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셰어하우스
4인방을 소개합니다
내가 몇 번이고 즐겨 보는 최애 일본드라마가 있다. <수박>이라는 드라마다. 여성 네 명과 '해피니스산챠'라는 집이 등장한다. 이 드라마는 성장 배경도 성격도 모두 다른 여성들이 해피니스산챠에서 만나 함께 맛있는 집밥을 나누며 진정한 '식구'가 되는 이야기이다. 영화 <카모메 식당>, <안경>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드라마는 반드시 좋아할테니 살포시 추천을 한다.
간호사로 일하던 시절, 중환자실에서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난 뒤에는 꼭 이 드라마를 보며 숨을 고르곤 했다. 늘 내일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던 나에게 이 드라마는 안정이자 대리만족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도 소소한 행복을 즐길 수 있는 행운이 찾아왔다. 그것도 쿠바의 아바나 구 시가지 작은 까사에서 말이다. 서로 입국 날짜도, 출국 날짜도 달랐지만, 우리는 함께하는 동안 완벽한 케미를 자랑했다. 지금부터 내 인생 최초의 '쿠바 셰어하우스 멤버'를 소개하겠다.
첫번째 멤버는 M이다.
그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이 셰어하우스는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남자한테 비참하게 이별 당하고 극도로 우울했던 어느날, J까사의 여행정보북쿠바 가이드북이 없던 시절 한국인 여행자들이 여행정보를 적어둔 노트을 뒤적대고 있었다.
고추장 있으신 분, 나눔해주시면 맛난 한식 대접합니다.
그 때 발견한 M의 한 줄 메모. 이것이 우리 인연의 시작이었다. 연락처를 받아적고, 숙소로 돌아가 곧장 그에게 전화를 했다. 평상시의 나였다면 절대 연락할 수 없었을 텐데,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나를 슬프게 만든 몹쓸 놈아, 고맙다...)
M이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전화주셨냐는 그의 물음에, 미처 대답을 준비하지 못했던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외로워서요...
입장 바꿔 생각하면, M은 내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수화기 너머에서 답변이 왔다.
밥 해줄게요. 우리 만나요.
군더더기 없는 짧은 답변이었지만 친절했다. 아직 만나지도 않았는데 위로 받은 느낌에 눈물이 펑펑 났다. 가만히 가방을 열고 맥반석 오징어 한 봉지를 꺼냈다. 내가 가진 눈꼽만큼의 고추장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M을 만났다. 밤톨만한 고추장을 수줍게 내미는 내 손을 보며 그는 그야말로 빵! 터졌다.
고추장보다 맥반석이 더 반갑네! 들어와요, 들어와!
그가 해 준 맛있는 한식과 초면답지 않게 편한 대화는 다친 나의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때마침 그 까사에 묵고 있는 사람은 M 한 명 뿐이었다. 나는 지체없이 다음날 까사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날 밤에 C를 만났다.
원래 묵고 있던 까사로 다시 돌아갔다. 거기에 C가 있었다. 늦은 밤 한국인 남성과 C가 동시에 체크인을 한 것이다. 식탁에 앉아 잠시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한국인 남성은 본인을 '아메리칸 시티즌'이라 거듭 강조하며 어거지로 혀를 꼬느라 바빴다.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그는 C에게 내일도 같이 일정을 보내자고 권유했고, C는 아무리 봐도 원치 않는 표정인데 똑부러지게 거절하지 못했다.
까사는 2인실 도미토리 형태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C는 내 방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방에서 대화를 나눠보니, 공항에서부터 까사까지 오는 짧은 시간 동안 그 한국인 남성에게 많이도 시달렸던 것 같았다. 잠들기 전 C는 내게 수줍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쿠바에서 만나는 첫 인연에게 선물하기 위해 귀걸이를 구매했다고 했다. '아메리칸 시티즌' 아저씨가 첫 인연 취급을 받지 못한 덕분에 귀여운 토성 귀걸이는 내 차지가 되었다. C를 아저씨로부터 구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다음날이 밝았다. 우리는 조식을 먹기 위해 식탁에 모였다. '아메리칸 시티즌' 아저씨는 아침부터 누구도 물어보지 않은 자기 자랑에 침을 튀겼다. 나는 충동적으로 C에게 물었다.
언니, 제가 오늘 숙소를 옮기는데 짐이 많아서요. 정말 죄송하지만 제 이사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대부분은 거절할 것이다. 누가 여행 온 첫날부터 내 관광 나가기 전에 남의 이삿짐을 날라주고 싶을까? 하지만 C는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내 짐은 많지 않았다. 캐리어 하나, 작은 배낭 하나. 짐을 끌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말했다.
언니, 놀라셨죠. 죄송해요. 언니가 저 아저씨랑 같이 다니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 충동적으로 얘기했어요. 저 짐 가벼워서 혼자 가도 돼요. 근데 혹시 까사 옮길 생각 없으세요? 제가 가는 까사 시설이 여기보다 좋고 분위기도 괜찮은데...
C는 딱히 잡아놓은 일정도 없다며, 다른 까사도 구경할 겸 같이 가자고 했다. 내 짐을 새 까사에 옮기고 M과 셋이 앉아 대화를 하다가 결국 C의 짐도 옮겼다. M의 쿠바 체류 기간 3개월, 나오미 2개월, C는 1개월. 이렇게 세 여인네의 꽉 찬 동거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누군가 강제한 것도 아닌데 그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다. 같이 조식을 먹고, 산책을 가고, 살사 레슨을 받고, 말레꼰에서 럼을 홀짝이며 일몰을 보았다. 각자가 겪어 온 인생 이야기는 충분히 흥미로웠고, 앞으로의 삶에 대한 지향점도 일치해서 좋았다.
나는 이들과 함께 하는 동안 '나를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참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말로만 나 자신을 사랑하자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부터 발 끝까지, 몸 속 장기 하나하나까지 모든 것이 나 자신이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직접 느끼는 것 말이다. 이렇게 깨닫고 나니 더 이상 실연의 아픔으로 밥을 굶지 않게 되었고, 암에 걸렸던 내 스스로를 자책하지도 않게 되었으며, 신선한 재료를 이용하여 맛있게 먹는 한 끼 식사가 나의 건강유지에 얼마나 중요한지도 진심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Y가 왔다.
어느 날, 혼자 외출했던 M이 한 한국인 여성을 데리고 귀가했다.
인사해. Y라는 친구인데 말레꼰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멍 때리고 있길래 내가 주워왔어.
Y는 밥이나 한 끼 먹자고 M을 따라왔다가 마침 빈 침대 하나를 보고 까사를 옮겼다. 그렇게 '쿠바 셰어하우스'의 막내이자 마지막 멤버가 되었다. Y는 어린 친구임에도 속이 깊고 생각이 바른 여성이었다. 내가 저 나이 때 결코 생각하지 못했을 법한 것들을 고민하는 똑순이였다.
우리 넷은 시장을 봐서 맛있는 요리를 해 먹고, 비 오는 차창을 바라보며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매일 특별할 것 없던 일상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 특별했던 시간이었다.
행복한 에너지는
건강을 낳는다
셰어하우스가 우리에게 미치는 좋은 영향은 신체 변화를 통해 보고되었다. C는 한국에서 불면증이 심해 일주일에 10시간도 채 못 잤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C가 침대에서 떡실신 상태로 발견되기 시작했다. 밤에는 물론이고, 잠시 즐기는 낮잠도 꿀잠이었다. 숨은 쉬고 있나, 코 밑에 휴지를 붙여볼까 고민이 들 정도로 잘 잤다.
새벽 일찍 다른 도시에 간다고 초저녁에 침실로 들어간 C가 다음날 정오를 훌쩍 넘겨 눈을 비비며 침실에서 나오는 모습은 실로 충격이었다.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불면증에서 기면증으로 증세가 바뀐 것 아니냐고 할 정도로 잘 잤다. 잠을 푹 자니 모닝 편두통도 사라지고 혈색이 좋아졌으며 활력이 흘렀다.
Y의 가장 큰 변화는 식사량이 늘었다는 것이다. 처음 함께 식사를 하던 날에 Y는 새모이만큼 밖에 먹지 않았다. 군살 하나 없이 늘씬하고, 충분히 아름다운데도, 의식적으로 적게 먹으려 하는 게 눈에 보여 안타까웠다.
Y는 언젠가부터 늘 누군가에게 인정 받고 사랑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온 것 같다고 말했다. 맛없어도 맛있는 척을 했고, 좋지 않아도 좋다고 감탄사를 뱉었다고 했다. 사실 이건 Y뿐만 아니라 다수의 한국인 여성이 겪고 있는 일상적인 불안함일 것이다. 내가 겪어 본 바로는 한국 외 그 어떤 국가도 이토록 여성을 외모로써 평가하고, 타인에게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곳이 없었다.
우리는 앞다퉈 Y에게 지금 이대로 충분히 가치 있고 훌륭한 존재임을 이야기해주었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내 멋대로 살아가는 쿠바노들의 삶의 태도 또한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고 말이다. Y는 점차 적당량의 식사를 했다. 그리고 더 이상 음식을 먹으며 불안해하지 않았다.
나의 변화는 체중이 줄었다는 것이다. 삼시세끼를 다 챙겨 먹는 건 물론 셰어하우스 멤버 4명 중 가장 독보적인 식욕을 가졌음에도, 체중이 줄고 몸이 점점 가벼워졌다. 매일 정기적으로 하는 산책과 살사 레슨을 통해 적당량의 땀을 흘리고, 규칙적인 시간에 삼시세끼를 챙겨먹었더니 집 나간 호르몬 밸런스가 다시 잡혔다. 체중이 줄어드니 일상 활동량도 늘고, 코골이를 하지 않아 수면의 질이 상승했다.
쿠바에 올 때부터 몸도 마음도 건강했던 M은 셰어하우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도맡았다. M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제안하면 나머지 세 멤버는 늘 '콜!'을 외쳤다. 세 사람이 일 중독에 걸려서, 자기 기준에 엄격해서, 미래가 불안해서 갈팡질팡 할 때면 M은 늘 말했다.
왜들 이래~ 인생 별 거 없어. 나 스스로한테 관대하면 왜 안돼? 내가 행복해야 남도 행복한 거지. 안 그래?
쿠바 셰어하우스 생활 한 달 만에 파업했던 호르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명씩 생리가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일 중독과 불면증으로 생리불순에 시달렸던 C를 시작으로, 다이어트로 인한 영양분 부족으로 생리가 끊겼던 Y, 삼교대와 비만으로 인해 다낭성난소증후군을 앓고 있는 나오미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리가 빵빵빵 터졌다. 평생 규칙적인 생리주기를 갖고 살아온 M은 생리에 경악하는 우리를 보며 더 경악했다.
생리불순은 내 몸이 정상적으로 흐르고 있지 않다고 가르쳐 주는 너무 쉬운 지표잖아. 어떻게 세 사람 모두 이걸 무시하고 살아온 거야? 내 몸이 힘들어하면 사랑하고 돌봐줘야지. 이 사람들 정말 안 되겠네.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세 명이 뿜는 강력한 여성호르몬의 기운으로 그렇게 규칙적이던 M의 생리일정까지 며칠 당겨져버렸다. 매일의 일정을 함께하다 못해 이젠 피까지 함께 흘리는 네 여성들은 서로의 안녕을 위해 돼지고기 도시락과 상추를 사다가 열심히 쌈을 싸먹었다.
한 번 식구는
영원한 식구
가장 먼저 귀국한 Y의 뒤를 이어 C, 나오미, 안방마님 M이 순서대로 귀국했다. 나는 M과 하루 차이로 먼저 귀국을 했다. 쿠바를 떠나고 싶지 않아 떠나기 보름전부터 우울증 증상이 보였고, 떠나기 하루 전에는 거의 패닉 상태로 엉엉 울었다.
거 참, 울긴 왜 울어? 오고 싶음 또 오면 되는 걸. 일단 가. 건강 체크해야 하니 가야지. 갔다가 정 죽겠으면 다시 와. 한 번 건너면 못 돌아오는 저승길 가는 다리도 아닌데 왜 이래? 뚝 해!
M의 무심한 듯 시크한 위로는 무너진 내 멘탈에 큰 힘이 되었다. M보다 하루 먼저 출국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떠나는 날, M은 새벽 택시에 탄 나를 "나오미야! 웃으면서 가. 알지?" 하며 배웅해줬다.
하루 뒤, M의 귀국을 끝으로 우리의 화려했던 쿠반 셰어하우스는 막을 내렸다.
귀국 후 병원에 복직한 나는 집도 절도 돈도 없었다. 결국 병원 근처 고시원 창문 있는 방에 터를 잡았다. 좁은 방에 늘어 놓은 쿠바 기념품들만 바라보며 시름을 달래던 내게 어느 날 M이 연락을 했다. 그가 한국에서 살고 있는 셰어하우스에 초대한 것이다. 그 날, M의 하우스 메이트들과 함께 맛난 저녁식사를 했다. 얼마 뒤, 나는 그 셰어하우스에 새 멤버로 입주했다. 드라마 <수박>의 삶이 다시 시작되었다
자주 볼 순 없지만 C와도 연락의 끈을 놓지 않았다. C는 바쁜 시간을 쪼개서 나와 M이 살고있는 셰어하우스에 놀러 오기도 하고, 함께 제주도에 놀러가기도 했다. 조만간 또 그의 집에 놀러 갈 계획이다. 한우를 구워주신단다. 방문 선물로는 아바나클럽 7년산 럼주를 가져가려 한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지구의 곳곳을 누비는 Y는 귀국 후 딱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맞게 SNS로 꾸준히 서로의 소식을 받아보는 중! 시간이 한참 흘렀지만 스스로에게 소홀해지려 할 때마다 쿠바의 셰어하우스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네 여인의 완벽한 호흡이 시너지를 줬던 그 시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