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일기 - 21주차

생각하다임신과 출산

임신일기 - 21주차

ND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2018년 5월14일

임신을 했다고 하니 아기를 낳은 경험이 있는 지인들은 하나같이 임신 기간 중 입원할 만한 일이 절대 생기지 않길 바란다고 빌어줬다. 임신을 이유로 아프게 되면 네 몸도 몸이지만 보험이 안돼 경제적으로도 힘들어질 거라고. 그 때까지만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공공보험은 적용되지 않더라도 나는 개인보험을 골고루 아주 많이 들어놨으니까.

요 며칠 배가 뭉치는 것이 심상치 않다. 이게 조기진통인 건 아닐까. 혹시 조산의 위험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은 되지만 현대의학의 도움을 받아 약물을 투여 받고 필요한 처치를 하면 충분히 견뎌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내가 들어놓은 보험의 약관들을 살펴봤다. 태아보험까지 매달 적지 않은 보험료를 내고 있으니 중복보장까지도 가능한지 확인해보려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 일까. 확인하는 보험 약관마다 '임신•출산으로 인한 경우는 보장 제외' 라는 문구가 있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임신 중 산부인과 진료비나 검사비에 보험적용이 안 된다는 게, 나는 국가에서 보장하는 건강보험 얘긴 줄 알았다. 병원에서 임신 주수에 따라 행해지는 검사를 안내 받을 때 어떤 검사는 건강보험적용이 되지만 어떤 건 안 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개인보험, 그러니까 실비보험처리도 안 되는 거라고?

이제 와서 당황스럽기 시작했다. 임신 초기에는 입덧이 심해 탈수현상으로, 중후기엔 자궁수축이나 임신성 당뇨로, 임부라면 정말 흔하게들 입원하는데 실비보험 처리가 안 된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내가 지금도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암보험, 생명보험, 실비보험, CI보험, 태아보험 모두 임신 중엔 무용지물이라니.

원래 몸이 약하기도 하고 초산이라 그런지 배가 자주 뭉친다. 배가 뭉친다는 건 자궁이 수축한다는 거고, 이 수축이 규칙적이면 진통이라고 본다. 조기자궁수축은 아기가 조산할 수 있는 위급한 일이라 병원에 입원해 자궁수축억제제를 투여 받으며 가만히 누워있는 일 밖에는 해법이 없다. 그런데 그 모든 비용을 임부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니. 생각할수록 기가 찬다.

앞으로 내 몸은 어떻게 될까. 병원에 입원해야하는 상황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매달 수십만원의 보험료를 지불하면서 입원이나 의료비에 대한 부담이 전혀 없을거라 안심했는데, 이게 무슨 상황이지. 임신과 출산은 질병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실비보험처리가 안된다는 말이 너무 웃기다.

2018년 5월14일

보험에 대한 얘기를 하니, 어떤 이는 본디 보험이란 건 사람들이 미리 금전을 갹출하여 공통자금을 준비하고 이후 사고 발생자에게 지급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임신 관련 질병을 보장하면 임신 계획이 없는 여성에겐 부당하단 얘기를 한다. 인생이란 그 누구도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기 때문에 보험을 드는 게 아니었던가? 임신 계획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게 될 뿐더러, 더 문제가 되는 건 계획하지 않은 임신일 텐데. 이에 대해서도 같은 주장을 하려나. 그는 보험수리학 운운하며 보험의 임신관련 보장에 대한 주장은 비합리적이라 매도했지만 결국은 다 이런 말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임신, 출산이란 게 다 당신 몫이다. 모르고 시작했나?

관행이 무엇이든 간에 더 이상 이래선 안 된다고 계속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를 가르치려 들고, 다 내가 감당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걸까.

2018년 5월15일

이런 몸으로 회사를 다니는 게 부담이 된다. 하루하루 간신히 출근하는 날 보면서 청소년 자녀를 둔 상사는 "나도 애 낳느라 그렇게 힘들었는데 지금은 웬수야 웬수. 고생해봐야 다 소용없어." 하며 혀를 찬다. 몸은 힘들지만 아기와 함께 할 날들을 기대하며 견뎌내고 있는 내게 왜 그런 말로 우리의 미래까지 매장하려는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그만큼 자녀를 양육하는 게 제 맘 같지 않다는 얘기리라 생각한다.

남편과 임신을 계획할 때부터 임신과 출산이 아무리 힘들었어도 아기에게 ‘널 낳느라 내가 이렇게나 고생했다’는 말 따윈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내 결정이고 내 선택이었다. 그것이 오롯이 내 몫이란 건 이런 걸 거다. 나, 공동체, 그리고 사회가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해 일어나는 어려움에 아기를 탓하지 않는 것 말이다. 나는 내 역할을 잘 해내고 있으니 이제는 사회가 제대로 작동했으면 좋겠다. 아기에겐 의무가 없다.

2018년 5월16일

산후조리원을 예약했다. 웨딩이나 혼수도 간소하게 했던 터라 처음 산후조리원 가격 듣고는 화들짝 놀랐지만, 임신기를 겪으면서 산후조리원 만큼은 좋은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저기 알아보지도 않고 이 지역에서 제일 좋다는 한 곳만 둘러봤고 바로 예약했다. 이제 내 몸에 돈을 써야겠다.

조리원 가격이 2주에 330만원이다. 여기에 산후마사지 7회를 추가하여 70만원을 더 결제 할 계획이다. 내 생에 2주 생활에 400만원을 써 본적이 있던가. 허니문에도 그렇게 안 썼다. 면회 금지 조항과 아기와 동실하지 않는 게 이 조리원의 강점이라 생각했다. 아기 낳고 2주만큼은 남편과 호텔살이처럼 지내야지. 생각만큼 우아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2018년 5월17일

하루하루 커져가는 내 배를 보면 문득 신기하단 생각이 든다. 내가 모르는 새에 아기가 정말 커가고 있긴 하구나. 아기의 일은 성장이고, 뱃속의 내 아기는 그 일을 정말 열심히 하고 있구나. 이렇게 이 작은 생명체에 집중하다 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나도 힘을 내서 나를 잘 지키고 내 일을 열심히 해야지.

내가 임신을 지금까지 지속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내 몸의 헌신과 수고 덕분이지만, 이를 위해서는 남편의 서포트가 아주 중요했다. 맞벌이를 하면서 부부가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시간에 퇴근할 때는 육체가 보다 건강한 남편이 집안일을 더 많이 하는 게 공평하다는 서로 간의 합의가 있어 결혼 초부터 집안의 노동은 대부분 남편이 맡아 했다. 뱃속에 아기가 있는 지금은 내가 안식에만 집중 할 수 있도록 그가 가사 노동을 A부터 Z까지 모두 다 하고 있다.

남편은 임신의 수고를 함께 질 방법을 늘 고민하고 또 생각한 대로 실천하고 있다. 그건 내가 임신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어쩐지 이런 얘길 하면 사람들은 불편해한다. 임신했다고 남편을 부려 먹는 거냐며 내게 이기적이라 말하는 사람부터 남편이 불쌍하다는 사람까지. 한 사람이 가사를 도맡아 한다는 건 파트너가 부려 먹어 그런 걸까. 그렇다면 임신하지도 않은 남성들은 왜 그렇게들 아내를 부려 먹는 걸까. 그래도 부럽다는 자매들의 이야기는 서글프고, 이를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남성들은 한심하다.

사실 남편은 임신당사자인 나와 가장 친밀한 사람이자 뱃속 아기의 공동양육자다. 그러니까 남편이 이 짐을 나눠 지는 게 '물은 항상 젖어있다'는 처럼 당연한 말이어야 하지만, 사람들은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난 이야기쯤으로 듣는다. 제아무리 수고하는 남편이래도 임신당사자만큼은 못하다. 내가 손가락만 까닥거리며 밥만 먹고 잠만 자더라도 말이다. 아기와 함께하는 행복은 거저로 오지 않는다. 당신이 남성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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