 대신 여행자들에게 조식을 차려주었다. 언젠가부터 여행자가 숙박을 하러 오면 세뇨라 O는 이렇게 말했다.
나오미는 이 까사의 관리인이야. 이 까사는 내 까사가 아니라 나오미 까사나 다름없지. 나오미가 설명하는대로 지내면 돼.
할 일 없는 나도 심심치 않아 좋았고, 세뇨라 O는 도와주는 이가 생겨 좋았다. 내게 받은 작은 도움은 늘 세뇨라O의 본가에서 음식과 사랑이 되어 두 배, 세 배로 돌아왔다. 우리는 환상의 파트너였다.
지구 반대편에
가족이 있다
쿠바에서 잠시 한국으로 귀국했다. 쿠바가 좋아 여행기간을 연장하고 싶었지만, 병원 정기검진을 받아야 했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나의 몸은 건강해져 있었다. 의사는 내게 '약을 반용량으로 줄여도 되겠다' 라며 처방 내용을 변경했다.
정기검진 결과가 좋자, 나는 다시 짐을 싸고 쿠바로 날아갔다. 귀국 후 한 달만이었다. 문제는 마음이 앞선 탓에 약 용량을 조절한지 며칠 되지 않은 상태에서 쿠바 일정을 강행했다는 것이다. 쿠바에 도착한 나는 피곤했다. ‘시차 때문일 거야’라고 현실을 외면했지만, 그렇다기에도 수면 시간이 너무 길었다.
해가 떴을 때 내리 잠을 잤고, 해진 뒤에 잠시 깼으나, 아무 의욕이 없어 외출하지 않았다. 세뇨라 O가 눈치챌까봐 조식시간은 칼 같이 지키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그러나 세뇨라 O는 금방 알아챘다. 그는 이미 숙소 주인이 아니라 내게 엄마 같은 존재였으니 말이다.
나오미, 어제 뭐 했어? 종일 집에 불이 꺼져있던데… 하루종일 잔 거니? 어디 아픈 데 있어?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
내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걱정 어린 눈길을 보낸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지는 기미가 보여야하는데, 기분까지 울적한 상황이 왔다. 세뇨라 O가 차려준 조식 외에 끼니를 거의 챙기지 않았고, 그저 침대에만 있었다. 이대로 한국에 돌아가야 할까봐 두려우면서도, 아무 의욕이 없는 내 몸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R이 찾아왔다.
나오미! 풀 사이드 비키니 파티 입장권을 구해왔어. 같이 가자. 갈 거지? 간다고 해줘. 가자.
그의 호들갑에 못 이겨 승낙했다. 멜리하코히바 호텔의 수영장에서 열린 파티였다. 입구에 거의 다다랐을 때 R이 말했다.
혹시 누가 넌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중국인 교환학생이다’라고 해. 전공이 뭐냐고 물으면 '어쩌구저쩌구'라고 말하면 돼.
그렇다. 이 파티는 그의 대학교 졸업생들의 동창회 같은 파티였다. 외국인은 참가할 수 없는 파티인데 무작정 나를 초대한 것이다. R 또한 눈치채고 있었다. 내가 전과 달리 집안에만 갇혀 지내고 있다는 것을. 나는 키 큰 R의 친구 두 명 사이에 껴서 샌드위치로 입장에 성공했다. 수영장에 도착해보니 거짓말 안하고 외국인은 나 혼자였다. 초대 받지 않은 손님에게 쿠바나는 새침했고 쿠바노는 관대했다. 이 날 나는 5명의 남자에 둘러싸여 파티를 즐겼고, 거짓말처럼 나의 우울병이 반쯤 나았다.
파티를 끝내고 까사로 돌아오는 길, 집에 가서 같이 저녁을 먹자는 R의 제안을 뿌리쳤다. 아직 반쯤 남은 우울한 감정이 어서 혼자 만의 공간으로 오라고 나를 부르고 있었다. R은 까사로 들어가는 내게 꼭 저녁밥을 챙겨먹으라고 세 번이나 당부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구아바 한 개와 치즈 몇 조각을 잘라 접시에 담고,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과일을 씹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노크하는 인기척이 들려 문을 열었다. R이었다. 그의 손에는 도시락이 들려있었다.
이럴 줄 알았어! 밥 먹으랬잖아, 밥! 이런 치즈, 과일은 간식이라고. 나오미. 걱정되려고 한다. 한국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던거니? 혼자 있기 힘들면 당분간 우리 가족과 지내는 건 어때?
그의 가족에게 더 이상 걱정을 끼칠 수 없어 사실대로 털어 놓았다. 약의 적응과정임을 설명 했지만, 그 얘기를 들은 이후 세뇨라 O와 R은 더더욱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결국 끊임없는 R의 외출신청과 세뇨라 O의 삼시세끼 시스템에 나의 몸은 200퍼센트 충전되었다. 남은 기간 동안 다시 한 번 쿠바와 사랑에 빠질 수 있게 되었다.
R은 몇년 전 방탕한 청춘생활을 정리하고 결혼을 했다. 그리고 본인과 똑닮은 딸 K의 바보가 되었다. 10년 간 독신으로 지내던 세뇨라 O에게도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다. 성품이 진지한 Y와 함께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아들들에게 까사 사업을 분배하여 일손을 줄였다.
이제 그들은 나를 '아미가(amiga, 친구)'로 부르지 않는다. R은 나를 '미 에르마나(mi hermana, 나의 자매)'라고 부르고, 세뇨라 O도 나를 '미 이하 꼬레아나(mi hija coreana, 나의 한국인 딸)'라고 부른다다. 내가 쿠바에 계속 가는 이유, 많고 많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가족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내 가족이 보고 싶어 내년에도 쿠바에 가야겠다. 쿠바 엄마가 차려주는 따순 밥 한 끼가 절실한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