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를 모르는
산티아고 사람
내 남자친구 O군은 산티아게로(Santiaguero, 산티아고 사람)이다. 엄밀히 말하면 산티아고 주(州)에 위치한 아주 작은 시골마을에 살고 있다. 그가 나고 자란 곳의 이름은 로스 레이날도스(Los Reynaldos), 산티아고에서 50km 거리에 위치해 있다. 아바나에서 5년 넘게 경찰로 근무하던 그는 경찰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2018년, 산티아고에서 그를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에게 산티아고의 숨은 명소를 소개받고 데이트 하는 상상을 했었다. 그러나 그는 산티아고 중심가 지리조차 잘 알지 못했고 오히려 나에게 가이드를 받았다.
O와 사귄지 햇수로 7년차, 늘 그의 집을 궁금해 했지만 그는 나를 만류하기 바빴다. 너는 시골의 삶을 모른다, 너가 사는 세계와 많이 다르다, 바가지로 물을 끼얹어 샤워해야 한다, 모기가 많다 등 구구절절 이유도 십여가지 였다. 나는 시골에서 많이 자 봤다, 재래식 화장실에 익숙하다, 인도에서 바가지 샤워 해봤다 등 그를 설득하고 또 설득하여 마침내 나는 그가 나고 자란 마을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마을, 로스 레이날도스와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산티아고 비아술 버스 정류장에서 O군을 만났다. 그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승용차를 가진 친구에게 약간의 돈을 주고 나를 데리러 시내로 나왔다. 작은 승용차를 타고 약 1시간 동안 시골길을 내달렸다. 가는 동안의 풍경부터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도로 사정이 조금 나아진 바라코아로 향하는 길 같은 느낌이었다. 교통편이 잘 갖추어져 있지 않은 시골이다 보니, 산티아고까지 고작 50km라도 평소엔 트럭을 몇번이나 갈아타야 한다고 한다. '산티아고까지 갈 일이 거의 없을 수 밖에 없었겠구나.' 그제서야 산티아고를 잘 모르는 O를 이해할 수 있었다.
넓게 펼쳐진 평원과 끝없는 야자수의 향연. 가는 내내 입꼬리가 올라가 실실 웃는 나를 보며 O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40분 정도 달렸을 때부터 끝없는 사탕수수 밭이 눈앞에 펼쳐졌다.
"와!!! 이게 다 사탕수수야? 나 먹어보고 싶어!"
차시남(차가운 시골 남자) O군은 "지금?" 하고 물으며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차를 세웠다. 동행했던 그의 형 G가 사탕수수밭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대가 실한 사탕수수를 하나 뽑아 와 내 품에 안겨주었다.
다시 시동을 걸고 10분쯤 달렸을 때 O군은 내게 말했다.
"로스 레이날도스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너 이제 후회해도 도망갈 수 없어."
차 안에서 바라 본 마을은 정말 작았다. 아담한 성당 하나, 마을의 중심인 광장 하나, 그리고 마을을 통과하는 긴 기찻길이 있었다. 기찻길의 끝에는 기차역이 보였다. 로스 레이날도스는 2018년까지 집안에서 휴대폰 전파가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O군은 3~4일에 한번 유일하게 전파가 잡히는 기차역에 가서 나와 통화를 하곤 했었다. 그의 불충분한 설명에 기대어 7년 간 상상해왔던 장소에 내가 와있다니, 영화 속 세트장에 온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
드디어 그의 집에 도착했다. 벌써부터 문 앞에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의 엄마 마리엘라와 반가운 첫 인사를 나눴다. 그의 집은 나무로 지어진 전형적인 시골집이었다. 돌아가신 O의 아버지가 직접 지었다는 이 집은 외부에서 볼 땐 작고 낡아보였지만, 내부는 제법 넓었다. 깔끔한 성격의 마리엘라가 시도때도 없이 쓸고 닦아 집은 깨끗하고 아늑했다. 거실 정가운데 놓여진 젊은 시절 마리엘라의 초상화가 거실 인테리어의 화룡점정이었다.
작은 시골 동네에 난데없이 찾아 온 '중국여자' 에 대한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마리엘라는 좋겠다! 치나(중국 여자)가 집에 놀러 와서!"
"O는 어디서 이렇게 상냥한 여자친구를 만났대? 좋겠다 얘."
O군은 별 용건없이 시도때도 없이 드나드는 이웃들에게 '이 사람은 치나가 아니라 꼬레아나야.' 라고 전하기 바빴다. 어깨에 한껏 힘이 들어 간 마리엘라가 양산을 펼치고 본격적으로 '나오미 뽐내기'에 돌입했다. 나는 제대로 한 번 앉아 보지도 못하고 그의 손에 이끌려 동네를 돌기 시작했다.
"이 곳은 내가 일하는 빵 공장, 그 옆은 병원, 저기는 은행이고.... 헤이! 이봐! 이리 와 봐! 우리 며느리 소개해 줄게! 인사해. 이 쪽은 나오미야. 어때? 너무 사랑스럽지?"
마리엘라가 여기저기에 나를 소개하랴, 나에게 동네를 소개하랴, 다방면으로 매우 바빴다. 마리엘라의 손에 이끌려 잠시 걸어다녔음에도 온 동네 사람들과 통성명을 한 기분이었다. 로스 레이날도스 사람들은 갑자기 찾아 온 이방인을 경계하거나 꺼리지않았다. 내가 화장실이 급하면 기꺼이 집을 내어주었고, 무슨 열매냐 물으면 두 손 가득 따주었다. 갓 만든 빵이 먹고 싶다 하니 공장에 데려가서 금방 만든 빵을 쥐어주었고, 손빨래가 귀찮아 옷을 안 빨고 있으니 가져가서 내 옷 빨래까지 해주었다. 이 넘치는 시골 인심 속에서 어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두 마을을 이어주는 철도 다리
로스 레이날도스엔 작은 강줄기가 흐른다. 강을 기준으로 동쪽은 발또니(baltoni), 서쪽은 후리스딕시옹(jurisdicción)이라고 부른다. O군의 집은 발또니에 있고, 그의 외조부님들과 두 이모의 집은 후리스딕시옹에 있다. 두 마을 사이는 철로 겸 다리로 이어져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가족, 친구와의 왕래를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다리를 건넌다.
O군은 매일 아침 이 다리를 건너 외조부님 댁으로 간다. 가족들과 아침 인사를 할 겸, 본인 집보다는 상황이 좋은 할머니나 이모집의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함이다. 아침 일찍 O군을 따라 길을 나서보았다. 다리는 열차도 지나갈만큼 튼튼하게 지어졌지만, 그럼에도 묘하게 무서웠다. 바닥에 사이사이 공간이 넓고, 그 아래로 까마득한 절벽이 보여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나를 위해 마리엘라가 함께 길을 나섰다. 앞장 서서 걷는 그의 뒷꿈치를 쫓아 열심히 걸었다. 좁은 다리 위엔 수시로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서, 어쩌다 맞은편에서 건너오는 사람과 마주치면 살짝 몸을 틀어 비켜줘야 했다. 새파랗게 질린 내 얼굴을 보며 뭐가 그리 우스운지 O군은 연실 실실 웃어댔다.
다리를 건너자 기찻길을 중심으로 양 옆에 아담한 집들이 줄세워진 소담한 풍경이 펼쳐졌다. 그 집들 가운데 O군의 가족들이 살고 있다. 둘째이모의 집 뒤뜰에는 큰 코코넛 나무가 있다. 이 곳에 오기 전부터 '코코넛, 코코넛' 노래를 불렀던 나는 가족들과 인사를 마치자마자 뒤뜰로 달려갔다. 잘 익은 큼직한 코코넛이 주렁주렁 열려 있는 것을 보자 나는 흥분해서 O에게 외쳤다.
"나 매일 마실래! 매일 매일 따 줘! 이 나무, 나 주세요, 이모!"
성품 인자한 이모는 환하게 웃으며 '그래, 나오미 다 가져' 라고 하셨다. 나무를 보고 좋아하는 내게 막내 이모는 본인의 집을 보여주고 싶다고 하셨다. 막내이모는 과일나무 부자였다. 구아바, 망고, 코코넛, 바나나, 없는 게 없었다. 이모가 따준 구아바를 먹으며 밖으로 나와 보니, 마을 사람들이 마당에 탁자를 내놓고 도미노게임(마작 같이 생긴 작은 칩을 이용한 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기적소리를 내며 기차 한 대가 그 앞을 지나 철로 다리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뭐가 좋은지 달리는 기차를 쫒아 전력질주를 하며 손을 흔들었다. 사람 머리보다 큰 양배추를 치나에게 자랑하고 싶다며 저 멀리서부터 들고 오는 아낙네도 만났다. 언젠가 먼 곳, 미지의 시골마을에 가면 이런 풍경이 있으려나, 상상했던 그 자체였다.
다음날 막내이모의 아들이 발또니 집에 들렀다. O군의 친척답게 말이 없는 그는 내 앞에 큼지막한 보라색 열매를 내려놓고는 '까이미또' 라고 한 마디 남기고 사라졌다. 아침 일찍부터 막내이모가 "나오미가 이 과일은 못 먹어 봤을테니, 네가 가져다 주고 와."라고 했던 것. 그는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철로 다리를 건너 제 집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둘째이모 남편이 주렁주렁 코코넛 열매를 들고 찾아오셨다.
"이거 나오미 갖다 주래서 왔지."
내게 무한으로 사랑을 베풀던 로스 레이날도스의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랑은 다리를 타고 넘나들었다.
로스 레이날도스를 떠나던 날, 나의 마음은 한없이 쓸쓸했다. 너무도 먼 곳이기에, 쉽게 다시 찾아올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더욱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떠나는 동안 배곯지 말라며 바나나를 따다 주신 이모와, 화장실 가라고 동전을 챙겨주시던 나의 예비 시엄마 마리엘라, 매일 아침 화장실을 사용하게 해 주신 옆집 이웃들과, 빨래 해주셨던 윗집 아주머니까지, 전부 내 마음에 콕콕 박혔다. 내가 이 기억을 간직하듯 그들도 나를 추억해주길 바라는 건 욕심일까. 로스 레이날도스의 기찻길을 거닐고 싶다. 흔한 레스토랑도 관광지도 없지만, 그 시시한 하루를 맞이하기 위해 내년에도 나는 그 곳에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